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경자가 금의환향했다. 아무리 무심한 엄마라도 자기자 난 자식을 못 알아보는 엄마가 어디 있냐고「미인도」가 위작이라고 강변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홀연히 고국을 떠난 지 40년에 가까운 세월이었다. 살아서 고향땅 고흥을 밟으면 좋았으련만 멀리 이역 땅 미국에서 타계했다. 그래서 애석하게도 고향 땅을 밟은 것은 그의 분신과 같은 작품들이다. 아카이빙 자료 등 120여 점이 고향 땅을 밟았다. 11월 11일 작가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고흥군에서 개최한 《찬란한 전설 천경자 탄생100주년 기념특별전》이다.
천경자는 고흥읍 서문리 소록도가 내려다보이는 봉황산 밑자락에서 태어났다. 봉황산에서 처음 본 바다 빛깔에서 시각적 충격을 받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고흥의 옥빛 바다 빛은 천경자 채색화의 기원이 되었다. 여전히 그 옥빛 물 빛깔은 너무도 맑고 찬란하였다.
그녀는 늘 자신의 삶에서 벽에 부딪힐 때마다 홀연히 떠났다.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일본 여자미술학교 일본화 고등과로 유학을 갈 때에도 더 이상 조선에서는 그림 공부를 할 수 없어 택한 길이었다. 1970년대 당시로서는 흔치 않게 아프리카를 비롯한 세계여행을 떠날 때도 익숙한 환경을 버리고 짐을 쌌다. 6.25전쟁 시기 부산 국제구락부에서 전시한 <생태>를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몰렸다. 35마리의 뱀 중에서 가운데에 꽂꽂이 고개를 쳐든 뱀, 현실의 수많은 어려움에 맞서기 위해 뱀을 그렸다는 천경자. 그러고 보니 천경자는 늘 현실에 도전하는 용기 있는 화가였다.
고흥은 한 번의 좌절로 포기하지 않는 근성이 있는 곳이다. 나로호 발사로 때도 그랬다.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한 번씩 머물러 인공위성 발사 순간을 보았다. 여러 번의 도전 끝에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했다. 1970년대 반칙왕들의 공격에 쓰러지면서도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선 사람이 있다. 가면을 쓰고 숨겨온 흉기로 반칙을 가해 쓰러졌지만 멋지게 박치기 한 방으로 경기를 제압한 사람. 김일도 고흥 사람이다.
11월 11일, 2시 그녀가 태어난 지 100년이 되는 날에 멀리 타지에서 온 사람들. 고흥분청문화 박물관에서 열리는 《찬란한 전설 천경자 탄생100주년 기념특별전》의 총감독을 맡은 천경자의 차녀 수미타 김(김정희) 교수는 이 전시는 딸이 어머니를 그리는 사모곡이라 했다. 서울에서 부산 가는 거리 400킬로를 달려야 도착하는 고흥에서 이 전시를 기획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대부분의 작품들이 서울의 시립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어서 작품 하나하나를 모으는 데 큰 노력이 필요했다. 소장가들을 직접 찾아다니고 거절을 당하면서도 하나하나 작품을 모아 전시회를 열었다. 미공개 작품을 포함, 채색화 36점, 드로잉 34점, 유품 25점 등 모두 120여 점이다.
고흥의 추억을 직접 소환해 1973년에 그린 길례언니, 그녀는 천경자의 고흥 공립소학교의 3년 선배이다. 길례 언니의 화풍은 천경자 그림의 중심 화제가 되었다. 소록도의 간호원으로 떠난 천사 길례언니. 관람객들은 1982년 작 「길례언니 2」를 보며 전시장에 입장한다. 길례언니 작품 아래에는 천경자의 보통학교시절의 성적표가 전시되어 있다.
'청춘의 문'이라 명명한 전시 공간에서는 1955년 미협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정(精)」이 걸려있다.1950년대는 화가에게는 아주 어려운 시기였다. 광주에서 전남여고 교편을 잡을 당시, 사랑하는 여동생 옥희가 죽었다. 평생 사랑한 남자를 만났지만, 여자로서는 어려움이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찬란할 것만 같은 '청춘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더 큰 '고통의 문'이 열려 있었다. 나라는 전쟁의 휘마에 휩싸였다. 군용 헬리콥타를 타고 피란지 부산, 국제구락부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천경자는 「생태」를 발표한다. 이상한 여자가 뱀을 그렸다는 소문으로 전시장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그림 중앙 머리를 꽂꽂하게 든 뱀, 천경자 자신의 모습이다. 이 시절 '이럴 때 어찌 향기로운 백합을 그릴 것이냐'탄식하며 1950년대 좌절과 희망을 그렸다.
