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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하는 예술 17] 박경리가 살았던 1957년

by 데일리아트

더러는/옥토(沃土)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生命)이고저……


흠도 티도/금가지 않은 / 나의 전체(全體)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 드리라 하올 제, /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니인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 새로이 눈물을 지어 주시다.


-김현승, '눈물' <시초(1957년) 중에서>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로 첫 연을 시작하는 ‘가을의 기도’를 쓴 김현승(1913~1975)의 ‘눈물’이라는 시이다. 시에서 느껴지는 것은 슬픔이다. 마음속에 올라오는 슬픔을 꾹꾹 눌러 참으면서 쓴 시처럼 보인다. 올라오는 슬픔, 그대로 맘 놓고 울기라도 하면 속이라도 풀리련만 시인은 그 슬픔마져도 마음속에서 다지고 또 다져 종교적으로 승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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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무등산 등산로 초입의 김현승 시비, 대표작 '눈물'


시인에게 어떤 슬픔이 있었던 것일까? 그가 조선대 교수로 재직중일 때 4살된 아들을 잃는다. 때는 우리 민족사의 비극인 6.25가 한창 진행중일 때라 약 한 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나라의 5분의 1이 죽거나 장애인이 된 6.25가 일어나는 와중이어서 시인은 고통을 맘 놓고 드러내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1960년 아들을 잃은 장소인 광주를 뒤로하고 숭실대에서 문학을 가르치다가 1975년 채플시간에 쓰러져 타계했다.


어린 아들을 떠나보낸 슬픔을, 시 밖에 모르는 시인은 시로써 달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할 수 없는 슬픔 속에서 떨어지는 눈물이 옥토에 떨어진들 생명이 될 수 있을까? 자식잃은 부모의 눈물은 고결한 결정체가 아니라 심장을 쥐어짜는 피눈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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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의 소설 나의 가장 나종지니인 것


김현승의 시에서 등장하는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니인 것‘은 ’박완서 단편소설 전집‘의 다섯 번째 책 이름이기도 하다. 책 제목을 김현승의 ’눈물‘에서 가져온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 공통점은 자식을 잃었다는 것이다.


마흔의 늦은 나이에 등단해 2011년 타계할 때까지 80여 편의 단편과 15편의 장편을 쏟아낸 우리나라 대표 작가 박완서에게도 어찌할 수 없는 슬픔이 찾아왔다. 박완서는 1988년 병으로 남편을 잃고, 3개월 뒤 서울대 의대 인턴으로 근무하던 26세의 아들을 과로사로 떠내 보내야 했다. 4녀를 낳은 끝에 얻은 외아들이었다. 박완서가 천주교에 입교한 지 4년 째였는데, 손에 잡던 묵주를 집어던졌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해인 수녀의 권유로 부산 베네딕도 수녀원에 정양했다. 박완서는 이에 대해 자신의 산문집에서 ‘주님과 한 번 맞붙어 보려고 이곳에 들어왔다. 당신은 과연 계신지, 계신다면 내 아들은 왜 죽어야 했는지, 내가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건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모른다’고 적었다. 1993년 그 슬픔을 그대로 작품속에 투영해서 작품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이 출간되었다.


자식을 잃은 슬픔을 참척이라한다. 박완서의 슬픔을 위로해준 사람이 박경리이다. 문단에서 선후배로 서로 밀어주고 이끌어 주는 관계이다. 모진 슬픔을 당한 박완서를 데리고 한국일보 장명수 기자는 원주 단구동 박경리 집으로 인도했다. 후배를 위해 밤새 곰국을 고아놓고 기다린 박경리는 박완서를 껴안고 울었다. 박경리는 “써야 돼, 써야 돼. 글로 써야만 이겨낼 수 있어”라고 하며 후배의 등을 두드리며 절규했다.


그 고통을 아마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박경리 뿐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박경리도 어린 아들을 우연하게 사고로 잃었기 때문이다. 박경리는 이런 이야기를 자신의 소설 '불신시대(1957년)'에서 녹여냈다.


