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사람을 사랑한 화가

[너를 위한 미술사: 고암 이응노 이야기 ④]

by 데일리아트
먹과 붓으로 함께 살아가는 우리의 이웃을 즐겨 그려
어렵게 사는 사람들, 일하는 사람들을 바라본 따뜻한 눈
권력자들보다 그들과 함께 있을 때 자신이 살아 있다는 느낌 받아

1945년 봄이었습니다. 도쿄 하늘에는 사이렌 소리와 폭격이 잦아졌습니다. 태평양 전쟁은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여기 저기서 죽고 다치고 물자가 부족해 먹을 것도 없었습니다. 이응노는 일본이 전쟁에서 반드시 망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고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어렵게 자리 잡은 신문 배달소를 친구에게 넘겨주고 서둘러 짐을 꾸렸습니다. 그리고 그 해 봄 일본에 함께 와 있던 친척들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1362_2944_4549.jpg

수덕사 대웅전

이응노 고향 집 가까운 곳에는 백제 시대 창건되었다고 알려진 수덕사가 있습니다. 그 바로 아래에 수덕여관이 있는데, 가진 돈을 모두 털어서 이 여관을 사들였습니다. '혹시 일본이 전쟁에서 이기면 나는 여기서 세상을 잊고 농사 지으며 그림을 그리겠다', 이런 생각이었습니다.

세상 어느 곳이든 저마다의 사연을 간직하고 있지만, 수덕여관은 특히 문화 예술계 여러 인물들의 인연이 얽혀 있습니다.

1362_2950_633.jpg

수덕여관 전경. 이응노, 만공 스님, 일엽 스님, 나혜석, 장욱진, 김태신 등 우리 근대 문화인들이 비슷한 시기에 서로 다른 사연을 가지고 수덕여관을 찾았다.

이응노가 수덕여관을 사들였을 즈음에는 일제 강점기 신여성으로 유명했던 일엽 김원주(一葉 金元周, 1896 - 1971)가 만공(滿空, 1871 - 1946) 스님에게 수계를 받고 수덕사에 있었습니다. 이런 친구를 따라 불문에 들고 싶어 수덕여관에 머물렀던 사람은 정월 나혜석(晶月 羅蕙錫, 1896-1948)이었습니다. 만공 스님은 나혜석이 불문(佛門)에 의탁할 사람은 아니라고 보았는지 허락하지 않았고 그는 하릴없이 수덕여관에만 몇 년을 머물렀다고 합니다.

1362_3028_3338.jpg

정월 나혜석. 출처: 위키피디아

나혜석의 친구인 일엽 스님에게는 출가 전에 얻은 김태신(金泰伸, 1922-2014)이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화가가 되었다가 만년에 출가하였습니다. 김태신은 자서전에서 그 당시 이응노와 나혜석과의 인연을 언급했습니다. 이 즈음에 수덕사에는 십 대 소년 장욱진(張旭鎭, 1917-1990)이 만공 스님 아래서 반 년 정도 정양(靜養)을 했는데 그때 나혜석을 만났다고 합니다. 이응노는 해방이 되고 서울로 올라와 활동할 때에도 수덕사의 가을 풍경을 좋아하여 해마다 수덕여관을 찾곤 했답니다.

얼마 전 글쓴이도 시간을 내어 수덕여관을 다녀왔습니다. 이리 저리 얽혔던 인연들은 모두 떠나고 문이 굳게 닫힌 여관에는 산새 소리, 객이 홀로 듣습니다.

1362_3076_5752.jpg

이응노, 3.1운동, 1940년대. 50ⅹ61cm, 한지에 수묵담채. 개인 소장.

해방이 되자 추운 겨울이 지나 온 천지에 봄꽃이 피듯 세상은 한순간에 달라졌습니다. 새로운 기회를 찾아 젊은 사람들이 서울로 서울로 모여들었습니다. 이응노도 해방의 감격을 가슴에 품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수덕여관은 동생 흥노에게 맡겼습니다. 그리고 서울 남산동 근처에 '고암화숙'을 차리고 수강생들을 모집하여 그림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화가나 대학생뿐만 아니라 구두 수선공, 팥죽 장수 등 다양한 사람을 가르쳤습니다. 돈이 없어 학교를 못 갔어도 배우겠다는 사람 누구도 마다하지 않고 가르쳤습니다.

1362_3122_5643.jpg

이응노, 남대문 시장의 아침, 1949년 4월 13일. 종이에 채색, 19.3ⅹ28cm.

그렇게 해서 보수적인 화단이 쌓아 올린 높은 성벽을 깨려고 노력했습니다. 이응노는 동양의 전통 재료인 먹과 붓으로 함께 살아가는 이웃을 즐겨 그렸습니다. 어렵게 사는 사람들, 일하는 사람들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았고 권력자들보다 그들과 함께 있을 때 자신이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는 낮은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사랑했고 절망에 빠졌을 때 그들을 보면서 용기를 얻었습니다. 어두운 화실에 앉아 옛 그림을 베끼기보다 시장으로 나가 살아 있는 사람을 그렸습니다.

