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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일리아트 Jul 19. 2024

염천교,춘삼아!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서소문 밖 첫 동네]

염천교,춘삼아! 네가 왜 거기서 나와?

 

2, 춘삼아! 네가 왜 거기서 나와?

비오는 날 염천교 아래에 기차가 지나 간다.

 드라마 '왕초'나 '야인시대'를 통해서 대중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 거지왕 김춘삼이다. 거지들을 모아 구걸을 시키고 중부시장일대에서 활약한 김춘삼은 당대의 주먹 김두한, 이정제등과 어울렸다. 그 거지왕 김춘삼의 삶의 근거지였던 곳이 염천교이다. 염천교는 조선시대에 화약을 만드는 염초청 근처의 다리라해서 염초청교라 부르다가 염천교로 바뀌었다. 그런데 서울역 앞의 염천교가 거지왕 김춘삼이 활약(?)했던 그 염천교일까? 만일 우리가 일제 강점기나 제 1공화국 시절로 되돌아간다고 하자. 김춘삼이 서울역 앞의 염천교에서 나오는 것을 김두한이나 이정제가 본다면 아마도 ‘춘삼아! 네가 왜 거기서 나와!’ 했을 것이다. 옛 이야기속에서 산신령이 여기서도 나오고 저기서도 나오지만 헷갈리지 않게 이야기를 풀어가야 하듯이... 거지왕 김춘삼이 맹활약했던 근거지는 ‘이곳 염천교가 아니올시다.’ 1770년에 만들어진 한양도성도를 보면 또다른 염천교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청계천 4가의 염초청 표지석

김춘삼은 청계천에 있던 또 다른 염천교에서 활동했다. 청계천의 다리는 거지들의 소굴, 좋게 말하면 삶의 터전이었다. 청계천은 서울시민들이 생활하수를 버리는 하천인데 시간이 지나면서 하천 바닦의 흙과 오물들이 쌓여 물이 흐르지 못할 지경이었다. 비가 오면 범람하기 일쑤였다. 악취가 진동하고 불결하여 전염병의 발원지였다. 오죽하면 조선 후기의 영조대왕은 자신의 치적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을 청계천 준설사업으로 꼽았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긁어낸 흙과 오물을 멀리 버릴 곳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아진 흙과 쓰레기를 청계천 주변에 쌓아 가산(假山)을 만들었다. 거기다 꽃을 심어 방산(芳山)이라했다. 꽃다울 방자를 써서 ‘꽃향기가 나는 산’이라는 것이다. 을지로 4,5가와 청계천 사이에 있는 방산시장의 유례이다. 그 가짜산, 방산에는 오고 갈데 없는 거지들이 몰려와 살았는데 그들은 그 곳에 굴을 파고 살았다. 조선 정부에서는  땅을 파고 사는 거지들(땅꾼)을 어여삐여겨 살아갈 수 있도록 뱀을 잡아 약재상에 팔도록했다. 그래서 뱀잡는 사람을 땅꾼이라고 한다. 그런데 어느 곳이든 서열의 우열이 있는 법인데 그 땅꾼의 왕초를 '꼭지'라했다. 그 꼭지중의 꼭지를 '꼭지단'이라 불렀다. 고인이 된 최진실이 꼭지단의 주인공으로 활약한 영화가 있는데 그 꼭지단, 거지의 우두머리를 말하는 것이다. 김춘삼은 거지중의 우두머리니 꼭지단이다. 그 김춘삼이 살던 염천교는 봉래동 염천교가 아니라 청계천주변에 있던 염초청 근처의 염천교이니 비오는 날에 김춘삼의 흔적을 찾으려고 염천교주변을 배회하다가는 고압선에 감전될 일이다. 그런데 이 염천교라하면 물이 흘러야 할텐데 지금의 염천교 아래에는 물이 아닌 기차가 다닌다. 염천교는 분명히 물이 흐르던 하천위의 다리였다. 만초천이라고 들어보셨는가? 도성 밖 첫 동네를 감싸 흐르던 물길이다. 그 만초천에는 6개의 다리가 있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염천교이다. 무악재에서 발원한 만초천은 남으로 흐르다가 아현고개와 약현(약현성당이 있는 고개)때문에 물길이 근방에서 휘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문제는 1919년 남대문정거장, 경성역 확장공사와 경의선 수색 직선화 철로 공사시에 이 일대에 있던 만초천의 다리중 하나가 없어졌다. 철길이 물길을 잡아먹은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염천교는 원래의 염천교가 아니다. 선로위에 있는 다리라 해서 과선교, 이일대가 봉래동. 청일전쟁때 남대문 일대에 위기에 처한 일본인들을 만리동에 주둔해 있던 군인과 만난 동네라 해서 봉래동(逢萊洞)이라했다. 그래서 다리이름을 봉래동에 있는 다리 '봉래교'라 불렀다. 1931년에 발표한 염상섭의 장편 소설 <삼대>를 보면 상훈의 첩 경애가 상훈의 아들 덕기를 남대문에서 ‘봉래교’로 바래다주는 내용이 나온다.<삼대,문학사상,88p> 1931년에는 이 다리의 이름이 봉래교였던 것이다. 언제부터 염천교가 된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염천교가 워낙 유명하니까  봉래교, 과선교라 부르다가 없어진 유명한 다리 이름, '염천교'로 차용한 것이다. 그런데 이 염천교는 지금도 그러하지만 무척 쓸쓸한 다리였다.

영화 울며 헤진 염춘교 포스터

이 염천교는 그 시절에도 무척 쓸쓸한 다리였다. 염천교에는 얼마 전까지도 이미자의 노래비가 있었다. 노래의 가사를 볼 때 염천교는 염춘교와 다리 이름을 혼용해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울며 헤진 염춘교(1966) / 노래 : 이미자 (박시춘 작곡 / 영화 주제곡)

부모도 잃은 남매 정든 고향 하직하고
낯설은 서울역에 손가락에 맹세 걸고
이 년 후 추석날 밤 염천교에 달이 뜨면
돈 벌어 만나자고 울며 헤진 멍든 가슴
아~ 이 무슨 슬픈 운명 하늘 아래 두 남매


1966년 박구 감독이 만든 영화 ‘울며 헤진 염춘교’라는 영화의 주제가이다. 당시는 염천교를 염춘교라고도 부른 모양이다. 부모와 사별하고 서울로 상경한 은희와 주일 남매는 성공을 다짐하며 해마다 한 번씩 만날 것을 약속하고 염춘교에서 헤어진다. 성공에의 길은 너무도 험난했다. 누나 은희는 불량배들에 의해 순결을 짓밟히고 비관한 남매는 함께 죽기로 결심하고 극약을 마신다. 그러나 다행히 목숨을 부지하고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져 한 독지가의 도움을 받아 밝은 앞날을 약속받게 된다는 내용이다.

당시 영화의 스틸이 있어 소개한다. 당시의 염천교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영화 '울며 헤진 염춘교' 스틸 사진


https://www.d-art.co.kr/news/articleView.html?idxno=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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