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청년 작가 열전 ⑫]– 강유정 작가

빛을 품은 어둠과 어둠 속에서 탄생하는 빛, 삶과 죽음의 서사시를 그리다

by 데일리아트
검은색이 주를 이루는 무채색의 풍경을 그리는 강유정 작가
1267_2684_457.jpg 별의 무리 Following Stars, 2021, oil on canvas, 18.5x27.3cm, 강유정 작가 제공

태초의 순간 빅뱅이 일어나기 전, 세상의 모든 것은 칠흑 같은 어둠으로 뒤덮여 있었다. 적막, 즉 어둠은 우리 모두의 기원이자, 한때 모든 세상을 품었던 거대한 ‘무’의 어머니이다. 그러나 ‘무’가 있다면 ‘유’도 존재하는 법, 최초의 불꽃이 발화되는 순간, 고요한 물결 같던 세상은 폭발하는 별과 함께 휘황찬란한 빛의 파도를 동시에 품게 되었다. 빛과 어둠은 대립적인 존재가 아니다. 이 경이로운 두 존재는 한 생명이 겪게 될 삶과 죽음을 모두 내포하기 때문이다. 어둠은 빛을 품고, 빛은 어둠 속에서 탄생한다. 자신만의 빛과 어둠의 서사시를 써 내려가는 강유정 작가를 만난다.


- 자기소개 부탁드린다.


강유정입니다. 회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검은색이 주를 이루는 무채색의 풍경을 그립니다. 저는 풍경의 표면에 드러난 세계의 이면에 주목합니다. 그것은 장소에 남은 과거의 흔적 또는 자연의 질서이자, 형상과 명암, 질감과 같은 온전히 조형적인 요소이기도 합니다. 최근에는 풍경의 질감과 무늬에 드로잉의 리듬을 겹쳐보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 전반적으로 작품이 모노톤이다. 개인적으로 어둠이 주를 이루는 배경 속에서 흰색이 마치 하나의 변화무쌍한 생명처럼, 어떠한 상징처럼 부각되는 점이 인상 깊었다. 검은색이 ‘죽음’이자 ‘심연’이라면, 흰색은 ‘생명’이자 ‘탄생’으로 느껴졌다. 이처럼 색을 제거하고 흑백으로 이미지를 표현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작가에게 ‘검은색’은 무엇을 의미하며, ‘흰색’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무채색의 풍경 표현은 실제 풍경의 색채를 극대화하기 위한 시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학부 시절 일상의 장소를 주제로 작업하며 서울의 산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인왕산의 시각적 특징과 역사성에 주목했습니다. 인왕산은 날씨에 따라 바위의 무늬와 우거진 나무가 짙은 먹색으로 보였습니다. 성곽과 초소 등 사람의 흔적이 자연 공간에 남는 방식은 사건이 기억되는 방식을 상기시켰습니다. 마침, 유사한 풍경을 묘사한 옛 회화 작품을 조사하며, 풍경의 구성과 단색조의 표현을 시도하게 되었습니다. 검은색은 자연의 색인 동시에 과거를 상기시키기 위한 색이었으나, 작업을 거듭하며 점차 의미가 확장되었습니다.


1267_2685_816.jpeg

검은색을 주조로 작업하며, 점차 풍경에 드러난 사물의 형상이나 윤곽, 명암, 그림자 등 조형 요소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무채색의 표현을 통해 풍경을 드로잉 또는 소묘적 요소로 분화하고 확장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일상의 빛과 그림자, 불꽃의 반짝임 등을 묘사하며 검은색과 흰색의 대조, 사이의 무수한 회색의 스펙트럼에 관심을 두게 되었습니다. 검은색과 흰색이 무채색의 스펙트럼을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검은색은 물감이 가득 찬 것으로, 흰색은 검은색이 점차 옅어짐에 따라 비어 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흰색 물감을 칠하기보다는 캔버스의 흰 여백을 남겨두어 덩어리처럼 표현했습니다. 검은 풍경 속 흰색은 약간의 비중을 차지하는, 작은 사건 또는 특이점으로 기능합니다. 들불, 스파클라, 연기, 포말과 같은 것들입니다.

