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장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한 세기가 훌쩍 지난 예술의 숨결이 살아 숨 쉰다. 눈앞에 펼쳐진 작품들은 단순한 그림과 조각을 넘어, 혼돈의 시대를 살아낸 천재 예술가들의 고뇌와 꿈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전시를 마주하는 관객들은 20세기 초 오스트리아 빈의 감각적인 예술 세계로 바로 들어선다.
이 전시는 단순히 미술 작품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클림트’와 ‘실레’의 대표작은 물론, 표현주의의 선구자들이 남긴 흔적까지 총 191점의 걸작을 통해 120년 전 빈 예술의 전성기를 한눈에 담을 수 있다. 특히 ‘실레’의 대표작 “꽈리 열매가 있는 자화상”과 같은 유화는 물론이고, 그의 내면을 담은 드로잉 작품들도 감상할 수 있다. 그의 독창적 선(線)의 미학을 깊이 느낄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다.
이번 전시를 준비한 국립중앙박물관의 큐레이션과 전시 디자인은 세계적 수준이었다. 입구에서 시작되는 빈 분리파의 전시 포스터와 마지막에 상영되는 ‘클림트’와 ‘실레’의 우정을 다룬 영상까지, 전시는 하나의 짜임새 있는 이야기처럼 이어진다. 벽화 “베토벤 프리즈”를 대형 화면으로 만날 수 있는 공간은 빈의 클래식 음악까지 감각적으로 전한다. 회화뿐 아니라 공예품, 가구 등 다양한 예술적 시도가 조화를 이루며 당시 빈의 창조적 분위기를 재현한 점 또한 돋보인다.
이 전시가 특별한 이유는 단순히 작품의 수준과 양에만 있지 않다. 관람객의 경험을 세심하게 고려한 배려가 감동을 더한다. 30분 단위로 관람 인원을 제한하고, 모바일 전시 안내 홈페이지를 통해 작품 설명과 글자를 원하는 크기로 볼 수 있게 한 시스템은 모두가 쾌적하게 전시를 즐길 수 있도록 돕는다. 이러한 세심함은 전시를 준비한 학예사들과 관계자들의 노력이 담긴 결과다. 대규모 전시에서 흔히 겪는 혼잡함에 대한 우려도 이번에는 크게 완화된 모습이었다. 입구에서는 다소 붐볐지만, 각자의 속도로 관람이 진행되면서 후반부로 갈수록 여유롭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다. 많은 관람객들이 “사람이 많았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쾌적하게 감상할 수 있었다”고 만족감을 표현했다. 전시 디자인과 큐레이션 능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덕분에, 단순히 작품을 보는 것을 넘어 그 시대와 공간에 몰입하는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 전시였다
이 전시는 단순한 미술 전시를 넘어서, 한 시대를 바꾼 혁신가들의 고민과 열정을 체험하고, 그들이 만들어낸 아름다움의 본질을 되묻는 자리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 보기 힘든 전시라는 점에서, 관람객은 단순히 미술을 본다는 것을 넘어 창조적 정신과 미학적 통찰을 되새길 수 있다. “지금 보지 않으면 다시는 볼 수 없다”, 이 전시의 의미를 가장 잘 설명하는 문구일 것이다.
1900년대 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빈’은 진부하고 보수적인 도시였다. 그러나 이 고루한 도시를 흔들어 깨운 이들이 있었다. ‘빈 분리파’라는 이름으로 뭉친 예술가들은 “예술의 자유를 되찾자”는 구호 아래 새로운 예술의 길을 열었다. 그 중심에 ‘구스타프 클림트’가 있었다. 클림트는 뛰어난 재능과 대중적인 인기를 바탕으로 기존의 전통을 과감히 거부하며, 새로운 시도를 이어갔다.
전시장에서 만날 수 있는 ‘클림트’의 초기작들은 그가 예술가로서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비록 금박을 사용한 대형 작품은 없지만, 작은 초상화들은 클림트가 인상주의에 영향을 받아 구도와 색감을 실험한 흔적을 담고 있다. 그의 작품에서 묻어나는 인간적인 고뇌와 따뜻한 시선은 여전히 관객들의 마음을 울린다.
‘클림트’의 불씨는 ‘에곤 실레’와 ‘오스카 코코슈카’로 이어졌다. ‘실레’는 내면의 고독과 감정을 강렬하게 표현한 화가였다. 그의 작품은 보는 이로 하여금 어떤 불편함과 동시에 묘한 매력을 느끼게 한다.
‘코코슈카’는 또 다른 방식으로 예술적 독창성을 발휘했다. 그는 표현주의의 선구자로, 강렬한 붓질과 대담한 색채를 통해 작품 속 인물의 감정을 드러냈다. 그의 사랑과 광기는 작품의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다. ‘코코슈카’의 작품을 마주할 때 관객은 그의 치열했던 삶과 마주하게 된다.
