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성미술의 시작을 알린 김인순 회고전
'일어서는 삶' 전시 포스터
서울시립미술관은 지난 2024년 8월 29일(목)부터 서소문본관 2층 전시실에서 김인순 컬렉션 《일어서는 삶》을 전시하고 있다. 전시는 2025년 2월 23일까지 진행된다.
작가는 한국 여성주의 미술 연구와 미술사적 기록 보존을 위해 양평 작업실에 있는 작품 106점을 2020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했다. 기증 작품은 작가 본인 작품 96점과 1980~90년대 여성미술 운동을 실천한 여성미술연구회(여성미술분과, 1986~95), 그림패 둥지(1987~89), 노동미술위원회(1990~) 등이 공동 제작한 걸개그림 10점이다. 그 중 이번 전시에는 대표작 20점을 선별했다.
김인순은 한국 여성미술의 시작을 알린 작가이다. 민중미술 계열 작가로 알려지기 시작하며 한국의 자생적 여성미술을 구축했다. 한국 여성의 사회적 현실을 예술로 표현한 김인순 작가는 여성의 시대적 가치를 탐색하고 여성이 가진 긍정의 힘과 생명성을 중요하게 여긴다. 작가의 작품을 총망라한 이번 전시는 3개의 섹션으로 구성되어 한국 여성미술의 궤적을 조망한다.
첫 번째 섹션 ‘여성이란 이름으로’는 현실과 역사에서 소외되고 희생된 여성들의 서사를 작가가 어떻게 재현하는지를 보여준다. 한국의 여성미술은 1980년대부터 본격화되었다. 이 시기에 사회와 여성의 문제를 인식하고, 이를 작품으로 보여주는 일련의 작가들이 나타났다.
80년대 한국 페미니즘 미술은 여성과 여성미술이 타자로 인식되는 성차별 문화와 남성 중심의 화단에 대한 비판에서 비롯되었다. 이에 따라 작가는 최초의 페미니즘 전시로 기록되는 제2회 《시월모임-반에서 하나로》(1986)를 기획하고, 한국여성단체연합과 교류하며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이 겪는 현실을 작품으로 그려냈다.
그림패 둥지, 맥스테크 민주노조, 1988. 천에 아크릴릭, 108.5 × 154.3 cm.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김인순은 또한 여성미술연구회의 동료 구선회, 최경숙과 함께 그림패 '둥지'를 조직하여 <맥스테크 민주노조>(1988)를 공동 제작한다. 여성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 환경 개선을 위한 파업 현장을 걸개그림 형식으로 만든 것이다. 사회 참여를 중요시했던 민중미술에서 쓰였던 걸개그림 형식과 사회 현상을 재현한 <맥스테크 민주노조>는 사회를 반영하는 리얼리즘 미학과 현실주의 태도를 중요하게 여긴 작가의 지향점을 시각화한 것이다.
두 번째 섹션 ‘움켜쥐는 아름다움’은 역경에 맞서며 결실을 이룬 여성들의 굳건한 모습과 척박한 환경에서 생명을 피우는 자연의 근원적 여성성을 살핀다.
엄마의 대지, 1994. 캔버스에 아크릴릭, 119.7 × 180 cm.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이 섹션에는 1980년대 실천적이고 사회 현실을 고발하는 투쟁적인 작품과는 다른 작품을 선보인다. 모성을 지닌 강인한 여성의 모습에 더욱 주목한 작품들이다. 작가는 아이를 등에 업고 일을 하며 여성 해방을 위해 전진하는 여성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등장시킨다. 이번 전시에 출품한 <엄마의 대지>(1994) 가 가장 그러한 특징을 보여준다. <엄마의 대지>에 그려진 여성은 일하는 여성인 동시에 아이를 낳아 양육하는 어머니이다. 삭막한 도시의 삶 속에서 내 아이를 지키고 길러내야겠다는 사명감과 결의가 작품 속에서 느껴진다. 이렇듯 김인순은 땅과 어머니를 결합시켜 생명을 창조하는 강인한 여성들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함께 전시되고 있는 <뿌리> 시리즈도 같은 맥락이다. 척박한 대지는 여성들이 가진 생명력으로 회복되고, 땅 속에 깊이 박힌 뿌리는 어머니의 강인함처럼 깊게 박혀 살아가게 하는 힘을 보여준다.
태몽 09 - 5, 2009. 캔버스에 아크릴릭, 130 × 194 cm.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세 번째 섹션 ‘생명, 빛의 여정으로’는 이전의 투쟁적이고 강인함이 느껴지는 붉은 계열의 색조와는 다르게 다채로운 색감이 눈에 띈다. 여성의 우주 창조적 가치를 보여주는 <태몽> 시리즈는 김인순의 후반기 작품에 속한다. 작가는 이전 작품에 나타났던 척박했던 땅 위에 야생화를 흐드러지게 피우며 분위기를 반전시킨다. 원색을 화면에 전면적으로 드러낸 캔버스에는 자연의 에너지가 느껴진다. 작가는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하는 여성의 특수성과 우월성을 우리 문화 속에서 축적되어 온 민족적 정서와 결합시킨다.
이 밖에도 전시에는 김인순 작가의 대표작 20점뿐만 아니라 김인순의 인터뷰, 여성미술의 흐름을 보여주는 150여 점의 아카이브도 마련된다. 작품의 흐름과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소중한 자료들이다. 전시되어 있는 아카이브와 작품들이 말해주듯 작가는 작품 외에도 단체나 협회 활동 등의 실천적 태도도로 일관된 모습을 보여줬다. 그러한 작가의 방향성과 작가의 작품이 일치하고 있음을 이번 전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김인순은 여성의 시대적 가치를 탐색하여 여성 특유의 긍정 에너지와 생명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작가이다. 초반에는 민중미술 계열 여성 작가로 시작했다. 민중미술의 공식적 양식인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비판 없이 모방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이는 현실 모순에 대한 부정과 저항을 표방하고, 80년대 주류 화단으로 여겨졌던 모더니즘에 대한 반발과 대항을 하기 위한 의도적인 선택으로 보인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양식을 사용하여 효과적으로 동시대의 사실적 묘사를 용이하게 했다. 시대 상황을 예술로 반영하고자 한 민족미술협의회(1985)의 발기인으로 참여한 작가의 이력은 이를 뒷받침해 준다.
작가는 여성의 관점으로 ‘역사’ , ‘통일’ , ‘산하(山河)’ 등의 주제를 그리며 우리나라 여성미술의 방향성을 보여주었다. 후기 작품에서는 앞선 비판을 의식하기도 한 듯 우주, 자연, 민속적 요소로의 확장을 거쳐 한국의 자생적 여성미술을 민족적 조형언어로 구축한 모습도 보인다.
김인순은 한국 여성사를 아우르는 한국 여성미술의 맥락과 함께 작품 활동을 이어가는 작가이다. 작가는 작품 외에도 단체나 협회 활동과 같은 실천적 태도로 일관된 모습을 보여줬다. 그러한 작가의 방향성과 작가의 작품은 일치한다. 이번 전시는 관람자에게도 진정성을 느끼게 하며 큰 울림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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