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미타 김 인터뷰 ①]
'천경자 화백의 차녀' 수미타 김, 서울 역삼동 맨션나인서 개인전 개최
이례적인 전염병이 전 세계를 휩쓸고 지나간 후, 우리는 모든 것이 급격하게 달라지는 격변의 시대에 살고 있다. 앞으로 남아 있는 한정된 인생의 시간을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예술가들은 이런 시대의 흐름을 누구보다 빨리 인지하는 존재이다. 그들은 자신의 삶 속에서 시대와 사회의 변화를 피부로 느끼고, 그 에너지를 작품 속에 있는 힘껏 표현한다. 영국의 프랜시스 베이컨이 그랬고, 노르웨이의 에드바르 뭉크, 네덜란드의 렘브란트 또한 그랬다.
그들은 모두 자기 자신 속에 있는, 자기 정체성의 뿌리에서 독자적인 예술혼을 끌어올렸다. 이 혼돈의 시대에, 이제는 우리 모두 그래야 한다. 나의 존재의 뿌리는 어디에 있고 나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데일리아트는 맨션나인에서 개최 중인 《VESTIGE_존재의 리좀》 전시의 작가이자, 천경자 화백의 차녀이기도 한 수미타 김(김정희·70)을 인터뷰했다. 그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걸어갔던 천 화백의 ‘저항 정신’을 이어받은 그의 작품 세계를 통해, 자기 존재의 뿌리를 찾는 첫걸음을 내딛기를 바란다. 인터뷰는 총 3부로 나뉘어 게재된다.
- 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 과정이 궁금합니다. 예술적 영감으로 가득 찬 환경 속에서 태어나고 자라셨죠. 또 10년간 연방 공무원 생활도 하셨고요. 이러한 삶의 과정에서 결정적으로 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또한 부군 문범강 교수님과 어떤 미술적 교감을 주고받으시는지, 그리고 첫 만남 이야기도 듣고 싶습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어느 날 갑자기 어떤 영감을 얻어서 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은 아닙니다. 저는 지난 10년 동안 ‘보이스 오브 아메리카’라는 연방 정부의 대외 방송, 단파 방송국에서 근무했습니다. 미국에 건너가서 공부한 학문도 신문방송학이었던 터라 연결이 되었죠. 사실 그전에도 동아방송에서 1년 반 동안 아나운서로 근무한 배경도 있었습니다.
당시 남편은 아직 공부 중이었고, 어린아이가 둘 있었죠. 정말 안정적이고 좋은 직장이었지만, 10년 동안 하다 보니까 더 이상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예술을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대책 없이 급작스럽게 그만두는 건 다른 분들에게 권하고 싶진 않아요. 그러나 당시 제가 그만두었던 이유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아니었습니다. 다른 길을 모색해 보기 위해서였죠. 지금 생각해 보면 굉장히 무모했습니다.
그렇게 한참 무엇을 할지 고민하던 찰나에, 고등학교 때 미술 시간에 경험했던 일이 떠 올랐습니다. 당시엔 학생들 모두 미술에 대해 어떠한 기초도 배우지 않은 상황이었어요. 어느 날 갑자기 선생님이 한 학생을 교단에 앉히시더니, 학생들을 보고 인물화를 그리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날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었어요. 사과 그리는 법도 배우지 않은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신기하게도 그냥 막 쑥쑥 자연스럽게 그림을 그리는 저 자신을 본 거예요. 쉬는 시간이 되자 미대 가려던 친구들이 저에게 와서 그림 그려달라고 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때 “아, 내가 그림에 소질이 있나 보다” 하는 생각을 했죠. 제대로 된 스케치를 해본 건 이때가 처음이었습니다. 그런데 또 생각을 해 보면, 제가 어린 시절 내내 어머니의 그림 모델이었고, 집에서 어머니가 맨날 스케치하는 걸 눈으로 직접 봐 왔잖아요. 그래서 그런 것들이 알게 모르게 저에게 배어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슴푸레 떠오른 이 기억 말고도 또 다른 기억도 있어요. 대학교 때 휴교령이 내려지고, 당시 굉장히 암울했던 어느 겨울에 스케치북을 하나 끼고 동물원에 갔던 적이 있어요. 거기서 이리들이 엉켜 있는 모습을 스케치했습니다. 그때 재미를 느껴서 초원에 가서 닭도 그렸어요. 휴교로 인해 학교를 잘 못 다녔으니까 시간이 많았죠.
