[너를 위한 미술사: 고암 이응노 이야기 ③]
무조건 찾아간 일본 남화의 대가, 케이게쯔 선생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도쿄에는 우리나라 화가들이 한 열 명 정도 있었을 겁니다. 어떤 그림을 그리느냐는 물음에 동양화를 공부하러 왔다고 하면 젊은 사람이 동양화 같은 것을 해서 뭐 하냐는 식으로 말을 했습니다. 나는 민족적인 그림을 그리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두들 서양화만 그린다면 동양화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도쿄 우에노 공원은 햇살 아래 밝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화창한 날씨에 사람들은 연못에서 보트를 타거나 양산을 쓴 채 산책을 했습니다. 새들이 하늘을 가로지르며 높은 소리로 노래했습니다. 이응노는 벌써 세 바퀴째 공원을 돌았습니다. 그는 일본에 와서 도쿄 고엔지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조선에서 웬만한 집 한 채를 살 수 있는 돈 이천 원을 들고 왔지만 집을 구하고 나니 돈은 점점 바닥나고 그림을 배우기 위해서 어느 선생을 찾아가야 할지 막막하고 초조했습니다. 조금 전에 전람회에서 보고 나온 작품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습니다. 일본 남화의 대가로 유명한 마츠바야시 케이게쯔(松林桂月, 1876~1963)의 작품으로 전통을 현대적으로 바꾼 남화(南畫) 풍 작품이었습니다. '그래 그분에게 가르침을 받아보자.'
가르침을 받기로 결심하고 무조건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전에 해강 김규진 선생 댁을 찾아가 성공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용기를 냈습니다. '백 번이라도 찾아가리라!' 첫 번째는 문 앞에서 쫓겨났지요. 두 번째 찾았을 때 우연히 선생님이 대문 앞에서 손님을 배웅하고 있었습니다. 이때다 싶어 가져간 그림을 마당에 펴놓았습니다. 처음에는 무시하더니 지나가며 그림을 곁눈으로 슬쩍 보고는 무엇을 하러 왔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응노는 기회가 온 것을 알아챘습니다. 그 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냥 집으로 들어가려는 선생을 붙잡고 그림 공부를 하고 싶다고 간곡히 청했습니다. 선생은 마지못해 그럼 집에서 그림을 그려서 한 달에 한두 번쯤 가져와보라고 했습니다. 백 번을 각오했는데 두 번 만에 성공했습니다. 그렇게 하여 케이게쯔 선생님의 덴코화숙(天香畵塾)에 입문하게 되었습니다.
스승은 이응노를 조선인이라고 차별하지 않고 무척 아꼈답니다. 선생은 화실에만 틀어박혀 있지말고 부지런히 돌아다니면서 살아있는 현실을 보고 느끼며 사생(寫生)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깊은 감화를 받았습니다. 매달 그림을 그려 가지고 갔는데 한 칠 개월쯤 지난 뒤에 선생은 더 이상 가르칠 게 없다고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응노는 사설 강습소인 가와바타미술학교(川端畵學校) 일본화과 야학부와 혼고회화연구소(本鄕繪畵硏究所) 양화과에 다니며 일본화와 서양화를 함께 배웠습니다. 주변에서는 조선 사람이라고 차별도 하고 젊은 사람이 진취적으로 서양화를 배워야지 구닥다리 동양화를 공부한다는 핀잔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응노는 때로는 멱살잡이를 하며 싸우기도 하면서 결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일본 유학 시절인 1938년, 제17회 조선미전에 출품했던 그의 작품 <동도하안>을 보면 서양화에서 쓰이는 투시 원근법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일본화와 서양화를 공부하면서 사물을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는 사생(寫生)에 대해 배웠습니다. 그는 사생을 하면서 정신과 뜻의 표현을 중요하게 여기는 문인화가에서 동양화가로 새롭게 출발했습니다. 유학 생활 10년 동안 조선과 일본을 오가면서 발길 닿는 대로 눈앞에 보이는 것은 뭐든 마치 사진 찍듯이 다 그렸습니다. 농부, 노동자, 빨래하는 여인, 포구의 풍경, 농악놀이, 자연 풍경부터 도시 풍경까지 많은 스케치를 남겼습니다. 이응노는 나중에 이 시기를 회상하면서 스스로 ‘자연 물체의 사실주의적 탐구 시대’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신남화(新南畫) 양식으로 실제 풍경을 많이 그렸습니다. 신남화는 일본 남화(南畫)와 서양화의 방법을 적당히 섞어 만들어낸 풍경화 양식입니다. 이때의 작품들은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만들어 나가려는 치열한 노력의 산물입니다.