1267_2686_849.jpg 말뚝박기-인왕 Stakes on the Mountain- Inwang , 2016, oil on canvas, 80.3x116.8cm, 강유정 작가 제공


1267_2687_931.jpg

검은 물, 하얀 불 Black Water, White Fire (exhibition for the doctoral dissertation) 검은 물, 하얀 불 (박사학위 청구전), 2022, Ewha Arts Center, Seoul, KR, 강유정 작가 제공


- 산과 바다, 물과 불. 작품 속 이미지가 주로 우리의 삶을 이루는 자연적 요소들이다. 흑백으로 이러한 대상들을 표현하는 방식이 관객에게 어떤 의미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그리고 이 요소들이 작가의 삶과 연결되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지?


저는 이원적 구조에 관심이 있습니다. 검은색과 흰색이 그러하듯, 작품 속 빛과 어두움, 산과 바다, 물과 불 등 이원적 구조가 반복됩니다. 그러나 저는 각각이 양극에 위치한 배타적 관계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이들이 상호작용을 하며 대립과 조화를 이루는 양상에 주목합니다. 예를 들어 물과 불은 상반된 힘을 지닌 원소로 대립 항을 형성하지만, 인간의 근원 문제인 삶과 죽음을 모두 내포하는 상징이라는 점에서 유사합니다. 물과 불은 각각 대상을 적시고 태움으로써 전복시킵니다. 들불과 파도는 소멸이자 회복이며, 변화의 시작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여 자주 묘사하는 이미지입니다. 이들 이미지가 내포하는 거대한 시간성이 매력적으로 느껴졌습니다.

1267_2688_1044.jpg 파도- 플라이아데스 Wave - Pleiades 2021, oil on canvas, 80x80cm, 강유정 작가 제공


1267_2689_1115.jpg 쏘아 올린 불꽃 Shooting Lights, 2020, oil on canvas, 80x65cm, 강유정 작가 제공

저는 주위 정경을 관찰하고 작품을 구상하며 풍경의 시간을 생각하곤 합니다. 개인의 시간을 초월하여 오랫동안 존재해 온 것, 삶과 죽음이 반복되고 쌓여온 과정이자 결과를 떠올립니다. 그러한 사유를 작품으로 옮기고 다시 작품 속 풍경을 들여다보며, 풍경으로부터 위안을 받기도 합니다. 저는 산과 바다, 물과 불에는 보편적 이미지와 정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원적 풍경 요소는 흑백의 이원적 색채 표현을 통해 신화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합니다. 어딘가의 바다와 불꽃놀이의 이미지는 보는 이로 하여금 자신에게 익숙한 장소 또는 과거의 기억을 상기시킬 수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누군가에게는 보편적 경험을, 다른 누군가에게는 반복과 순환과 같은 시간의 흐름을 떠올리게 하는 등 자유로운 감상을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 평소 취미로 무엇을 하고, 작품 활동의 영감은 어디서 받는가? 또한 작품을 할 때 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작업실에서 저만의 루틴이 있습니다. 작업실을 오가며 산책하고, 작업 전 커피를 내리거나 향을 피우며, 작업 내내 음악을 듣습니다. 저는 이 루틴이 취미라고 생각합니다. 소리나 향, 맛처럼 감각적인 요소가 작업 공간을 채우는 것이 좋습니다. 작업과 함께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취미 활동을 하고 있다고 느끼기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잘 보이는 곳에 별도의 영역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커피와 각종 차, 인센스 등을 작업실 한편에 모아 놓았습니다. 산책에서 발견한 것, 음악 감상이 서로 다른 감각과 결합하고 교차하며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곤 합니다.

1267_2691_1441.jpg 별자리 뜨기 Tracing Constelltions , 2021, Space Illi, Seoul, KR, 강유정 작가 제공

- 앞으로 지금의 작업 방식과 다른 형태의 작업을 할 계획이 있는지, 흑백이 아닌 다른 색을 사용할 생각도 있는지 궁금하다.


