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는 누구세요?” 몇 년 전에 작고한 할머니는 생의 마지막 10년을 인지저하증으로 투병하시다가 돌아가셨다. 그 과정에서 차츰 기억을 잃어가시던 할머니는 마지막에 기억을 완전히 잃어버리고는 손녀조차 알아보지 못했다. 그렇게 잊힌 할머니의 기억 속에서 ‘사랑하는 손녀딸’이 아닌 ‘낯선 아가씨' 가 되어버린 순간, 말로는 다 표현하지 못하는 먹먹함과 슬픔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삶의 소중한 순간과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당사자나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들 모두에게 참으로 힘든 순간이 된다. 이러한 경험 때문일까? 지금 제주특별자치도에 소재한 포도뮤지엄에서 진행 중인 《어쩌면 아름다운 날들》을 관람하기 전부터 전시에 대한 기대가 매우 컸다. 《어쩌면 아름다운 날들》은 10명의 작가의 작품을 통해 인지저하증과 노화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을 제시한다.
전시장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알란 벨처(Alan Belcher, b.1957)의 <바탕화면>과<_.Zip>은 더 이상 실행할 수 없는 JPEG 파일의 모습을 보여준다. 컴퓨터나 사람의 뇌는 모두 특정한 것에 대한 정보나 기억을 저장하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점에서 작가의 작품 속에서 세라믹으로 구현된 깨진 이미지 파일들은 마치 기억을 잊어버린 사람의 머릿속과 닮아 있다. 작가는 세라믹이 지닌 특유의 단단함과 차가움을 활용하여 누군가의 잃어버린 기억과 그로부터 비롯된 상실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루이스 부르주아(Louise Bourgeois, 1911-2010)는 프랑스 태생의 작가로 거대한 거미를 표현한 작품인 <마망(Maman)>으로 널리 알려진 작가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외도에도 묵묵히 인내하며 가정을 지킨 어머니의 모습을 본 작가는 어머니의 모습을 거미에 빗대어 표현하였다. 연약한 다리로 힘겹게 서서 알들을 지키기 위해 버티고 있는 거미의 모습에서 모성애를 담아내고자 했다. 작가는 설치 작품인 <밀실> 연작을 통해 어머니와의 기억을 한 공간 안에 나타내었다.
이번 전시에 소개된 <밀실 1>은 루이스 부르주아의 <밀실> 연작 중 첫 번째 작품이다. 페인트가 벗겨진 낡은 문과 철제 침대 그리고 의료도구들은 오랜 시간을 병상에서 보내야 했던 작가의 어머니의 삶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신체의 한 곳이 아프게 되면 단순히 육체적인 고통을 느끼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이나 고립감 등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고통 또한 함께 느끼게 된다.
작품을 천천히 들여다보면 "Pain is the ransom of formalism(고통은 형식주의 몸값이다)", "I need my memories: They are my documents(나는 내 기억이 필요하다. 그것은 내 문서다)"처럼 작가의 일기장에서 발췌한 문구들이 매트리스 위에 붉은 실로 수 놓아진 것을 볼 수 있다. 나무 상자 속 동전 지갑 등을 비롯한 물품들은 작가의 어머니가 사용하던 것이다.
작가는 어머니가 투병하던 병상을 사실적으로 재현하여 보여줌으로써 한 개인과 그를 돌보는 보호자가 투병 과정에서 느꼈을 복합적인 감정들을 시각화한다. 어떻게 보면 ‘투병’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며 그것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겐 낯선 경험일 수 있다. 그러나 생로병사의 시간 속에서 인간은 누구나 한 번쯤은 아픔을 경험하게 된다. 루이스 부르주아의 작품은 자전적인 경험을 통해 우리가 모두 겪었거나 혹은 겪게 될 아픔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미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사진 작가 쉐릴 세인트 온지(Cheryle St. Onge, b.1961)는 <새들을 집으로 부르며>를 통해 혈관성 치매를 진단받은 어머니와의 일상을 사진으로 담아냈다. 작가의 작품 속 어머니의 모습은 백발의 머리와는 대조적으로 한없이 천진난만한 표정을 짓고 있다.
비록 병으로 인해 과거의 기억은 흐릿해졌지만, 비눗방울을 불고 망원경을 보고 음료수를 마시며 자신의 방식대로 여전히 하루 하루 소소한 즐거움을 누리는 작가의 어머니를 보며 수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우리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더 많은 것을 갈망하느라 일상에서 소중한 것들을 놓치게 된다. 우리가 진정으로 놓치지 말아야 할 가장 소중한 것은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오늘 하루임을 새삼 깨닫는다.
유명한 격언 중 '삶은 짧지만 예술은 영원하다'라는 말이 있다. 포도뮤지엄과 수무의 공동작업으로 제작된 작품인 <Forget Me Not>을 보며 이 말이 떠올랐다. 이 작품은 100년을 살다가 생을 마감한 배롱나무를 예술로 새롭게 재탄생 시킨 작품이다. 전시장의 한가운데 자리한 배롱나무 가지는 초록빛 조명을 만나 예전의 싱그러움을 되찾는다. 웅장한 음악과 함께 활기를 되찾은 나무는 시간과 계절에 흐름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하며 각기 다른 풍경을 관람객 앞에 펼쳐낸다. 배롱나무 주변에는 지난 2023년 포도뮤지엄이 진행한 《추억의 비디오 공모전》에 참여한 관객들의 영상이 함께 전시된다. 누군가의 소중한 기억이 배롱나무와 어우러져 예술이 되고 진한 여운으로 남아 또 다른 추억이 된다. 그렇게 예술 작품이 된 배롱나무가 잊히지 않고 관람객들의 기억 속에서 영원하기를 바란다.
순간 스쳐 지나가는 인생의 시간은 결코 붙잡을 수 없다. 인생의 순간을 간직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기억하고 추억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노화라는 변화가, 그리고 그로 인해 맞이할 수 있는 밖에 없는 ‘기억의 희미해짐’이 더욱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번 《어쩌면 아름다운 날들》 전시는 '노화와 인지저하증'이라는 주제를 통해 각자의 삶을 이루는 수많은 기억에 대해 되돌아보게 한다. 이 전시를 통해 모두가 기억과 추억의 소중함을 다시금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길 바라며, 2025년은 모두의 기억 속에 행복함이 가득한 한 해가 되기를 꿈꿔본다.
박정현기자 jhpart100@gmail.com
[박정현의 시각] 비록 희미해졌으나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기억에 대하여 < 리뷰 < 미술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