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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일리아트 Jul 19. 2024

스페인 프라도 미술관③

창간기획, 해외미술관을 가다 2)

'오랜 시간을 담은 한정식과 같은 성소', 스페인 프라도 미술관③ (최영식, 미술에디터 취재)


②편에서 메타적 사고를 한 근대인으로서 ‘벨라스케스’를 바라봤다.

프라도 미술관의 마지막 여정을 스페인 대표화가이자 현대 미술을 가능하게 한 바로 그 천재, 고야를 만나보자.


벨라스케스의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그를 ‘바로크’ 화가로 부르며, ‘바로크’의 의미를 살짝 들춰 보았다. 그렇다면 당연히 고야를 만나기 전에 ‘낭만주의 화가 고야’라는 범주화 속에서 ‘낭만주의’에 대해서  알아볼 필요가 있겠다.


회화의 역사에서 현대적 미술 개념 성립은 낭만주의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긴 미술의 역사를 전부 논할 수는 없으니, 다음 두 그림으로 낭만주의가 왜 현대 미술의 출발이 되었는지를 간략히 살펴보자.

자크 루이 다비드, <호라티우스형제의 맹세>, 1786, 루브르박물관 소장


들라크루아, <사루다나팔루스의 죽음>,1828, 루브르박물관 소장


두 그림 모두 루브르박물관에 소장된 그림이다. 다비드의 그림을 보자. 안정적인 구도와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정확한 내용 전달, 국가를 위한 정의의 전쟁이라는 확실한 목적이 그림 전체를 덮고 있다. 같은 박물관에 소장된 그림이지만, 들라크루아의 그림은 뭔가 퇴폐적인 내용으로 그림 전체가 한 번에 파악되지 않는 여러 색이 뒤섞인 혼란스러운 구도로 그려져 있다.


다비드의 그림이 그리스 로마의 고전을 모범적으로 그려낸 반면, 들라크루아는 화가의 상상력에 의한 감정을 그대로 표현한 그림이다.


낭만주의를 표현한 Romanticism이 18세기 말에 유행했던 중세의 모험담(아서왕 이야기)을 가리키는 ‘로망’에서 유래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낭만주의는 과학과 합리주의에 대비해서 자신의 비합리성을 내세움으로써, 과학과 결별하고 과학보다 더 고차원적인 영역인 인간의 감성 영역을  화폭에 담아낸 것이다.


자유로운 창조가 가능한 인간을 캔버스에 그려냄으로써, 낭만주의는 위대한 인간으로서 천재의 발견과 인간의 창의성이라는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와 미술사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출발점을 마련해 주었다.(이우환과 김환기님도 낭만주의에 고마워하시리라...)


그리고 그 출발의 정중앙에 고야가 서 있다.


사실 고야는 낭만주의라는 한가지 사조로 규정하기에는 그 스펙트럼이 이베리아 반도만큼 넓다.


그 배경에는 그가 살았던 시대의 급변화가 있다. 그가 살았던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초반은 옛 왕정 체제가 끝날 즈음이며 프랑스 혁명으로 인한 새로운 사상이 만연한 근대의 시작이었다. 


로코코식의 화려한 회화에서 출발한 고야의 작품은 신고전주의를 거쳐 인간적인 낭만주의로 꽃 피운다. 특히 인간을 중심에 두었다는 점에서 감성적 인식, 희로애락의 표현은 앞서 말한 것처럼 20세기 표현주의와 초현실주의적 사조까지 예고하고 있다.


프라도 미술관에는 그의 회화 작품 150여점과 500점이 넘는 소묘가 있다.


고야 한 명의 작가를 감상하기에도 일주일이 모자랄 것이다. 본 기사에는 그의 대표작 두 점을 통해서 고야가 그토록 천착하며 놓지 못했던 사람에 대한 관심을, 상반돼 보이는 두 작품을 통해 들여다 보고자 한다.


