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사람들은 새해 해맞이를 위해 동해나 높은 산을 찾아간다. 그러나 필자는 매년 해맞이를 익산 왕궁리 유적지에서 하고 있다. 백제왕궁박물관에서 해맞이를 하는 이유는 집 근처여서 먼 길을 떠나지 않아도 되고, 주차장에서 2~3분만 걸으면 해맞이를 할 수 있으며, 주변이 평야여서 탁 트인 시야로 막힘이 없기 때문이다. 천 년의 역사와 백제 왕궁의 좋은 기운은 덤이다.
지난 1월 1일도 어김없이 익산 왕궁리 유적을 찾았다. 왕궁리 유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많은 분이 동쪽 궁장을 따라 줄지어 서 있었는데 어림잡아 최소 5천 명은 모인 듯했다. 왕궁리 유적지 해맞이 포인트는 동쪽을 향해 섰을 때 5층 석탑 왼쪽이다. 이곳에서 탑과 나무를 한 앵글에 넣고 사진을 찍는 것이 포인트이다.
동쪽 하늘이 붉게 물들며 새해 새로운 태양이 얼굴을 내밀고 떠오를 때, 세계가 평화롭고 나라와 민족이 평안하기를 빌었다. 누군가는 간절히 원했지만 맞이하지 못한 오늘을 감사함으로 살아야겠다는 다짐도 했다.
백제 왕궁터
왕궁리 유적지에는 백제왕궁박물관이 있다. 백제왕궁박물관은 왕궁리 유적에서 발굴, 출토된 문화유산을 보존, 전시하고 그 중요성을 많은 사람에게 알리기 위해 2008년 왕궁리유적전시관으로 처음 문을 열었고 지금은 디지털 체험관 등을 보완하여 백제왕궁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왕궁리 유적은 2015년에 동아시아 왕궁의 구조와 모범을 보여주는 유적으로 인정되어 유네스코 세계유산 백제 역사 유적지구로 등재되었다.
익산 왕궁면은 왕궁평, 왕검이, 왕금성 등으로 불렸으며, 정확히 어떤 곳이었는지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다. 1756년에 간행된 『금마지』에는 “왕궁탑은 폐허가 된 궁터 앞에 높이 10장으로 돌을 쌓은 것이다. 속전에는 마한시대에 만들었다고 한다"라는 기록이 있고, 1872년에 편찬된 『호남읍지』 익산군 지도에는 왕궁 탑이 그림으로 남아 있다. 그 외에는 특이점이 없어 방치되다가 몇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백제 시대에 궁궐로 사용되었으나, 후대에 사찰로 용도가 바뀌었고, 이후 사찰도 폐사되고 폐허로 변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익산 왕궁면에 있는 백제 왕궁은 신라의 선화공주와 결혼한 서동왕자로 알려진 백제 무왕이 건축한 것으로 익산으로 천도해서 지은 것인지, 수원화성과 같은 행궁인지, 혹은 제2의 수도인 별도인지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그러나 유적에서 발견된 화장실, 공방, 정원 유적은 이곳이 백제 왕실의 장엄한 왕궁터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익산 천도설
처음으로 왕궁리 유적이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던 때는 1965년이다. 기울어지는 탑을 바로 세우기 위해 5층 석탑을 해체 보수할 때 탑신에서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사리장엄구 안에는 녹색 유리로 만든 사리병과 2줄의 금띠로 묶어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금으로 만든 『금강경(金剛經)』, 배처럼 생긴 광배(光背)를 갖춘 청동여래입상(靑銅如來立像)과 청동방울(靑銅鈴)이 출토되어 함께 국보로 지정되었다.
유적 일대를 1976년부터 1977년까지 본격적인 발굴조사 전에 먼저 대충 윤곽을 알아보는 시굴 조사가 있었다. 이때 장방형 성곽과 백제 시대 수막새를 비롯하여 '대관관사(大官官寺)', '관궁사(官宮寺)'라는 절 이름이 새겨진 기와와 '수부(首府)'라고 도장이 찍힌 기와 등이 출토되었고, 석탑 뒤편에서는 석재는 완전히 파괴되었지만, 판축으로 기단을 다진 금당지를 확인했다.
'수부'는 우두머리 관청이라는 뜻이어서 이곳이 무왕 시대의 왕궁이라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그러나 우리 역사는 일관되게 백제의 수도는 부여로 기록되어 있고, 익산 천도나 궁궐 건축과 관련된 기록이 없어서 설득력이 없었다. 그런데 일본 『관세음응험기』라는 책에 무광왕이 지모밀지로 천도하고 새로 정사를 지어 경영했다는 기록이 발견되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무광왕은 무왕이고, 지모밀지는 금마를 일컫는다.