사글세로 들었던 주인집이 팔려 방을 쫓겨나게 된 판국에도 미협전에 출품할 그림을 끈질긴 나의 집념은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시든 해바라기밭에 검은 고양이를 안고 홀로 앉아 있는 계집아이를 울면서 그려 명제를 정이라고 지었다. 수일 후 구경갔다가 뜻 밖에도 대통령상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놀라 입이 다물어지지 않더니 마구 눈물이 쏟아졌다.
1950년대 후반, 화가 김환기의 추천으로 홍대 미대 동양화가 교수로 서울로 올라온다. 거처는 누하동, 현재 이상범 가옥의 바로 옆집이다. 1962년 인왕산 자락 옥인동 178-6번지로 거처를 옮겼다. 지금 옥인교회 바로 옆이다. 수성동계곡의 찬 물소리가 바위틈 사이로 공명을 일으키는 곳, 이곳에서 천경자는 3평 정도의 화실을 갖는다. '비가와도 반갑고 눈이 뿌려도 새롭고 즐거운 시절'이라고 회상한다. 이곳에서 천경자의 새로운 표현들이 선보인다. 이번에 선보이는 작품은 뮤지엄 SAN 소장의 「언젠가 그날」이다.
1960년대 말 홀연히 유럽과 미국으로 세계여행을 떠난다. 그는 미국과 프랑스를 시작으로 이탈리아, 하와이, 타히티, 사모아 등을 떠돌며 여행 스케치를 남겼다.1969년 늦은 가을에서 봄까지 '15구 올리비에 세르가'에 있던 호텔에 묵으며 '아카데미 고에즈'에 나가서 매일 그림을 그렸다. 당시 유화 다섯 점을 그렸는데 이번 전시회에 그중 가장 큰 그림인 「누드」가 출품되었다. '파리시절 유화 누드'는 작가가 드물게 남긴 유화 중 하나로, 전시회에 공개된 것은 1970년 이후 처음이다.
천경자는 그림뿐만 아니라 글에도 능했다. 특히 정릉천변에 국민주택을 사서 손수 벽돌을 쌓고 시멘트질을 해대던 박경리와는 둘도 없는 사이였다. 박경리는 1926년생 통영이고 천경자는 1924년생 고흥이다. 두 사람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 보면 참 비슷한 면이 많다. 고향도 지근거리이고 연배도 비슷하다. 문인과 화가로 운명에 맞서 시대를 개척해 온 두 명의 여류 예술가이다. 분야만 따를 뿐 우리나라의 역사의 굴곡에 함몰되면서도 굴하지 않은 인생여정이 경이롭다. 천식을 앓던 천경자에게 박경리는 김약국의 딸들의 인세를 떼어 용이 들어간 한약을 지어주었다. 전시 아카이브 중 박경리 작가의 친필 편지는 두 사람의 우정의 깊이를 전해준다.
「탱고가 흐르는 황혼」은 천경자의 원숙한 에너지가 응축된 1970년대 말의 대표작이다. 다른 사람의 삶의 비교를 거부한 화가, 독창성과 용기로 자신의 삶을 그림으로 완성한 화가이다.
삶에서의 굴곡은 천경자에게는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총감독을 맡은 수미타 김 교수는 어머니에게서 배울점 하나를 꼽으면 무엇이냐는 질문에 단 한 단어로 말했다. '용기' 어려운 시절 삶의 모든 것을 바쳐 자신의 화업을 하나씩 완성해 간 사람. 천경자, 찬란한 전설의 시작이다. 앞으로 할 일이 참 많다. 고흥에 천경자의 생가도 지어야 하고, 천경자의 이름을 딴 미술관이든 기념관도 마련해야 한다. 서울에는 그의 흔적이 전무하다. 그의 삶을 살필 수 잇는 비석이라도 천경자가 살았던 누하동, 옥인동에 세워지기를...
고흥군에서는 이미 첫 발을 움직였다. 이번 특별전을 앞두고 고흥군은 고흥읍 중심부 851m 도로에 '천경자예술길'이라는 명예도로명을 부여하고, 해당 일대를 '천경자예술거리'로 지정했다.
맘만 먹으면 다녀올만 하다. 전시도 보고 고흥의 맛집도 탐방해 보시기를 권한다.
<전시 개요>
찬란한 전설 , 천경자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전
고흥분청문화박물관(고흥군 두원면 분청문화박물관길 99)
2024년 11월11일~12월 31일(매주 월요일 휴관)
운영시간
9시~18시, 입장마감 17시
[천경자탄생 100주년 특집 ④] '찬란한 전설,천경자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전' 리뷰 < 리뷰 < 미술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