최근에 인도에서 작업하고 있습니다. 낯선 풍경을 마주하며 자연스레 새로운 이미지들이 작업에 흘러들 것이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날씨 변화와 인상, 서로 다른 풍경에서 공통으로 발견한 선적인 요소와 질감 등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몇 년 전부터는 흑백 외의 색을 조금씩 사용하고 있습니다. 바탕에 엷은 유채색을 사용해 무채색 표현의 스펙트럼을 넓히고자 했습니다. 유채색이 중심이 되기보다는, 무채색을 위한 색조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캔버스의 유채 표현, 무채색이 중심을 이루는 색채 등 현재의 작업 방식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화할 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 자신의 작품과 가장 잘 어울리는 음악이 있다면 무엇인가.


작업할 때 음악을 정말 많이 듣습니다. 전시를 준비할 때마다 플레이리스트를 만들기도 합니다. 작품의 주제나 키워드를 떠올리게 하거나 분위기와 어울리는 음악을 엮어 만듭니다. 전시가 끝난 후 음악을 듣다 보면 작업할 때의 생각과 감정, 또는 과정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한 곡을 선택하기는 어렵지만, 2022년 개인전을 준비할 때 즐겨들은 드뷔시의 ‘바다: 세 개의 교향적 소묘’가 생각납니다. 그는 호쿠사이의 <파도>를 본 후 ‘바다’를 작곡했다고 하는데, 교향적 소묘라는 부제는 음악 요소들이 파도처럼 부딪히고 융합하며 다시 흩어지며 만들어낸 순간의 인상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표현한 것입니다. 저는 이에 영향을 받아 풍경의 리듬을 시각적으로 풀어내고자 했고, 개인전 《에스키스 심포니》로 이어졌습니다.

1267_2690_142.jpg 에스키스 심포니 Esquisse Symphony , 2022, Sahng-Up Gallery, Seoul, KR, 강유정 작가 제공


https://youtu.be/tYSX24JuW4A?si=_pSwvQwkbeqwAm9_


- 세상의 모든 예술가 중 가장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누구인지. 그리고 만약 그 사람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할 수 있다면 무엇을 할 생각인가.


파리 오랑주리미술관에서 모네의 수련을 본 적이 있습니다. 공간을 가득 채우는 작품에 빛이 비추며 시시각각 색채가 변화하는 모습에 감동했습니다. 자신의 정원에서 어떤 풍경을 보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 궁금하여 지베르니에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예술가 중 한 사람을 만난다면 모네를 만나 그의 정원을 함께 걷고 싶습니다. 함께 산책하며 같은 풍경을 보고, 작업실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화가로서 나만의 세상을 만들고 하나하나 채우는 것, 매일 그것을 바라보고 그리는 삶의 기쁨과 위안을, 그럼에도 화가라면 붓질마다 느꼈을 고민은 무엇이었는지 물어보고 싶습니다.

1267_2692_1527.jpg 아틀라스 Atlas, 2024, oil on paper, 18x18cm, 강유정 작가 제공

- 만약 작가의 작품이 세계 미술사에 남게 된다면 어떤 내용으로 기록되기를 원하나?


미술사에 남는다는 것은 의미 있는 작품 또는 가치를 남겼다는 것이겠지요. 기억 된다는 것 자체로 작가에게 보람 있는 결과이자 가장 큰 인정입니다. 작품이 기록되는 방식은 나의 의도와 다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 담론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요.


- 마지막으로 데일리아트에 바라는 점 한 말씀 부탁드린다.


