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3일 믿을 수 없는 또한 믿고 싶지 않은 현 대통령의 계엄령으로 나라가 혼란에 빠졌다. 많은 국민들이 추운 날씨에 거리에서 대통령 퇴진을 외치고 있다. 예술은 현실과 관계를 맺고 있다. 1980년대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찾고자 했던 당시의 외침은 민중미술 그림 속에서 또한 표현되었다. 민중미술운동에서 나타났던 1980년대 후반기 몇몇의 걸개그림을 살펴보며 그들이 찾았던 민주화의 물결을 다시 상기시켜보고자 한다.
민중미술에서의 걸개그림은 대중 집회나 시위 현장에 걸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형식은 불교의 '괘불화'에서 빌려온 것이다. 우리나라의 걸개그림, 벽화그림은 멕시코 벽화운동과 유사한 맥락으로 대중들로 하여금 혁명의 이념을 전파하는 예술 운동이 진행되었다. 걸개그림은 주로 큰 크기에 강렬한 색채로 선동성이 짙게 표현된다. 노동자, 여성, 민족, 민중, 해방 등의 주제 아래 이전과 다른 사회로서의 인식을 필요로 했다. 우리나라의 민중미술운동은 광주의 '광자협', 서울의 '현실과 발언'과 같은 소그룹으로 시작하여 '민미협'과 같이 조직적인 큰 규모로 미술운동이 전개되었다. 초기 걸개그림은 1983년 창립된 현실참여를 내세운 미술동인 '두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 각 지역마다 미술패가 등장하고 현장성을 중시하는 걸개그림이 시위 현장에 본격적으로 걸리기 시작했다. 전시장을 벗어난 현장에서의 작품은 당대 미술의 실천적 방식이었다.
<한열이를 살려내라!>는 최병수 외 4인이 공동 제작한 걸개그림으로 1989년 6월 9일 이한열 열사 3주기 추모집회에서 설치되었다. 이한열은 1987년 6월 10일에 있을 집회의 전날 군사정권에 시위하던 도중 최루탄을 맞아 사망했다. 그림 속의 모습은 피를 흘리며 부축 당하는 이한열의 모습이다. 로이터 사진기자였던 정태원이 찍은 사진을 그림으로 제작한 것이다. 작품을 만든 최병수는 <이한열 영정>(1987)을 제작하기도 했으며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 열사 장례식에 영정과 걸개그림을 여러 차례 담당했다.
당시 여성미술가로서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민중미술계에서 활동했던 김인순의 작품에서도 걸개그림들을 살펴볼 수 있다. 김인순은 '시월모임', '여성미술분과', '여성미술연구회'를 만들어 활동했다. 김인순과 그가 속했던 '그림패 둥지'가 제작한 <최루탄거부 민주시민 대동제 걸개>(1987) 는 여성미술연구회가 주최한 민주시민대동제에서 시민들과 함께 채색한 걸개그림이다. 그림 한 가운데는 춤을 추며 문구가 써진 파란색 깃발을 들고 있는 여성이 있고 그 옆으로 “한열이를 살려내라”, “군사독재 지원하는 미국반대”가 써진 플랭카드를 들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들이 있다. 이 작품은 여성작가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첫 번째 걸개그림으로 평가된다.
김인순과 그림패 둥지가 그린 또 다른 작품인〈그린힐 화재에서 스물 두 명의 딸들이 죽다>(1988)는 억울하게 죽은 노동자들의 실제 사건을 그린 것이다. 안양에 있던 그린힐 봉제공장의 기숙사에서 자고 있던 22명의 여성이 화재로 인해 모두 사망한 사건으로 이들은 제품 도난의 방지라는 이유로 자물쇠로 공장 입구와 비상구를 잠가 탈출할 수 없었다. 걸개그림으로 그려진 이 작품은 1988년 제2회 《여성과 현실》전에 전시된 후, 같은 해 세창 물산 파업장에 전시되었다.
민중미술 운동 소집단 단체로 '가는 패', '엉겅퀴'가 있었다. '가는 패'는 1987년에 차일환, 남규선 등이 결성한 단체로 걸개그림을 비롯하여 판화, 벽보 등을 제작했다. 가는 패의 대표작인 <노동자>(1988) 는 연세대학교에서 열린 첫 전국노동자 대회에 걸린 걸개그림이다. 전국노동자 대회는 전태일 열사의 정신계승 및 노동법 개정을 위해 열렸으며 그림은 '전노협'의 제안으로 제작되었다. 빨간색의 띠를 두른 한 노동자가 한 손을 치켜세우고 외치는 모습이며 그림 아래에는 '노동악법 철폐하라'라는 문구가 적힌 플랭카드를 볼 수 있다. 가는 패는 이외의 활동으로 상계동 철거반대투쟁 《‘가는패’ 열림전》, 명동성당 천막촌 전시, 농촌마을 벽화 창작 등 다양한 활동을 벌였다. 또한, 전시장에 한정된 소통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이동전을 기획하기도 했다.
'엉겅퀴'는 1988년 결성된 단체로 정지영, 정태원, 조혜란, 최성희 등이 주요 활동을 벌였다. 엉겅퀴가 제작한 <7,8월 노동자대투쟁도>는 1988년에 있었던 지하철 노조항쟁을 주제로 한 것이다. 그림 속에는 지게차와 함께 파란색의 옷을 입은 남성 노동자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이들의 걸개그림은 노동 단체들의 집회의 현장에 걸려 사용되었다. 엉겅퀴는 1990년 '민미협'의 산하기관인 '노동미술위원회'에 '둥지'와 결합하며 해체되었다.
걸개그림은 민중미술에 있어서 대표적인 소재로 선택되어 그려졌다. 민주화운동, 노동자들의 권리 투쟁 등 시위와 집회를 위해 여러 작가나 단체가 협업하여 제작되었다. 또한, 작가가 아닌 일반 사람들까지 함께 대규모의 걸개그림을 작업하며 연대했다. 걸개그림 속에는 당시 1980년대 뜨거웠던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비롯해 삶의 현장에서의 권리 투쟁이 담겨져 있다. 우리는 이러한 남겨진 작품들을 통해 그들을 기억할 수 있다.
[저항하는 예술 ④] 걸개그림을 통해 보는 80년대 민중미술 < 미술일반 < 미술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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