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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의 등처럼 나타나는 고전 ② ]

by 데일리아트

[칼럼니스트 : 김상조 작가/번역가]


대학에서 경영학과 영문학을 전공했고, 일반 직장을 다니다 신학교에 갔다. 아무도 안 읽는 책을 두 권 썼고, 그에 비해 그럭저럭 잘 나가는 책을 몇 권 번역했다. “지나간 신음소린 빛나기 위함!”이라는 송욱의 싯구를 좋아한다. 지금도 여전히 좀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 좀더 생각이 온전해지고 정신에 밸런스와 풍성함을 갖추기 위해 애쓰고 있다.


[칼럼 : “고래의 등처럼 나타나는 고전” ]


고전 텍스트와 예술 작품 읽기에 집중해서 생각의 초점을 모아보려 한다. 살아가면서 자꾸 외롭고 허전한 것은 “깊이”를 찾아야 한다는 신호가 아니겠는가. 텍스트와 그림이 그 깊은 곳에 이르는 문이라고 믿는다. 그 깊은 곳에서 그 작가를 만날지, 그 작가를 만나러 찾아온 이들을 만날지, 신을 만날지, 모두 다 만날지 모르지만, 예비된 만남이 있으리라 기대한다.


비용은 당신이 대라 - [베니스의 상인]에 담긴 지혜 1


평소 필자가 즐겨 읽는 현대의 기독교 작가 찰스 스윈돌는 그의 책에서 '지혜'를 이렇게 정의한다. “지혜란 희귀할 정도의 객관성을 갖고 인생을 응시하고, 희귀할 정도의 안정감을 갖고 인생을 운영하도록,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이다.” 지혜의 덕목으로 객관성과 안정감이 거론되는 이유는 인간이 항상 스트레스와 압력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삶이 주는 압박을 견디면서 살아야 하기에 지혜가 필요하다.


지혜를 다루는 작품으로는 악역을 맡은 샤일록으로 유명한 세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을 들 수 있다. 중심 인물인 포샤와 샤일록, 안토니오와 바사니오 뿐만 아니라 광대들의 대사까지 하나하나 따져봐야 하고, 작품의 핵심 플롯 중 하나인 금궤, 은궤, 납궤 속에 들어있는 메시지도 음미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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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년에 나온 [베니스의 상인] 첫번째 사절판 표지


작품의 막이 오르면 첫 장면부터 안토니오가 근심하는 표정으로 나온다. 왜 그가 침울한지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근심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은 자명하다. 즉 작품은 특정할 수 없는 이유로 슬픔에 잠긴 모든 이를 안토니오의 자리로 초대하며, 그들을 개인적인 어둠에서 건져내는 일을 시도한다. 개인의 정신적 슬픔을 극복하는 일과 작품이 파고드는 주제의식은 함께 다루어진다.


안토니오와 바사니오는 친척이자 친구 사이. 바사니오는 이미 파산했는데, 분에 넘치도록 사치스럽게 살았던 까닭이었다. 안토니오에게 돈을 빌려서 생계를 유지 중이며, 이 경제적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돈 많은 여자와 결혼할 계획이다. 벨몬트에 사는 포샤라는 여자가 그 타겟이다. 이렇듯 작품은 상처 입고 흠결 있는 인간들의 이야기라는 걸 일찌감치 알려준다.


그와 달리 포샤는 아버지로부터 큰 재산을 상속받은 여자에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 놀라운 미덕을 갖춘 여자이기도 하다. 돈도 많고, 외모도 빼어나고, 마음도 아름다운 여자라니! 구혼자들이 구름처럼 몰려온다.


경쟁이야 치열하지만 바사니오는 예전에 만났을 때 포샤가 자기를 향해 던졌던 무언의 눈빛을 기억한다. 그 둘은 이미 교감하던 상태였다. 수많은 남자들이 그녀에게 달려들고 있지만 바사니오는 자신에게 승산이 있다고 본다. 다만 이 결혼을 성사시키려면 자금이 필요하니 좀더 돈을 빌려 달라고 안토니오에게 요청한다.

침울한 상태였던 안토니오는 바사니오의 연애담을 듣고 돈을 빌려주려 한다. 뻔뻔한 바사니오가 안토니오를 우울에서 건져내는 역할을 한다. 안토니오에게서 사랑과 돈, 인격은 하나로 결속되어 있다. 바사니오를 사랑하므로 그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돈과 존재 전체를 다 사용하겠노라고 말한다. 친구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디딤돌이 되어주는 셈이다.


다만 안토니오는 당장 수중에 현금이 없고, 자신이 투자한 상선들이 돌아와야 돈을 돌릴 수 있다. 그러니 바사니오에게 자기를 보증인으로 삼아서 어디 가서라도 돈을 빌리라고 말한다. 이에 바사니오는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을 찾아가 돈을 빌린다. 3천 두캇의 돈을 석 달 동안 빌리기로 하고 안토니오가 빚보증을 선다. 만기 한달 전에는 여러 곳에서 출발한 상선들이 다 들어오니, 얼마든지 갚을 수 있다고 봤다. 신성로마제국이 전쟁에서 패한 뒤 오스만 제국에게 매년 바친 조공 금액이 삼만 두캇이라고 하니, 그 십 분의 일이면 상당한 액수라 하겠다.


