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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는 유태인을 학살하고, 퇴근 후 동화책을 읽어주는

by 데일리아트

[저항하는 예술 18]-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


흐르는 강물을 배경으로 한 가족이 피크닉을 즐기고 있다. 날씨는 화창하고 풍광은 아름답다. 한 쌍의 부부와 귀여운 아이들로 이루어진 가정은 지극히 평범하고 화목하게 보인다. 화면은 계속해서 그들의 집을 보여준다. 잘 가꾼 화단과 몇 그루의 나무가 그들의 집을 둘러싸고 있다. 특별할 것이 없다. 바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인류 최악의 홀로코스트가 일어난 장소인 아우슈비츠가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 외에는.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2024)’에 학살의 장면은 드러나지 않는다. 검은 연기와 간간이 들려오는 비명이 가스실과 벌거벗은 육신, 검게 탄 시신을 대신한다. 영화는 참극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영화는 ‘악의 진부함’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연상시킨다. 실존 인물인 루돌프 회스는 아우슈비츠의 소장이다. 그는 동시에 한 집안의 다정하고 평범한 가장이다. 자기 전엔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는 아버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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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한 장면


그는 회사원들이 일을 수행하듯 학살을 구상하고 지도한다. 방산업체 사람들과 가스실 운영을 계획하기도 한다. 수치와 계량화를 통해 구체성을 잃어버린 죽음은 효율적인 업무로 치환된다. 그의 부인 헤트비트는 다른 친위대 부인들과 유대인들에게 빼앗은 물건에 관해 이야기한다. 바자회에서 싸게 산 물건을 자랑하는 태도와 다를 바가 없다. 진부해진 악과 평범한 일상이 일으키는 불협화음이 관객에게 묘한 위화감을 느끼게 한다.


아우슈비츠와 회스 가족의 집을 가르는 것은 오직 하나의 벽이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한쪽에서는 참혹한 죽음이 한쪽은 안온한 생활이 펼쳐진다. 카메라가 향한 쪽은 친위대 가족의 평온한 일상이다. 그들의 인생과 전쟁은 무관한 듯 보인다. 아우슈비츠는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 방식’으로 등장한다. 참상은 전시되지 않지만, 카메라는 벼려진 칼날처럼 보여줄 대상을 해부한다. 회스 가족이 수영하던 강물에 소각된 사람의 뼈가 떠내려온다. 회스는 아이들을 물 밖으로 대피시킨다. 그들의 ‘위생’을 위해 몸을 닦게 하고 소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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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한 장면


헤트비트는 어머니에게 자신이 일군 많은 것들을 자랑한다. 헤트비트는 ‘아우슈비츠의 여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다. 어머니는 그런 딸을 대견하게 여긴다. 그러나 그녀의 어머니는 수용소에서 들려오는 소음과 불빛에 질려 도망치듯 떠난다. 회스가 아우슈비츠에서 전근하게 되었을 때도, 헤트비트는 그녀가 일군 집을 버리기를 거부한다. 학살이 이루어지는 공간에서 만찬과 사교 모임을 즐기는 행위는 얼마나 엽기적인가. 회스의 후임자가 성과를 올리지 못하자 회스는 다시 아우슈비츠로 복귀한다. 사람의 마음이란 복잡하고 미묘하다. 학살이란 업무와 그들이 영위하는 일상을 정확하게 구별하는 회스 부부의 마음 깊은 곳에는 두려움이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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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한 장면


결말 부분에서 회스는 파티장을 떠나며 헛구역질한다. 언어로 포착하지 못한 양심과 두려움이 욕지기가 되어 그의 내부에서 빠져나온다. 계단을 따라 그의 하강은 계속되고 구역질은 멈출 줄 모른다. 영화에는 따뜻한 장면 역시 등장한다. 수용소에 있는 유대인들을 위해 음식을 숨겨뒀던 소녀 이야기가 등장한다. 열화상 카메라로 찍은 이 장면은 환상적이고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영화의 제목으로 쓰인 존 오브 인터레스트(the zone of interest)에서 인터레스트(interest)는 관심이 아니라 금전적 이득을 뜻하는데 나치가 수용소 주변 지역 농지를 몰수한 땅에서 경제적 이득을 취한 것에서 비롯한 말이다. 아우슈비츠에서 얻은 경제적 이득에 기생해서 살아가는 회스 가족을 빗댄 제목이기도 하다. 화면이 전환하며 그들이 머무르던 구역(zone)은 평온한 일상의 공간에서 벗어난다. 아우슈비츠 기념관으로 변화한 그들의 집터는 이제 존 오브 인터레스트(the zone of interest)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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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한 장면


재현의 윤리에 대한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의 치열한 고민의 흔적을 영화 여기저기서 찾아볼 수 있다. 영화라는 매체는 참혹한 현실을 어느 정도의 수위로 관객에게 보여주어야 할까. ‘실재’했던 사건이라는 이유로 잔혹한 현실을 전시하는 행위는 바람직할까. 노골적 재현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진실을 숨기는 행위는 또 다른 의미에서 비윤리적이지 않을까.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은 자신만의 개성을 통해 영화가 역사에 접근하는 방식을 창출한다. 영화는 제76회 칸 영화제에서 그랑프리와 사운드트랙상을 받았다. 제96회 아카데미시상식 장편국제영화상, 음향상 수상작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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