“의사의 무관심이 아이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다. 의사는 중대한 뇌 수술을 엑스레이를 찍어보거나 심지어 약조차 준비하지 않고 시작했고, 마취도 안 한 아이는 도살장의 망아지처럼 죽어 갔다. 그렇게 해서 아이를 갖다버린 진영이었다.” (불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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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불신시대


박경의 소설 불신시대에 한 대목이다. 소설을 살펴보자. 6.25 전쟁 중 남편과 사별한 진영은 유일한 희망인 아들마저 의사의 무성의한 치료로 잃게 된다. 병원에서는 조제하는 약의 함량도 속이고, 환자가 와도 건성으로 치료해서 사람을 죽인다. 진영은 도살장의 망아지 처럼 죽어간 아이를 위해 종교에 매달린다. 그러나 그녀가 본 것은 시주받은 쌀을 착복하는 중이었다. 중은 쌀을 부처님에게 갖다 바치기는커녕 오히려 그 쌀을 팔아 돈을 챙기면서 ‘중도 살아야 하지 않겠수?’ 를 반복한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도둑 맞을까봐 신발을 싸들고 예배를 보는 신도, 성당 사람은 진영에게 사기를 친다. 진영은 병원, 교회, 절 등의 부패와 타락을 경험하며 절망한다. 아이를 위한 천도제가 치러지는 절에서 진영의 분노는 극에 달한다. 중은 자신의 아들의 제사는 건성으로 드리고 고위 관료의 제사는 온 정성을 다한다. 떨어지는 게 있어서이다. 불경을 외는 중의 목소리가 다르다. 절에서 자행되는 불법을 참지 못하고 절에 맡겼던 아들의 위패를 찾아 태워버린다. 그녀는 아직 자신에게 항거할 수 있는 생명이 있음을 자각하고 불신 시대에 정면 대응하겠다는 의지를 보인다.


소설 속 진영이 박경리 자신이다.1956년 7월 27일 박경리의 소설이 현대문학에 등단한 날 아들을 잃었다. 소설이 계간지에 출간하는 날, 친척 아저씨가 아들을 데리고 나가 놀다가 언덕에서 머리를 다쳐 급하게 병으로 갔지만 의사의 무성의한 치료로 아이를 잃은 것이다. 마음에 대못을 박고 엄마 곁을 떠난 자식은 박경리가 죽을때까지 마음 속에 두어야 하는 십자가와 같았다. 소설 속 병원이 서울대학병원이다. 자식을 잃은 후 귀가 때에 다른 길로 갈 수도 있었지만 굳이 돌아서 대학병원 앞을 지나는 길을 택했다. 그 이유에 대해 박경리는 맘속에 더 깊은 대못을 박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잃은 자식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마음에 더 깊은 대못을 박는 것은 어미가 죽은 자식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마지막의 일이었다. 자신에게 이런 마음의 고문을 가해 잊혀지는 자식을 기억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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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문학공원의 박경리 모습


박경리가 그토록 불신했던 시대인 1957년은, 앞서 이야기한 김현승이 자식을 잃고 그 슬픔을 어찌할 수 없어서 시로 승화시킨 ’눈물‘을 발표한 시기이기도 하다. 두 작가가 개인적인 슬픔을 한 사람은 시로, 한 사람은 소설로 발표한 시기이다. 김현승은 개인의 슬픔을 종교적으로 승화시켰고, 박경리는 개인의 고통스런 경험을 사회에 투영하여 부조리한 시대를 소설로 고발했다. 그리고 그 시대를 '불신시대'라 명명했다. 시대를 살아가면서 작가는 시대를 어루만지는 치료자의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자기가 살아가는 시대의 정체성을 찾기도하고 시대를 이름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박경리는 자신의 아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자신의 이익만을 극대화 시키는 종교계와 의료계를 강하게 질타했다. 우리 민족에게 1957년은 전쟁이 끝나고 4년 밖에 지나지 않은 시기이다. 전쟁 이후 사회가 질서를 잡히기 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정치도 어수선하고 사는게 각박하니 모든 것이 얽힌 시대였으리라 짐작이 가고 조금은 이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시대가 지나고 70년 가까이 지난 지금, 다시금 불신 시대가 되었다. 법치가 사라지고 공권력이 작동하지 않는 불신시대에 살아간다. 우리에게 또다시 이런 시대가 올 줄이야 생각이나 했겠는가.


소설 불신시대의 마지막은 아들 문수의 위패를 절에서 찾아 내려가며이렇게 끝을 맺는다.


"진영의 고요한 얼굴 위에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겨울 하늘은 매정할 정도로 너무 맑다. 잡목가지에 얹힌 눈이 바람을 타고 진영의 외투 깃에 날아 내리고 있었다. 그렇지 내게는 아직 생명이 남아 있었다. 부당한 것에 저항할 생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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