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작가 열전 ⑭] 경계에서 피어난 비밀의 화음,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잊혀진 존재들을 주인공 삼아,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감각을 화폭에 담아내는 작가
잡초가 그린 그림, 2022, pigment and acrylic on Korean paper, 53x65cm
아무것도 아닌 듯한 존재 속에는 특별한 힘이 숨어 있다.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는 잡초는 그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지만, 돌연 어느 날 냉정한 무관심의 무게를 이겨내고 커다란 존재감을 뿜어낸다. 주인공이 될 수 없을 거라 여겨지던 존재가 주인공이 된 것이다.
현실에서 보잘것없이 소외된 존재들은 대부분 우리의 일상에서 철저히 무시된다. 그러나 이들의 존재감이 극대화되는 비밀스러운 공간이 있다. 주목받지 못한 존재들이 뿜어내는 몽환적인 감각이 만들어낸 그 장소는 바로 ‘현실과 비현실 사이의 경계’이다.
이곳에선 ‘주인공이 아닌 것’들이 주인공이 된다. 분명 소외당하던 하나의 ‘사물’이었을 뿐이었는데, 이곳에서 그들은 마치 기억이 왜곡된 듯 흐릿하고 신비스러운 배경 속에서 은은하게 빛을 발하고 있다. 꿈인 듯 현실인 듯 모호한 세상, 그리고 그 중심에 ‘보잘것없었던 존재’를 그려내는 류지민 작가를 만난다.
- 자기소개 부탁드린다.
안녕하세요. 저는 주로 자연 속에서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작은 존재들, 이를테면 잡초나 그림자처럼 주목받지 못하는 것들을 주로 그리는 회화 작가 류지민입니다. 일상에서 수집한 순간들과 그 순간들이 지닌 다양한 감각을 화면에 담아내며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탐구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작품 속에 자연 이미지가 담겨 있다. 특히 ‘잡초’가 자주 등장하는데, 작가에게 있어 자연과 잡초는 어떤 의미인가?
자연은 제가 작업을 통해 끊임없이 탐구하는 대상입니다. 특히 ‘잡초’는 어디에나 있으며 사람들이 흔히 무심코 지나치는 존재지만, 저에게는 그 작은 생명력이 특별하게 다가옵니다. 잡초는 우리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오랜 시간 방치되어 조용히 자라다가 갑자기 어느 날 나무만큼 커져 큰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저는 이렇게 누군가의 주변에 늘 존재하지만, 중심이 될 수 없다고 흔히들 생각하는 대상들을 작품의 주인공으로 삼아 그들의 이야기를 담아내고자 합니다.
잡초들의 입장 정리, 2021, acrylic on Korean paper, 72x90.9cm
- 전반적으로 작품들이 뿌옇고 희미하면서 몽환적이다. 괜스레 눈을 움츠러들게 만드는 것 같다. 또한 작품 속 이미지들이 마치 잠시 후면 사라질 존재인 것처럼 번져 보인다. 그러면서도 은은하게 다채로운 색상들이 마치 존재하지 않는 공간을 묘사한 듯해 보인다. 어떤 의도로 이러한 효과들을 사용한 것인지 궁금하다. 작가가 그려내고 싶은 세상은 무엇인가?
제 작품에서 표현되는 몽환적인 효과는 현실과 비현실이 만나는 지점을 시각적으로 구현하려는 시도입니다. 저의 그림에서는 수많은 얇은 붓 자국들이 쌓여 형상을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무너트리기도 하는데요, 화면 안에서 만나 어떠한 형상을 만들고 있는 색의 덩어리들이 언제든지 다시 흩어져 또 다른 곳에서 다른 형상으로 뭉쳐지는 장면을 상상하기도 해요. 이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형되는 ‘기억’의 형태와도 닮았죠.
대학원 초반에 이러한 표현 방식 연구를 시작했을 무렵에는 우리가 어떤 ‘오래된 기억’을 떠올릴 때, 그 위에 시간이 여러 겹 쌓이면서 실제의 기억이 희미해지는 과정과 닮아 있는 회화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지금의 작업 내용이 예전과 같지는 않지만, 그 당시의 표현 방식이 현재의 작업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고 생각해요. 결국 제가 그려내고자 하는 세상은 현실과 맞닿아 있지만 실재하지는 않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마치 꿈에서 막 깨어난 후 느껴지는 희미한 감각이 남아 있는 장면인 것 같습니다.
'웃어 넘기고 싶은 마음' 전시 전경, 유영공간. 류지민 작가 제공
Behind you, 2023, pigment and acrylic on Korean paper, 45x90cm
-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 즉 현실과 맞닿아 있지만 실재하지는 않는 장면 속에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작은 존재들을 담아내는 이유가 궁금하다. 이 둘은 서로 어떤 관계인가? 또한 이 둘이 만나면서 만들어내는 시너지가 어떤 것인지?
작품 속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작은 존재들, 예를 들어 잡초나 그림자는 어떻게 보면 지극히 일상적이고 보잘것없는 대상일 수도 있지만, 이러한 작은 것들이 조각조각 모여서 만든 장면은 특별한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재하지 않는 장면 속에 작은 존재들을 담아낸다기보다는, 작은 존재들을 한데 모으거나 다양한 방식으로 가공하여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있는 장면을 만드는 것에 가깝죠.
보통 오랜 시간 방치되어 온 장소(사람의 흔적이 대부분 삭제된)를 가득 메우고 있는 웃자란 식물들을 보면, 굉장히 낯설고 비현실적인 느낌이 듭니다. 분명 현실이지만 다른 세계로 이어지는 통로가 나올 것만 같아요. 그러한 느낌을 그림에서도 만들어내고 싶습니다.
Equalizing, 2022, pigment and acrylic on Korean paper, 80x160cm
2부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