시대상이라는 '객관적 조건'과 인간의 감성이라는 '주관성'을 말할 때, 이 작품은 맨 앞자리를 차지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프란시스코 고야, <1808년 5월 3일>, 1814-1815, 프라도 미술관

이 그림의 시대적 배경은 1806년 프랑스 나폴레옹이 영국을 고립시키기 위해 내린 대륙 봉쇄령에서 출발한다. 1807년 영국과 통상을 유지하던 포르투갈을 점령하기 위해 프랑스 군대가 스페인에 진주한다. 당시 스페인은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으로 고야의 <카를로스 4세의 가족>의 주인공, 바로 그 카를로스 4세가 국왕이었다. 이 과정에서 카를로스 4세의 막내아들(<카를로스4세의 가족>에서 마리아 루이사 왕비 왼쪽에 서 있는 왕자) 프란시스코 파울로 왕자를 파리로 압송하려 했다.

1808년 5월 2일 마드리드 왕궁에 모인 시민들이 왕자의 압송을 저지하며 봉기(도스 데 마요 봉기 Dos de Mayo)했다. 이 봉기는 프랑스군에 의해 진압되고 이 시위에 참가한 수백 명의 사람이 총살 당한 장면을 그린 작품이 <1808년 5월 3일>이다.

<5월 2일 봉기 기념상, 마드리드>

‘전쟁, 봉기, 정치적 암투, 학살…’ 인간이 감성적으로 폭발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낭만주의 대표 작품의 토대가 캔버스를 뒤덮고 있다.


이 그림의 느낌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축축함’일 거다. 어떤 이는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다른 이들은 공포와 절망, 체념에 빠진 표정들이다. 저 멀리 성문에서는 포로들이 무리 지어 처형장으로 향하고 있다.


내 눈앞에서 분명히 벌어지고 있는 참혹한 광경인데, 눈 안에 확실히 들어오지 않는다. 가로등에서 비추는 빛은 축축한 밤공기를 뚫고 외지고 황량한 곳에서 벌어지는 이 무서운 광경을 드러내지만 윤곽은 흐릿하고, 분명하지 않아 더 공포스럽다.


낭만주의와 대비되는 아카데미의 이성적 능력으로 보면 감정, 상상은 분명하게 파악이 안 되는 영역이다. 뭔가 섞여 있는 모호하고 불투명하고 축축한 그런 느낌.


그러나 고야는 그런 감정도 역할을 한다는 것, 우리가 바닷가를 걸을 때 짭쪼롬하게 무언가 섞여 있어서 확실히 구분되지는 않지만, 바다 냄새라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듯이, 이런 고통과 참혹함의 광경도 이성을 넘어선 우리의 분노와 고통의 감정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이 작품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예술이라는 것이 명석하게 이성으로 밝혀지는 것이 아니라, 예술이 갖고 있는 원래 그런 측면이 있다는 것을 통해 데카르트의 합리론에서 대접받지 못했던 예술의 비합리성에 대해서 호의적으로 볼 수 있는 문을 열어주고 있다.


지금 우리가 미술관과 옥션을 통해 추상미술, 개념미술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그 출발점, 인간의 감성에 대해서 고야는 스페인 민중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이 감성은 인간 이하의 능력이 아니라, 인간이 가진 능력, 바로 감성능력이다.


이어서 <1808년 5월 3일> 비극의 배경을 깔아준 그 문제적 인물을 고야의 15년 전 작품을 통해서 만나봐야겠다.

프란시스코 고야, <카를로스 4세의 가족>, 1800년

이 작품은 벨라스케스의 <라스 메니나스>의 분위기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측면에서 실내로 쏟아져 들어오면서 미묘하게 변하는 빛은 벨라스케스뿐만 아니라 렘브란트의 그림까지 연상시킨다.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이 그림에 대해서 어떤 이는 고야가 의도적으로 스페인 왕가를 조롱하기 위해 몽매한 표정으로 그린 작품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고야의 감정과 심리를 본다면 <카를로스 4세의 가족>은 충격적으로 현대적인 감각을 표출하고 있다.

과거 바로크적 근엄함을 벗어내고 왕가 구성원이 느끼고 있던 그들의 내면 세계를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내고 있다. 고야가 왕가를 조롱했다기 보다는 당시 프랑스에서는 혁명이 일어나 부르봉 왕가의 루이 16세가 처형되었던 시기에, 같은 부르봉 왕가인 스페인 왕가의 권력과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완벽한 상징물이다.


