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에 들어선 케빈은 더욱 다루기 힘든 아이가 됩니다. 그러나 에바가 케빈에게 느끼는 섬뜩함을 다른 사람은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케빈은 실리아에게 짓궂게 대하지만, 실리아는 케빈을 제일 좋은 친구라 부릅니다. 프랭클린은 활쏘기를 좋아하는 케빈에게 활과 화살을 선물합니다. 이 선물이 앞으로 일어날 대재난의 단초가 될 줄은 상상도 못 합니다. 에바 역시 아들과의 관계에서 노력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아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려고 애쓰고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합니다. 그러나 케빈에게서 돌아오는 것은 냉소와 독설뿐입니다.
실리아가 기르던 기니피그가 배수구에서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에바는 케빈을 의심합니다. 기니피그의 사체를 처리하려고 꺼낸 염산 때문에 실리아는 한쪽 눈을 실명합니다. 이번에도 에바는 케빈이 에바를 해쳤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케빈이 그런 짓을 저질렀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에바의 의심일 뿐입니다. 결국 에바와 프랭클린의 부부 관계는 케빈 때문에 금이 갑니다. 두 사람은 각자 딸과 아들을 데리고 이혼하기로 협의합니다. 그리고 대재앙의 날이 닥칩니다. 케빈은 학교 문을 걸어 잠그고 학생들에게 활을 쏘아 살해합니다. 그러기 전에 아버지와 여동생을 먼저 죽입니다. 에바는 한꺼번에 가족과 명예, 사회관계, 재산 등 모든 것을 잃습니다.
<유튜브 출처: 팝 콘트리>
영화는 현재와 과거를 교차 편집하며 에바와 케빈의 관계를 조망합니다. 많은 여성이 에바처럼 모성 신화에 시달립니다. 그러나 완벽한 자식이 없듯이, 완벽한 어머니 역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자식이 어머니에게 배우며 성장하듯, 어머니 역시 자식을 기르며 완전히 다른 존재로 거듭납니다. 케빈이란 존재는 불완전한 모성을 단죄하는 듯한 캐릭터입니다. 동시에 끝없는 애정 결핍을 호소하는 자식을 상징합니다.
대량 살인마 자식을 둔 어머니는 악마와도 같습니다. 영화를 지배하는 색감은 붉은빛입니다. 사람들은 에바의 집에 붉은 페인트와 물감을 뿌립니다. 에바는 끝없이 붉은빛을 지워댑니다. 하지만 그녀의 손톱에 파고든 물감처럼 핏빛 얼룩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케빈을 갖기 전, 토마토 축제에서 쓰였던 붉은 색감이 건강한 생명력을 상징했다면, 이제 붉은 빛은 그녀의 마음에서 떠날 수 없는 원죄와도 같습니다. 아무리 지워도 붉은빛은 그녀의 머리칼과 손톱 밑, 얼굴에 남아있습니다.
그녀가 지날 때마다 사람들은 수군거립니다. 어떤 여성은 길에서 마주친 그녀의 얼굴을 때립니다. 케빈 때문에 자식을 잃은 어머니가 분명합니다. 슈퍼마켓에서 케빈이 죽인 학생의 어머니와 마주친 에바는 카트만을 남긴 채 몸을 숨깁니다. 하필 몸을 숨긴 그녀의 등 뒤로 붉은 토마토 캔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습니다. 계산대에 선 에바는 달걀 바구니에 든 달걀이 모두 깨져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에바는 계산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허겁지겁 달걀을 쇼핑백에 밀어 넣습니다. 에바가 요리한 오믈렛에는 달걀 껍데기가 들어 있습니다. 그녀는 입에 넣은 오믈렛에서 끝없이 달걀 껍데기를 꺼냅니다. 면회에서 만난 케빈이 물어뜯은 손톱을 입에서 꺼내는 장면이 겹쳐 보입니다. 목구멍으로 넘기지 못한 말처럼 단단한 그 무엇을 두 사람은 입에서 게워냅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녀를 처벌하는 존재가 같은 어머니라는 점입니다. 물론 그들은 에바의 자식으로부터 자식을 잃은 희생자입니다. 그들의 눈에 에바는 자식을 대량 살인마로 길러낸 악랄한 어머니입니다. 그러나 케빈에게서 자식을 잃지 않은 어머니도 그녀를 악마 취급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엄마’라는 이름으로 완벽한 모성을 구현하지 못한 에바를 단죄합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남자들은 그들에 비해 에바에게 호의적입니다. 에바의 변호사들은 남자이며, 거리에서 폭행당하는 에바를 돕는 이도 남자입니다.