이 때쯤에 남편을 만났습니다. 대학교 2학년에서 3학년 올라가는 겨울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당시 서강대학교에 ‘강미회’라는 미술반이 있었어요. 거기서 전시회를 한다고 그러길래 봄에 제가 그렸던 그림을 무작정 들고 갔던 게 생각나네요. 그림 중에는 거울을 보고, 제 모습을 나체로 모델 그리듯이 그린 것도 있었죠. 어쨌든 그림을 가져갔더니, 웬 조그만 남자가 앉아 있는 거예요. 옷도 그냥 티셔츠 같은 게 아니라 특이하게 맞춘 튜닉 옷 같은 것을 입고 앉아 있었죠. 알고 보니 회장이더라고요. 그런데 그가 제 그림을 보더니 전시회에 내라는 거예요. 그렇게 남편과 처음 만나게 되었죠. (웃음)
그러다가 미술 클래스를 하나 들어볼까 싶어서 코코란 대학이라고, 지금은 없어진 대학에서 초상화를 그리는 반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이때 ‘물고기가 물을 만났다’는 표현처럼, 그림 그리는 게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그래서 제 친구들 초상화를 하나씩 맡아서 그려 주기도 했죠. 그러던 중 당시 그 지역에서 활동하시는 한국 작가분이 미술 대학원을 권유했어요. 저는 이미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 학위도 하나 있어 대학원에 갈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있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분이 참 제 은인이죠.
그래서 어느 날 새벽에 원서를 써서 문 앞에 갖다 놨죠. 그렇게 그냥 지원을 해 봤는데, 바로 합격하게 되었어요. 그때부터 완전히 추상화가로 변했죠. 그때 당시에 대학교 미술관 복도에 걸 정도로 큰 작품을 했던 기억이 나요. 지금도 간혹 그리는 꿈틀꿈틀한 이미지의 원형이 이 때의 잔재예요. 그런데 재미있는 건, 알고 보니 그 대학원이 저희 남편이 15년 전에 다녔던 곳이더라고요.
대학원 생활 도중 장학금도 받을 겸 학생들 디자인 클래스를 맡아 조교를 하게 되었어요. 처음에는 학생들에게 잘못 조언하게 될까 봐 겁이 났지만, 하다 보니 제가 가르치는 일을 즐거워한다는 걸 알게 되었죠. 졸업 후엔 운이 좋게 학교에서 강사 일을 6개월을 하게 되었어요. 또 그러다 운 좋게 당시 학교에서 ‘National Search’라는, 전국적으로 광고를 해서 뽑는 2명의 타임 선생 중 1명으로 선정되었죠.
가르치는 일은 여전히 재밌어요. 남편과 제가 지금도 학교에 있는 이유이죠. 어떤 때는 서로 자기 학교 학생 그림을 자랑하기도 해요. (웃음) 남편이 있는 곳은 사립학교여서 경쟁이 심했고, 제가 있는 곳은 ‘오픈 어드미션’이라고 해서 누구나 들어올 수 있도록 열린 학교예요. 영어를 전혀 못하는 아이, 이민 가정의 아이 등 정말 다양한 계층의 아이들이 오죠. 그런데 우수한 아이들이 가끔 나와요. 이런 맥락에서 두 학교 학생들의 그림은 서로 정말 다르죠.
보통 동양인이 그림을 잘 그린다는 선입견이 있는데, 제 경험상 절대 그렇지 않아요. 저는 흑인 아이 중에도 굉장히 잘 그리는 학생을 봤고, 또 히스패닉 아이 중에도 뛰어난 친구를 봤어요. 그래서인지 저는 개인적으로 그림을 배우지 않은 학생들을 가르칠 때 더 즐거워요. 그런 학생들은 스폰지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이거든요. 그런데 자기가 조금 안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은 실험적인 작업을 힘들어하죠. 자기만의 전형에서 벗어나기가 어렵거든요.