비록 새로운 자료가 나타나긴 했지만, 교차검증이 가능한 다른 문헌이 없고 『관세음응험기』는 역사책이 아니고 관세음보살이 행한 기적을 기록한 책이라 신뢰성이 낮아 익산 천도설은 학자들 사이에서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런데 왕궁 유적 동편에 있던 왕실 사찰인 제석사지 북쪽 400m 지점에서 제석사 화재 후 폐기물을 버렸던 폐기장이 발견되었다. 폐기장은 '절이 화재로 모두 타 버렸으나 석탑 내부의 심초석에 들어있던 금판경과 사리함 등은 타지 않았다'라는 『관세음응험기』의 기록을 뒷받침하는 유적이다. 제석사지 폐기장의 발견으로 『관세음응험기』의 기록에 대한 신뢰도가 상승하며 익산 천도설에 힘이 실리기 시작하였다.
백제 왕궁이라고 보는 증거
1994년 조사에서 동서 석축 4개소와 남북 석축 2개소를 확인했다. 석축은 왕궁리 유적 전체의 가로 세로 비율과 유사한 비율이어서 계획적으로 건축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왕궁 유적은 완만한 경사면이기에 평탄화 작업이 이루어졌는데 성토 층을 조사한 결과 서울 풍납토성에 버금가는 '판축 기법'으로 만들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판축기법'이란 흙을 차곡차곡 다져서 기초를 만드는 것으로 많은 인력이 필요한데, 이러한 대규모 공사 흔적은 왕궁리 유적이 매우 중요한 시설이라는 것을 증명하기에 충분하였다.
2001년에 공방 터, 2002년에 화장실 유적, 2004년에는 정원 유적, 2008년에 후원 유적이 발굴되었다. 공방 터에서는 금 도가니, 유리 도가니를 비롯한 합금, 도금 제품들이 발견되어 상당한 기술의 공예품이 생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유리 도가니는 백제 왕실에 유리 생산 기술이 있었음을 증명하는 중요한 유물이다.
화장실 유적은 대형 공공화장실로 상당히 과학적으로 설계되어 있다. 화장실 내부의 오물이 일정 높이까지 차면 인근의 동서 석축 배수로로 흘려보내는, 저류식 화장실과 수세식 화장실을 섞은 독특한 형식이다. 화장실 흙에서 나온 기생충을 조사하여 백제 사람들은 채식 위주 식사를 했음을 밝혀냈고, 뒤처리용 막대기도 발견되어 백제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들여다보는 계기가 되었다.
2004년에는 백제 시대의 정원 유적이 비교적 완전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정원 유적에는 물이 들어오고 나가는 곳을 비롯하여 수로 시설, 암거 시설, 집수 시설 등이 있었고, 한쪽에는 정자 같은 쉼터를 짓기 위해 터를 조성했다. 정원은 지형의 높낮이를 이용해 물이 아래쪽으로 흐르는 방식이었고, 주변을 온갖 정원석으로 꾸며 자연경관을 축소한 형태이다. 백제 왕궁의 정원 양식은 중국에서 유행했고 일본에도 유사한 양식이 있어 동아시아 지역에서 정원이 어떤 식으로 변화해 나갔는지를 확인하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정원 유적에서 발견된 수로와 후원 유적의 도수 시설은 백제 시대의 수로 체계를 확인할 수 있는 유적이다. 후원 전체에 U자를 반대로 뒤집은 모양인 거대한 환수구는 주변에 괴석들을 배치하여 경관을 아름답게 꾸미면서 수로와 함께 유적 내 물의 흐름을 조절하는 두 가지 역할을 하였다.
마무리
익산 왕궁리 유적은 우리나라에서 확인 가능한 유일한 삼국시대 왕궁 유적이다. 아직도 익산으로 천도한 것인지, 제2의 수도였는지에 대한 논란은 있지만, 백제 왕궁이 익산에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왕궁리 유적은 아름다운 일출과 일몰을 볼 수 있는 곳이며, 4월 벚꽃이 피면 꽃비 속의 석탑을 찍을 수 있는 사진 맛집이다. 아직 새해 해맞이를 못 했거나 천 년 백제 왕궁의 좋은 기운을 받을 사람은 꼭 한 번 방문해 보기를 바란다.
[이맘때 가면 딱 좋은 곳 ②] 선화공주와 결혼한 백제 무왕이 건축한 익산 왕궁리 유적지 < 답사 < 아트체험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
손안나 로컬큐레이터 arabianna@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