길에서 만난 케빈의 동창은 휠체어에 앉아 그녀에게 밝게 인사합니다. 그는 케빈에게 화살을 맞은 희생자입니다. 그는 의사에게서 걸을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면서 그녀에게 잘 지내라고 말을 건넵니다. 이들 남성은 ‘어머니’가 아니기 때문에 에바에게 동정적일 수 있습니다. 모성이라는 신화로 여성을 감시하고 도덕을 강제하는 존재는 같은 여성입니다. 그들은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연대하는 존재이지만, 한편으로는 서로의 모성을 감시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에는 자신이 낳은 자식이 케빈과 같은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존재합니다.
케빈이 타고난 사이코패스인가, 어머니와의 애착 부족에 의해 만들어진 괴물이냐는 논쟁은 이 영화에서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극 중 세면대의 물에 얼굴을 넣는 에바의 얼굴은 케빈의 얼굴로 변화합니다. 케빈과 데이트하던 에바가 뚱뚱한 사람들을 욕하자 케빈은 악담한다며 그녀를 놀립니다. 너 역시 만만치 않다고 에바가 받아치자 케빈은 “누굴 닮았겠어?”라고 대답합니다. 그들은 유전자 일부를 공유한 운명공동체이자 소통의 부재로 괴로워하는 영혼의 한 쌍입니다.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말대로 어머니 노릇은 “우리에게 가까운, 그리고 우리 자신의 낯섦과의 가장 강렬한 형태의 접촉”입니다. 세상과의 절연 속에 아이를 양육하는 것은 모성의 피폐와 손상을 초래합니다. 세상과의 절연이란 ‘독박 육아’나 경력 단절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자식이란 타인과의 접촉, 그 낯섦을 이해해주지 않고 모성 이데올로기만을 강요하는 세계와의 조우를 뜻합니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은 누군가에게는 세계관의 확장을 뜻하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좁은 세상으로 후퇴하는 퇴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영화는 살육극이라는 형식을 빌려, 그 퇴로 끝에 선 어머니와 아들에게 벌어진 비극에 대한 비유로 읽힐 수도 있습니다.
성인 교도소로의 이감을 앞둔 케빈에게 에바는 묻습니다. 대체 왜 그런 일을 벌였냐고. 케빈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불안하게 흔들립니다. “처음에는 그 이유를 알았다고 믿었지만, 이제는 모르겠어.” 처음으로 케빈이 자신의 감정에 대해 털어놓는 순간이자 처음으로 아들과 어머니가 마음을 터놓는 순간입니다. 에바는 케빈을 끌어안고 케빈 역시 그녀를 거부하지 않습니다. 이제 에바는 케빈을 진심으로 받아들입니다. 비록 용서받지 못할 범죄자이지만, 케빈은 에바의 아들입니다. 그녀는 ‘도덕적 의무’가 아닌 진정한 애정을 느끼며 아들을 품습니다. 케빈은 평생 그녀가 품어야 할 사랑이자 극복할 수 없는 원죄입니다.
아름답고도 섬뜩한 미장센으로 가득한 이 영화는 극도로 함축된 대사만으로 영화를 풀어갑니다. 영화는 2011년 제64회 칸 영화제 경쟁 부분에 초청받았습니다. 틸다 스윈튼은 눈빛만으로도 어머니의 복잡한 심경을 연기합니다. 에즈라 밀러의 연기력 역시 그녀에 뒤지지 않습니다. 영화에 쓰인 경쾌하고도 애수에 찬 컨트리 음악은 영화의 내용과 불협화음을 빚어내며 묘한 역설을 자아냅니다. 틸다 스윈턴이 분한 에바는 ‘악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 땅의 모든 어머니를 대변합니다. 이 영화는 한 어머니와 아들의 잔혹하고도 슬픈, 절망으로 가득한 성장기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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