‘빈 분리파’는 단순히 예술의 혁신을 넘어서, 일상의 디자인까지 아우르는 총체예술을 추구했다. 관람객들은 단순히 작품을 감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전시장 자체를 사진에 담으며 공간의 아름다움을 만끽했다. 오스트리아 빈 공방의 공예품이 전시된 3부 공간에 들어서자 작은 탄성을 내지르는 관람객들이 눈에 띄었다. 관람객들은 단순히 회화뿐만 아니라 공예품, 가구 등을 두루 소개한 구성을 두고 “마치 1900년대 오스트리아 빈으로 잠깐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콜로만 모저’와 ‘요제프 호프만’은 생활예술, 총체예술을 구현하기 위해 ‘빈 디자인 공방’을 설립했다. 이들은 컵이나 가구 같은 일상용품조차 예술로 승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이 남긴 작품들은 오늘날 디자인의 일상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전시 후반부로 접어드는 4부에서부터가 하이라이트다. 클림트 세대에 이어 본격적으로 등장한 신세대 후배 화가, 표현주의 선구자 ‘리하르트 레스트를’과 ‘오스카 코코슈카’의 주요 작품들이 관람객을 맞는다. 내면의 격정을 캔버스에 폭발시킨 듯한 자유분방하고 에너지 넘치는 그림이 즐비하다.
‘코코슈카’의 포스터는 100년이 넘게 흐른 지금 봐도 충격적일 정도다.
이어서 ‘에곤 실레’를 조명하는 마지막 5부는 그야말로 압도적이다. ‘에곤 실레’, 28년의 짧은 삶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름은 미술사에서 결코 잊히지 않을 만큼 강렬하게 남아 있다. 그는 삶의 혼돈과 욕망, 불안정한 정체성이라는 주제를 누구보다도 솔직하게 표현하며 20세기 초 오스트리아 표현주의를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 잡았다.
‘실레’는 어린 시절부터 특별한 재능을 보였다. 그의 내면은 복잡한 감정들로 얽혀 있었고, 이는 그가 성장하면서 더 뚜렷해졌다. 아버지의 죽음, 집안의 몰락, 어머니와의 관계 등 여러 요인이 그의 예민한 감성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열여섯 살의 나이에 빈 미술 아카데미에 최연소로 입학할 만큼 재능이 뛰어났던 그는 전통적인 교육 방식에 금방 흥미를 잃었다. 그런 그에게 ‘클림트’와의 만남은 전환점이었다. ‘클림트’는 그의 천재성을 한눈에 알아보고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클림트’의 독창적인 작품들은 실레에게 단순한 영감 이상의 역할을 했고, ‘실레’는 스승을 넘어 자신만의 스타일을 시작했다.
‘실레’의 작품은 강렬한 선과 독특한 구도를 특징으로 한다. 그의 드로잉은 특히 주목받는데, ‘실레’는 드로잉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감정을 투영하며, 이를 통해 화폭 위에 생생한 내면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다른 작가들의 드로잉이 유화의 밑그림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은 반면, ‘실레’의 드로잉은 그 자체로 완성된 예술로 평가받는다. 그의 그림에는 인간 존재의 불안정함과 갈망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때로는 불편함과 충격을 주기도 하지만, 그 솔직함이 ‘실레’ 작품의 매력이다.
20대 초반, ‘실레’는 사춘기를 막 벗어난 청년이면서도 성숙한 예술가였다. 하지만 그의 삶은 드라마틱하고 짧았다. 스페인 독감이 유럽을 휩쓴 1918년, 임신 중이던 아내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실레’ 역시 3일 뒤 그녀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자화상과 나체화는 단순히 관객을 놀라게 하기 위한 시도가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고자 하는 진지한 예술적 접근이었다. 특히 그의 작품은 불편함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그 불편함은 종종 관객으로 하여금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거나, 외면해왔던 진실을 마주하게 하는 강렬한 힘으로 작용한다.
짧지만 강렬했던 그의 생애는 청춘의 불안정함과 폭발적인 에너지를 응축한 산물로 평가받는다.
‘실레’의 작품은 여전히 현대인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의 작업은 우리가 지나온, 혹은 지금 겪고 있는 혼란스러운 시기를 생생히 떠올리게 한다. 그 안에 담긴 날것의 에너지와 강렬한 표현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감각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백 년의 시간과 오스트리아와 한국이라는 시공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가 ‘실레’에게 열광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의 작품은 청춘의 초상으로서,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도 변함없는 감동과 공감을 선사한다.
전시를 둘러보며 관객은 20세기 초 빈 예술가들이 겪었던 고뇌와 열정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이들은 새로운 예술을 위해 과거와 단절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 도전은 오늘날의 예술과 디자인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전시장의 끝에 다다르면, 자연스레 이렇게 묻게 된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과연 어떤 예술을 남길 수 있을까?”
‘비엔나 1900’의 예술가들이 남긴 메시지는 단순하다. “비극 속에서도 꿈을 꿀 것. 그리고 그 꿈을 예술로 피워낼 것”. 전시를 떠나며, 한 세기를 넘어 울려 퍼지는 그들의 목소리가 마음속 깊이 새겨진다.
피렌체의 르네상스, 암스테르담의 네덜란드 황금시대, 그리고 1900년대 비엔나는 같은 곳이다. ‘클림트’와 ‘실레’는 그곳에서 예술의 경계를 넘어섰고, 이번 전시는 그 숨결을 서울로 옮겨놓았다. 이 전시는 내년 3월 3일까지 열린다. 지금 아니면 다시는 볼 수 없는 이번 전시를 놓치지 않길 바란다
비엔나 1900, 예술의 황금기를 만나다 < 리뷰 < 미술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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