1362_3433_4730.jpg

이응노, 대장간, 1940년대 후반. 종이에 수묵담채, 28.5ⅹ38.5cm. 청관재 소장.

많은 화가들이 일하는 사람들을 그렸습니다. 밀레(Jean-François Millet, 1814-1875) 의 <만종>이나 단원 김홍도(金弘道, 1745-1806)의 풍속화들은 많이 알려진 작품일 겁니다. 이들 작품에서 화가는 일하는 사람을 아름답고 고결하게 그리거나 또는 해학적으로 그렸습니다. 다시 말해 화가는 일하는 사람들에게서 한 발짝 떨어져서 그들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같은 풍속화이지만 이응노의 그림에서는 자신이 그림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일하는 사람들이 바로 화가 자신입니다. 그는 1950년대 <취야>라는 연작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이 작품을 자신의 자화상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1362_3448_515.jpg

이응노, 취야, 1950년대. 종이에 수묵, 39.9ⅹ55.5cm. 개인 소장.

이응노는 1940년대 말부터 1950년대까지 노동자들의 모습을 많이 그렸습니다. 그러한 민중에 대한 사랑은 말년인 1980년대 <인간> 연작까지 이어지면서 새로운 모습으로 바뀝니다. 1948년 나이 마흔넷에 새로 문을 연 홍익대학교 미술과에서 교수로 강단에 섰지만 그에게는 고암화숙이 먼저였습니다.

1362_3124_5318.jpg

이응노, 취야, 1950년대. 종이에 수묵채색, 47ⅹ56.5cm. '취야'는 이응노의 자화상 같은 작품이다. 이 작품은 최근에 발견된 '취야' 연작 가운데 하나이다.

박인경이 이응노를 처음 만난 것은 1946년 미도파 백화점에서 열린 전시였습니다. 이화여대 동양화과 1기생이었던 박인경은 자신이 배웠던 동양화와 전혀 다른 경향의 이응노 그림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친구 금동원과 함께 고암화숙에서 공부했습니다. 그렇게 사제 관계로 만난 이응노와 박인경은 사랑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때 이응노의 나이가 마흔여섯, 박인경이 스물두 살이었습니다.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결국 이응노는 본처 박귀희(朴貴姬, 1909~2001)와 헤어지고 박인경과 함께하였습니다. 박귀희는 마지막까지 이응노가 넘겨준 수덕여관을 지켰다고 합니다.

이십대의 박인경에게는 위험한 모험이었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두려움 없이 뛰어들었고 모든 어려움을 참아냈습니다. 박인경은 평생의 동반자로 가시밭 같은 예술의 길을 이응노와 함께 걸었습니다. 그의 헌신이 아니었으면 이응노의 예술 세계가 그렇게까지 세상에서 빛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1362_3400_5049.jpg

이응노, 시장, 1940년대 초. 한지에 수묵담채, 39ⅹ56cm. 개인 소장.

해방의 기쁨은 잠시였고 세상은 혼란스러웠습니다. 해방 공간에서 그동안 억눌려 왔던 모든 요구가 한꺼번에 터져 나왔습니다. 정치는 물론 미술계도 파벌을 지어 싸우고 가짜들만 앞에서 설치고 다니는데 이응노는 울분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많은 문화인들이 월북을 하기도 하고 남아 있는 사람들도 지하로 숨어들었습니다. 이응노는 그렇게 바라던 해방이 왔건만 현실은 너무나 실망스러워 술만 마셨습니다.

1362_3077_451.jpg

이응노, 거리풍경 - 양색시, 1946년. 한지에 수묵담채, 50ⅹ66cm. 개인 소장.

그러나 절망에만 빠져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식민지 미술을 씻어내고 우리 미술을 새롭게 세워야 하는 큰 과제가 놓여 있었습니다. 해방 이후 이응노는 여러 미술 단체에서 활동하고 전시회도 참여하면서 화풍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먼저 일본화 느낌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일본에서 유학할 때는 성실하게 눈에 보이는 세상을 기록하듯 그렸습니다. 그러나 해방 뒤에는 한 붓으로 시작해서 한 붓으로 끝내는 남종화풍으로 바뀌었습니다. 1930년대부터 40년대까지 이응노는 전통 산수의 관념 세계에서 눈을 돌려 현실의 이웃을 그렸습니다. 1950년 해방의 혼돈도 차츰 가라앉는가 싶더니 한반도는 순식간에 전쟁의 불길에 휩싸였습니다.


https://www.d-art.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62

keyword
작가의 이전글네번째 시연 "종로에서 김환기를 만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