동료 화가인 운보 김기창(雲甫 金基昶, 1913-2001)은 이응노의 새로운 도전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화의 문인화적 감흥을 잃지 않고 시정(市井)에서 오고 가는, 길가에 눈에 뜨이는 주위의 모두가 서정시로 보여 그것이 즉시 그림이 되고 마는 것인데 ... 일련의 인물화들은 마치 씨(氏)의 신변소설을 보여주는 듯하다."
1. 동경 우시고메구 요초마치, 1939, 종이에 수묵채색, 28.3*36.3cm (상단 우측) 2. 일본 후쿠로쬬 성냥배급소, 연도미상(6/20), 종이에 채색, 27.5*37cm(하단 우측) 3. 일본 아사가야역을 바라봄, 1940. 5. 12, 종이에 연필, 35.5*25.5cm(하단 좌측) 4. 시로타 2쵸메 근처, 연도미상(6/10), 종이에 수묵채색, 35.5*30.5cm(상단 좌측)
1. 나부, 1939, 종이에 수묵채색, 37*28cm 2. 남대문의 아침, 1949. 4. 13, 종이에 채색, 19.3*28cm 3. 일하는 남자, 연도미상, 종이에 연필, 20.2*28cm 4. 홍성에서, 1949. 7. 26, 종이에 연필, 종이에 채색, 18.4*26.6cm 5. 남대문 시장에서, 1949, 종이에 채색, 19.3*28cm 6. 창경원 농악회 관객 부인상, 1947, 종이에 연필, 종이에 채색, 10.2*25cm
이응노는 일본에서 유학 생활을 하면서 조선에서 개인전을 두 번 열고 몇 차례 조선미전에도 참여하였습니다. 1942년 <황량(荒涼)>은 일본화원전에서 특선을 했습니다. 이 작품은 도쿄를 가로지르는 아라카와강을 배경으로 하였습니다. 구부러진 강 위에 뱃사공이 노를 젓고 주변 논과 밭은 추수가 끝난 늦가을의 거칠고 황량한 풍경입니다. 재료로 수묵담채를 썼지만 화면 구성은 투시도법을 적용하여 실경을 세밀하게 묘사하였습니다. 뒷날 그는 이 작품이 수탈 당하고 있는 조선 민중에 대한 저항의 의미를 담았다고 했습니다.
이응노는 일본에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주 조선을 여행하며 산수 풍경과 풍속화를 남겼습니다. 그때의 작품으로 <공주 풍경>은 세밀하지는 않지만 가볍고 경쾌한 필묵으로 사실적인 일본 남화풍 산수를 보여줍니다. 전통 산수와는 다른 원근법을 썼으며 전통 산수화에서는 볼 수 없는 하늘을 맑게 채색했습니다. 고향인 홍성과 대전, 공주 등에서 스케치풍의 작품을 많이 남겼습니다.
이응노는 큰 그림을 그릴 때에는 육 개월씩 꼼짝 않고 작업만 했습니다. 조선미전이나 일본화원전에서 특선도 했지만 가지고있던 돈은 거의 다 써 버렸습니다. 나중에 아내가 끼니를 걱정할 정도였습니다. 일본까지 와서 고생하고 있는 아내에게 여간 미안하지 않았습니다.
케이에쯔 선생의 소개로 여기저기 그림을 팔러 다녀봤지만 일본도 어려운 시절이라 영 신통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결코 주눅 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은 가난하게 자랐기 때문에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헤쳐나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도쿄의 후쿠로마치에서 신문 배달소를 시작했습니다. 보급소에는 조선에서 유학 온 학생들과 조카들까지 한 20명을 데리고 있었는데 모두 학교에 보내주었습니다.
태평양 전쟁은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1944년부터는 미술 공모전도 금지되었고 미술 단체들도 모두 해산되었습니다. 도쿄에도 공습이 심해졌습니다. 일본이 전쟁에서 질 것이 불을 보듯 뻔해 보였습니다. 해방되던 해 봄이었습니다. 정말 어렵게 키워온 신문 보급소를 다 정리해 친구에게 넘겨주고 아이들 20명을 모두 데리고 조선으로 돌아왔습니다. 일본에 갔던 것은 돈을 벌려고 간 것이 아니라 그림 공부 때문이었기에 미련이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