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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일리아트 Dec 10. 2024

[저항하는 예술 ①] - 풀이여, 온 몸을 던지라

요즘 사람들이 하는 말이 '간밤에 잘 잤느냐'는 것이다. 시국이 어수선하여 TV를 보느라 잠을 설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대표 축구 선수들이 선전하는 시합을 보느라 잠을 못잤다면 억울하지도 않다. 어이없는 광경을 목격하는 뉴스를 보기 때문에 잠을 못이뤄, 일어나면 한숨부터 나온다. 다들 만나면 부아가 치민다고 한다. 너무도 이상하게 돌아가는 정국이다.


민주화운동이 절정이던 1987년에도 그랬다. 10·26이 있던 1979년 즈음에는 무서워서 잠을 못잤다. 1980년 광주 민주항쟁 때 돌아가는 상황을 몰랐던 국민들을 제외하고 역사의 현장에 있었던 광주시민들도 뜬눈으로 밤을 새웠을 것이다. 지금 국민들이 밤잠을 설치는 이유는 돌아가는 상황이 너무도 어이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눈물을 흘린다. 외국에 있는 자녀에게 전화를 걸어 이런 한심한 나라에 돌아오지 말라 했다고 한다. 추운날 아스팔트 맨 바닥에 앉아서 구호를 외치는 우리들이 너무도 애처롭다.


문득 저항의 시기에 예술로 시대와 맞섰던 문인, 화가들이 생각이 났다. 그들은 시대에 어떻게 저항했을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그들의 작품을 소환해 보기로 했다. 예술은 예술 자체로서도 가치가 있겠지만, 시대와 동떨어져 존재할 수 없기에 작품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펼쳤던 예술가들이 수도 없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들은 시대의 선각자들이었다. 예술은 시대에 어떻게 맞섰을까? 시와 그림, 민화 등 비교적 최근에 상영한 영화도 다뤄보기로 했다. 오늘은 첫 순서로 '시'가 시대의 정서를 대변하지 못한다며 '시여 침을 뱉어라!'라고 서슬 퍼렇게 일갈했던 김수영 시인의 「풀」을 만나 본다.(편집자 주)



풀이여, 온 몸을 던지라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김수영 시인.


 풀이여, 온 몸을 던지라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힘없이 쓰러지는 풀. 이처럼 무기력한 대상이 있을까. 심지어 이 풀은 뚜렷한 목소리로 발화하는 주체도 아니다. 그저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처럼 ‘울고 눕기만 한다'. 김수영은 이런 수동적이기만 하고, 한없이 나약한 미물인 ‘풀’을 통해 무슨 말을 하려 했나. 그리고 이 질문은 어쩌면 한없이 나약하기만 한 민중들의 결집이, 목소리가, 세상에 어떤 유의미한 균열을 일으킬 수 있는가 하는 질문과도 연결될 것이다. 풀은 곧 민중으로 지칭되어 왔으므로.


이런 질문을 품고 다시 시를 들여다 보자. 2연에서도 “풀은 눕는다” . 그런데 1연에서는 드러나지 않은 풀의 모습이 보인다. 이 풀은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 바람보다 더 빨리 울고 /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앞서 수동적으로만 봤던 풀의 행위가 사실은 능동적인 행위였다. 그러니까 풀의 “눕고, 울었다”의 행위는 바람에 의해 행해진 것이 아닌, 능동적인 선택이였다. 그런데 이런 의문이 든다. 풀이 어떻게 바람보다 먼저 누울 수 있나? 이것은 그저 바람을 이기지 못한 풀의 변명이 아닌가?


풀의 움직임은 3연에서는 더 적극적이다. 이제 풀은 바람 없이도 눕는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그리고 더욱 몸을 굽혀 “발목까지 /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 없이도 눕는다니, 이것이 도대체 가능한 일인가. 풀은 스스로는 움직일 수 없다. 좌우로 움직이는 단순한 움직임도 외부적인 동력이 필요하다. 1연에서 풀의 동력원은 ‘동풍’이다. 이 동풍은 민중의 삶을 억압하는 모든 외부적 시도를 상징한다. 이 동풍은 2연, 3연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날이 흐리다”라는 서술만이 등장할 뿐이다. 그렇다면 2연, 3연에서 풀을 움직일 수 있게 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동풍으로 인해 촉발된 ‘충격’이다. 다시 말해, 동풍으로 받은 충격이 잉태한 ‘충격’이다. 이들은 강한 “비를 몰아오는 동풍”으로 인해 공통의 경험을 했다. 마치 김수영 시인의 시대에 벌어진 3·15 부정선거가 시민들에게 남긴 상흔이 4·19혁명을 촉발했던 것처럼. 처음엔 풀들을 울고, 쓰러지게 했던 동풍은 오히려 풀에 강한 ‘충격’을 주며 풀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그런데 이것만으론 큰 움직임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풀의 몸짓이 유의미해지려면 이들의 움직임이 동풍이 몰고 온 바람에 육박하거나, 동풍보다 더 큰 움직임이 되어야 한다.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앞서 이야기한 풀의 ‘연약한’ 특성으로 가능해진다. 조금의 충격에도 몸을 움직여야 하는 풀이기에 풀은 서로에게 포개지며 몸을 불린다.


잠시 상상해 보자. 강한 동풍의 여파로 풀이 동요하기 시작한다. 풀은 하나, 둘씩 작지만, 몸을 움직인다. 그리고 그 움직임은 옆의 풀을 움직인다. 자신들의 옆에 함께 행동하는 수많은 행렬이 있음을 발견한 풀은 이제 앞뒤의 풀을 깨운다. 깨어난 풀은 또 옆의 풀을 깨우고, 그 풀은 또 옆의 풀을 깨우고. 이런 일련의 과정은 반복되며 더 큰 움직임이 된다. 마침내 이들은 연대의 물결을 통해 동풍에 대항할 만할 ‘바람’을 스스로 만든다.


바람은 다시 풀로 간다. 바람은 풀의 움직임을 더 강하게 하고, 더 큰 연대를 가능하게 한다. 3연에서 시인이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라고, 서술한 이유가 실은 풀이 바람을 모으고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풀은 이제 “웃는다". 이런 풀의 거센 움직임을 목격한 ‘동풍’은 당황한다. 자신이 쥐락펴락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미물들이 스스로 바람을 만들고 있었으므로. 물론 이를 잠재워 보고자 더 큰 동풍이 불어올 수도 있겠다. 하지만 더 큰 동풍은 풀엔 더 큰 충격을 주고 오히려 이들의 움직임을 더 크게 할 뿐이다.


김수영은 자신의 시를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시”라고 썼다. 여기서의 “온몸”은 연대를 통해 하나가 된 풀일 것이다. 그리고 이 풀이 “밀고 나가” 마침내 도달할 곳은 거세게 날뛰고 있는 동풍의 “온몸”일 것이다. ‘지금, 여기’ 대한민국에서 불어오는 동풍은 무엇인가. 21세기의 언어로는 담기지 않는 동풍으로 풀이여, 온 몸을 던지라.



출처 : 데일리아트 Daily Art(https://www.d-ar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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