화면 전체가 화사한 빛을 통해서 왕가의 초상화에 어울리는 장엄함과 호사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라스 메니나스>의 벨라스케스가 그랬던 것처럼 왼편 뒤 그림자 속에서 고야가 바라보고 있다.


고야가 부르봉왕가의 대형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기울인 노력은 <카를로스 4세의 가족>의 준비작으로 가족 초상화에 등장할 모든 인물의 실물 스케치를 연습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프라도에는 그때 고야가 한 스케치 열 점 중 다섯 점이 보관되어 있다.


<1808년 5월 3일>의 계기가 된 바로 그 왕자 프란시스코 파울라 그림에서 확실히 볼 수 있듯이 스케치들은 주황색 밑바탕에 본 초상화에 나타나는 인물과 비슷한 크기로 칠해졌다.

왕자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1800

고야는 왕의 막내아들을 팔팔하고 귀여운 모습으로 애정 어린 눈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희극과 비극이 반복되는 우리의 인생처럼 이 어린 왕자에게는 희극과 비극이 예고돼 있었음을 고야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이 그림을 직접 보게 되면, 전시실 32번의 <카를로스 4세의 가족>은 혼자 전시돼 있지 않다.


그림의 좌우에 국왕과 여왕이 말을 탄 그림이 있다.

고야 <마리아 왕비 기마상>,1799


고야 <카를로스 4세 기마상>, 1800

왕과 왕비의 그림은 가족 그림과 거의 같은 크기(330cm×280cm내외)로 가족 그림을 에워싸고 있다. 부르봉 왕가를 지탱하는 왕과 왕비에 대한 고야의 존중을 알 수 있다.


그림에서 카를로스4세의 말은 앞발을 치켜들지 않고 산책하는 모습인데, 이는 그가 태평성대의 군주임을 암시한다. 말의 고삐를 단단히 거머쥐고 안정적으로 말을 탄 자세를 취했는데 이는 훌륭한 군주임을 명백히 하려는 의도이다.


고야를 끝으로 이제 프라도 미술관을 떠날 시간이다.


세편의 기사에 걸쳐서 프라도 미술관을 구경했다. 프라도 미술관의 참맛을 10%만 즐겨 보려 해도 세 편이 아니라 삼십 편의 기사가 필요할 것이다. 이 작품도 보고 싶고 저 작품도 보고 싶고 많이 아쉽다.


프라도의 매력이라면 전시된 1600여 작품 하나하나가 살아 숨쉬는 느낌으로 자기가 있어야 할 곳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를 맞아주는 점이다. 르네상스 초기 피렌체부터 북쪽 플랑드르로 갔다 다시 베네치아로, 그리고 이어지는 선율로 벨라스케스와 고야까지. 어느 작품 하나 우리의 미적 취향을 허투루 하지 않는다. 각각의 작품들은 서로 연관되며 스승과 제자의 완성 관계를 이어간다. 궁궐의 대령숙수(待令熟手)가 제자를 통해서 왕실 음식을 깊고 풍미 있게 하는 것처럼 프라도 미술관은 모든 작품들이 완벽하게 어우러져 있다.


예술은 누적되고 이어진 것이다. 플라톤에게 예술의 출발이 영감(靈感)이었다면, 합리주의적 과학이 예술의 역할로 이해된 시대가 있었고, 낭만주의를 거치며 천재와 창의성을 중시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이 중 한 가지만 예술을 구성하는 것은 아니며, 그동안 본 것들이 죽지 않고 계속 이어져 현재까지 온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인간의 감각과 지각도 이성의 합리성 못지 않게 세상을 구성한다는 점이다. ‘몸’이 ‘기억’한다고 하지 않는가? 합리성에 근거한 고전주의 그림이 의미 있다면 비합리에 근거한 낭만주의 그림도 못지않게 예술을 구성하다.


지금 프라도에 가면 오랜 시간에 걸쳐 누적된 미(美, beauty)에 대한 합리적 비합리적 쾌(快, 즐거움)를 만끽하게 될 것이다.


https://www.d-art.co.kr/news/articleView.html?idxno=4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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