- 이번엔 맨션나인에서 개최 중인 전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신작들을 감상하면서, 이미지 표현에 있어 이전 작품들보다 더 거칠고 강렬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특히 이번엔 상대적으로 더 역동적인 이미지가 표현되었음을 알 수 있었는데요, 개인적으로는 마치 신나게 춤을 추는 듯한 느낌으로 다가와서 속이 시원해지기도 했습니다. 새롭게 소개되는 신작 여덟 점엔 작가님의 어떤 생각과 정신, 삶이 담겼는지 궁금합니다. 또한 이전과 달리 새롭게 추가된 점이 있다면 어떤 요소가 있는지요?
이번 신작들은 이전과 달리 제가 표현하고 싶은 것을 서사적으로 풀지 않고 최대한 응축된 표현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질문할 때 말씀하신 에너지와 역동성 두 가지를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죠. 이런 요소들이 이전 작업과의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보통 전시회가 잡히면 작가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지니까 미친 듯이 일을 하게 됩니다. 저도 마찬가지로 학교에 있는 큰 스튜디오에서, 집에서 하는 것과는 달리 스케일이 큰 작업을 하기 위해 밤을 새우다시피 작업을 했죠. 전시회가 잡힌 이후 몇 달 동안 작가가 이렇게 규칙적으로 일을 해야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것 같아요. 저는 항상 학생들에게도, 자기들이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강렬한 표현이 나오도록 자기를 막 밀어붙여야 한다고 가르치거든요.
그래서 저는 작업을 할 때 항상 내가 지금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걸 실천하고 있는지 스스로 되물어요. 그러면서 아닐 땐 확 지우고 다시 그리고 그러죠. 그래서 이번 신작들도 어떤 건 좀 빨리 되고, 어떤 거는 좀 느리게 완성되었죠. 예를 들어서 < Wrapped in Tranquility-4> 같은 경우엔 몇 번을 지우고 다시 그리는 과정을 반복했죠. 이번에 작업할 때 팔레트 나이프를 많이 썼습니다. 그 이유는 붓을 가지고 그림을 그리려 하면 아무래도 표현을 자세하게, 사실적으로 하고 싶어지기 때문이에요. 그렇게 하다 보면 에너지를 잃어버리게 되거든요.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데드라인이 다가오고 참 절박할 때도 아니다 싶으면 그냥 다 지워버리고 다시 작업했어요. 왜냐하면 내가 지금 이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게 중요한가, 아니면 좀 그럴싸한 작품들을 많이 하는 게 중요한가를 스스로에게 물었을 때, 항상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길을 택했기 때문이죠.
제가 지금의 나이에 이르게 되고부터 많은 것들을 수용하게 되었어요. “나는 나다”는 생각이 들고, “나같이 사는 건 어떻게 사는 걸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죠. 우리가 살아가면서 알게 모르게 많은 도전이 들어오잖아요. 저도 개인적인 불행은 물론 많은 연습을 겪었습니다. 근데 그럴 때마다 불행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대처하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어요. 어차피 겪어야 할 역경이라면, 다음 단계로 자신을 승화할 수 있는 방향을 택하는 게 더 이로우니까요.
이런 생각과 감정을 느낀 후로는, 왜 그럴 때 있잖아요. 아무도 없고 그냥 집에 나 혼자 있는데 커피 한 잔 마시면서 느끼는 어떤 짜릿한 외로움 같은 거요. 이번 신작의 역동성도 이런 감정에서 비롯되었어요. 예컨대 이런 거죠, “앞으로 나에게 어떤 미래가 닥쳐오더라도, 내가 아무리 아무도 모르는 동떨어진 미지의 세계에 홀로 떨어지게 되더라도, 나는 의연하게 호기심을 갖고 활발하게 대처하겠다. 기꺼이 고통을 직면하고 춤을 추겠다.”
- 2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