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만세운동 백주년 기념해인 2019년 신한은행은 독립운동가들의 사진을 신문 광고에 활용해서 큰 호응을 얻었다. 2008년 숭례문이 불에 탓을 때 지킴이를 자처한 은행도 신한은행이었다. 청계천에 '정조대왕반차도'를 설치하여 문화재 보호에 대한 의지를 표명한 것도 신한은행이다. 신한은행은 자신들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최초의 은행이라고 말한다. 신한은행의 전신이 조흥은행이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1897년에 만들어진 한성은행으로 연원이 닿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민간은행으로 쌍벽을 이루는 우리은행은 그 전신이 한빛은행, 상업은행으로 연결되고 그 전신이 조선상업은행, 더 올라가면 대한천일은행으로 연결되어 고종이 세운 우리나라 원조은행이라고 말한다. <우리은행 은행사 박물관>에 가면 고종이 친필로 쓴 글을 볼 수 있다. 역사성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사옥 앞에는 아주 오래된 고목이 우리은행의 수호신처럼 버티고 있다. 이 나무는 몇 년이나 되었을까? 이곳이 조선중기의 문신인 정굉필의 집터였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주목할만한 점이 있다. 우리은행의 전신인 상업은행에서 우리나라의 대표적 문인이 행원으로 근무한 것을 우연히 책을 보다 발견했다. 대하소설 '토지'를 쓴 박경리선생이 상업은행의 행원이었다. 6. 25전쟁이 때 남편 김행도가 공산당으로 몰려 어디론가 사라졌다. 박경리는 고향인 통영으로 낙향했다가 서울이 수복되자 흑석동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서울에서 홀어머니와 슬하의 남매를 키우기 위해 반찬가게를 비롯해서 닥치는대로 일을 했다. 그가 상업은행에서 입사할 때는 1954년 1월이다.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서기 전, 1년 남짓 이곳에서 행원으로 근무를 했다. 당시의 상업은행은 지금의 회현동 우리은행 본점이 아니다. 소공동 초입, 현재 한국은행 별관자리다. 그곳에 옛 상업은행 본점이 있었다. 박경리선생은 흑석동 집에서 노량진에 나가 폭파된 한강대교 대신 임시로 설치된 한강부교를 건너 전차를 타고 서울역에서 내려서 이곳까지 걸어서 통근을 했다.
그녀는 은행에서 어떤 일에 종사했을까? 아마도 창구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행원은 아니었다. 본점 조사과에서 근무했다. 1954년 6월 발간된 은행사보 <천일>9호에 박경리의 본명인 '박금이'이름으로 <바다와 하늘>을 발표했다. 참 재미있는 문단사의 한 장면이다. 순백의 원고지에 또박 또박 소설을 써내려가는 박경리가 아니라 주판을 튕기고 골무 낀 손으로 돈을 세는 박경리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그러나 그의 행원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성북동으로 이사가서 본격적인 문인의 길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우리은행은 행원이었던 박경리의 사진을 찾아 광고 모델로 활용하면 분명 대박을 칠 것이다.
박경리가 근무하기 20여 년전 상업은행의 전신, 조선상업은행의 두취(대표이사)가 박영철이었다. 박영철은 도쿄로 건너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고 한일 병합 뒤에는 함경도에서 군수와 도지사 등을 지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전주 삼남은행장을 맡다가 조선상업은행까지 인수하여 사장이 되었다. 박영철은 타고난 수완가였다. 은행업무와 관련된 조선총독부의 재무국장등과 자주 어울렸다. 저녁에는 이들에게 대연을 베풀었다. 그 비용이 3천원이라는데 지금 돈으로 3억이 넘는 액수다. 이런 큰 금액을 하룻밤 밥값, 술값으로 썼다하니 놀라울 뿐이다. 아마도 많은 금액이 뒷돈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그의 행적을 추적해 보면 재미있는 일들이 많다. '조선의 마타하리'라 불리는 배정자와 결혼식을 올린 기록이 전해진다. 지금 이화 외국어고등학교 자리에는 '스테이션호텔'이 있었다. 1899년 9월18일 경인선이 개통되었다. 제물포에서 내린 외국인들은 이전처럼 구태여 제물포에서 잠을 잘 필요가 없었다. 두 시간만에 서울에 도착하면 근사한 호텔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테이션호텔, 나중에는 '애스터하우스'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곳에서 성대한 결혼식 주연을 베풀었다. 이에 대한 기사가 대한매일신보 1907년 12월 24일에 실렸다.
“전 한성판윤 배국태씨의 매제 배정자와 일본 유학하여 졸업한 시종무관 박영철 씨가 새문 밖 호텔에서 혼례를 거행하였는데, 예절과 잔치하는 음식을 다 서양법으로 하고 내외국 신사 수백인을 청하여 대접하였다더라.”
여기에 등장하는 '서문 밖 호텔'이 애스터하우스이다. 배정자가 누구인가? 부친이 죽자 통도사에서 행자노릇을 하다가 아버지 친구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이토우 히로부미'의 양녀가 되었다. 실은 양녀가 아니라 애첩이라고 한다. 히로부미의 권유로 스파이 교육을 받아 조선으로 건너와 고종 밑에서 수 많은 기밀들을 빼돌렸다. 그녀는 이토우 히로부미의 권세를 등에 엎고 일본 육군사관학교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거물급 인사 박영철과 결혼했다. 그들의 결혼 생활은 5년 밖에 지속하지 못했다. 박영철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재력과 유력한 정재계 일본 실력자들과의 친분으로 조선상업은행을 대형은행으로 키웠다.
조선상업은행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이 광통관이다. 을지로 입구에서 남대문로를 따라가면 만나게 되는 곳. 누구나 한 두 번쯤은 지나갔을 곳이다. 이곳에 서면 '조선상업은행'이라는 현판이 아직도 큰 글씨체로 남아있다.
이 건물은 2002년 3월 5일 서울특별시기념물 제19호로 지정되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 점포인 <우리은행 종로지점>으로 쓰인다. 2층 양옥의 근대적 건물로 1908년 2월에 착공하여 1909년 5월에 준공하였다. 대한제국 때 탁지부(度支部) 건축소에서 세운 이 건물은 은행과 어음조합의 사무소, 일본 상공인들의 집회소 등으로 사용되었다. 가까운 곳에 청계천 광통교(廣通橋)가 있어 광통관이라고 불렀다. 벽돌과 석재를 혼합하여 사용하여 이오니아 양식의 벽기둥을 전면에 배치하였고, 건물 양 날개 부분에 바로크 풍의 돔 등이 설치되어 아름답다.
조선상업은행의 전신이 대한천일은행(天一銀行)이다. 1899년, 고종의 내하금 3만원에 김두승등 재계관계의 실력자들이 설립을 주도하고 황실은 적극 지원하는 방식으로 은행이 운영되었다. 1902년의 은행장이 영친왕이었다. 1897년 생이니 5살에 은행장이 되었다. 고종이 내려준 돈으로 설립한 은행답게 '대한제국'의 '대한'을 따서 '대한천일은행'이라 했다. 나라가 망하자 '대한'이라는 이름을 쓸 수 없어 '조선상업은행'으로 이름이 바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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