동료 작가의 소개로 본 인터뷰에 참여하여 작업과 일상을 공유할 수 있어 즐거웠습니다. 소개해 준 동료와 인터뷰 공간을 내어 준 데일리아트에 감사드립니다. 청년 작가 열전의 다른 작가들의 인터뷰를 읽으며, 작품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어 흥미로웠습니다. 앞으로도 여러 작가의 인터뷰가 이어지며 더욱 많은 작품과 다양한 생각에 다가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강유정 (b. 1992)


학력

2023 이화여자대학교 일반대학원 서양화전공 박사 졸업

2018 이화여자대학교 일반대학원 서양화전공 석사 졸업

2015 이화여자대학교 서양화, 미술사학전공 졸업


개인전

2023 Eternal Present, 오브제후드, 부산

2022 검은 물, 하얀 불 (박사학위 청구전), 이화아트센터, 서울

2022 ENCOUNTER, 온드림 소사이어티, 서울

2022 에스키스 심포니, 상업화랑 을지로점, 서울

2021 별자리 뜨기, 공간:일리, 서울

2020 불꽃과 파도,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청주

2019 홀로 가는 밤, 인영갤러리, 서울

2019 발현 發玄, 성남큐브미술관 반달갤러리, 성남

2018 검은, 들, 바다, 예술공간 서:로, 서울

2017 경계의 가장자리, 스페이스 15th, 서울


주요 단체전

2024 회화 산책, 대구신세계갤러리, 대구

2024 드로잉그로잉, 이음갤러리, 서울

2024 자연이 머무는 곳, 복합문화공간 공간미학, 평택

2023 경기청년展_New Blood, 국회의원회관, 서울

2023 드로잉그로잉, 탈영역우정국, 서울

2023 반짝, 상업화랑 용산점, 서울

2022 페리지 윈터 쇼 2022, 페리지 갤러리, 서울

2022 겨울의 소리, 오브제후드, 부산

2022 별이 빛나는 밤, 기당미술관, 제주

2022 규중칠우쟁론기, 갤러리 세줄, 서울

2022 2021 신소장품전 '유연한 풍경', 성남큐브미술관 상설전시실, 성남

2021 우리가 기억하는 것들, 갤러리 인, 서울

2021 14기 입주작가 결과보고전 '공사중',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청주

2021 검은 회화, 이안아트스페이스, 서울

2020 14기 입주작가 프리뷰전 '난립예정지',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청주

2019 화자가 문장을 말한 시간, 충무아트센터, 서울

2019 상념의 궁전, 김세중미술관, 서울

2019 12-24, 공간:일리, 서울

2019 제4회 뉴드로잉 프로젝트,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양주

2018 흐르는 공기처럼, 움직이는 바람처럼, 유중아트센터, 서울

2018 마인드 드로잉 프로젝트, 창성동실험실, 서울

2018 제3회 뉴드로잉 프로젝트,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양주

2018 제8회 스카우트전, 갤러리 이마주, 서울

2016 그럼에도 불구하고 X,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서울

2015 오늘의 살롱 2015, 커먼센터, 서울

2015 미술대학 연합전시 '오매불망 자나깨나 잊지못함', 언더우드소셜클럽, 서울


아트페어

2023 아트부산 2023, 벡스코, 부산

2022 더프리뷰 성수, 에스팩토리, 서울

2021 더프리뷰 한남, 블루스퀘어 문화공간 NEMO, 서울

2019 유니온아트페어2019 <All About Love>, 에스팩토리, 서울


레지던시

2020-2021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청주


수상/선정

2023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 우수학위논문상 (검은 물, 하얀 불: 시간을 초월한 풍경 연구)

2022 현대차 정몽구 재단 ONSO ARTIST 선정

2022 아르코 청년예술가생애첫지원 준비연구 선정

2021 상업화랑 EX-UP 프로그램 2기 선정

2019 성남청년작가전 선정

2018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제3회 뉴 드로잉 프로젝트 장려상

2018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 우수학위논문상 (배제된 역사의 소환: 장소 기억 작업으로서의 회화)

2017 예술공간 서:로 작가 공모 선정

2016 서울대-현대자동차 Art-Uni-On 선정


기획

2020 Image World : Part I, 예술공간 의식주, 서울 (컬렉티브 그룹 'banbanmuumani')


소장

국립현대미술관 정부미술은행, 성남큐브미술관, 이대서울병원, 서울특별시청 박물관과, 경기문화재단,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외 개인 소장


강의

2018- 계원예술중학교, 성남


https://www.d-art.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67

keyword
작가의 이전글이미지를 변주하는 시각 예술가 - 홍준호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