샤일록은 기독교도인 안토니오에게 악감정을 품고 있기에 말에 뼈가 있다. 그동안 안토니오가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무이자로 빌려주는 바람에 베니스 지역의 이자율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샤일록으로서는 안토니오 때문에 생계가 위협받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아니꼽다. 그는 현실적으로 보자면 딱히 문제 삼기 어려운 방식으로 돈을 벌어 왔다. 그 누구도 칭송하지 않았을 뿐이다. 안토니오는 이런 샤일록을 혐오한다. 샤일록 역시 자신을 경멸하는 안토니오를 경멸한다. 돈벌이에 집중해서 살아온 자신을 경멸하던 자가 정작 돈이 필요하니까 제 발로 자기를 찾아왔다고.


대부 계약이 체결된다. 석 달 후에 못 갚으면 안토니오의 몸에서 자신이 원하는 부위의 살 1파운드를 떼어가겠다는 조항이 담긴 계약. 가벼운 놀이처럼 그 조항을 넣고 공증인의 공증을 받자고 샤일록이 제안하고, 안토니오는 흔쾌히 동의한다. 나중에 큰 논란을 일으키는 계약이 이렇게 체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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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든 판版 [베니스의 상인] 텍스트 표지


벨몬트에서는 포샤가 아버지 유언에 따라 남편감을 고르고 있다. 결혼은 돈 위에서나 성립할 수 있다고 보는 포샤의 아버지는 딸이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을 선택해서 결혼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딸에게 구혼하는 자는 금궤, 은궤, 납궤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고, 바른 선택을 하는 자라야 결혼할 수 있다는 조건을 내건다.


구혼하러 찾아온 자들 중에 가장 먼저 나선 모로코 왕자가 금궤를 선택해서 연다. 그 안에는 부패한 동물의 사체가 들어 있다. 그리고 그 사체의 눈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힌 두루마리가 꽂혀 있다.


'반짝이는 게 모두 금은 아니다'라는 말은


그대도 이미 들어봤으리라.


많은 사람들은 자기 인생을 다 바치면서도


보이는 부분만 본다.


관에 금칠을 하더라도 벌레가 끼기 마련이거늘.


금궤는 보기 좋은 것들이 품고 있는 문제를 응시하게 한다. 물론 이런 사상에 대해서는 반론도 가능하다. 보기 좋다고 항상 속이 썩어 있는 건 아니고,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사물의 내면을 볼 수 있을 눈을 가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그런 눈을 가지고 있지 않다. 왕자는 금궤를 선택했고, 그가 결혼을 위해 들였던 공은 수포로 돌아간다.


다음 타자는 아라곤 왕자. 금궤에 새겨진 말을 읽으면서, 외관만 보고 선택하는 수많은 자들과 거리감을 둔다. 그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는 어리석음에서는 벗어나 있다. 아라곤 왕자는 정당한 삶을 찬송하며 은궤를 택한다. 공로에 따라 정당한 보상이 주어지는 세상을 꿈꾸며, 과분한 것에 욕심내지 않는다는 감각이라 하겠다. 부당한 이익을 취하지 않고 정당한 대가로 살아가겠다는 인생론을 펼친다. 아라곤 왕자는 삶을 살아가는 수수한 감각을 대변한다. 그러나 그 감각도 이미 문제적이다. 정당한 보상을 바라는 세계관 자체가 허깨비 즉 그대로 이루어지기 어려운 공상이며, 돈에 욕심을 갖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 삶은 정당한 인과율에 따라 운영되지 않고, 이루어져야 마땅한 일 역시 이루어진다는 보장이 없다.


벨몬트에서 은궤 속 메시지가 개봉될 즈음, 베니스에서는 샤일록의 항변이 나타난다. 샤일록은 포샤의 구애자 모로코 왕자처럼 은궤를 선택한 이들을 대변하며 공정과 정의를 추구한다. 이 때 안토니오의 배가 하나하나 난파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샤일록은 복수가 현실로 다가온다고 흥분한다. 다른 이의 살 1파운드를 베어낸들 그걸로 뭘 할 수 있느냐는 살레리노의 말에 샤일록은 울분을 토하며 대답한다.


낚시밥으로 쓰면 되겠죠. 설령 쓸 데가 없더라도 복수는 할 수 있을 거고. 그 (안토니오)는 여태 수없이 나를 모욕하고, 수십만 번 내 사업을 방해했으며, 내가 손해를 보면 비웃었고, 내가 이익을 보면 멸시했고, 내 조국을 욕했고, 내가 하는 사업을 망쳤으며, 내 친구들을 멀어지게 만들었고, 내 적들을 준동했지만, 그가 그렇게 한 이유가 뭐였죠? 내가 유대인이기 때문이었죠.


샤일록이 고발하듯 기독교도들 역시 유대인과 똑같은 수준에서 살고 있다. 공평무사가 다스리는 세계, 약속을 어겼으면 당연히 처벌을 받아야 하는 공정한 세계 말이다. 그 공정성 이면에는 복수심이 도사리고 있다. 샤일록의 뜨거운 대사를 통해 작품은 과연 ‘공정’이 우리 삶의 토대로서 정당한지 묻는다. 베니스와 벨몬트 두 곳에서 독립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은 작품 전개상 같은 페이스로 나란히 진전된다.


벨몬트로 포샤를 찾아온 바사니오도 궤를 선택해야 한다. 포샤는 자신이 좋아하는 바사니오가 바른 선택을 하지 못할까 싶어 노심초사한다. 바사니오는 금궤를 길게 응시하지만 스스로에게 금궤가 대변하는 화려한 세계를 조심하라고 타이른 뒤, 은궤로 넘어갔다가, 은궤 역시 가볍게 지나친다. 마침내 납궤를 선택한다. 외관상으로는 볼품없지만 웅변보다 더 큰 목소리로 말을 한다면서. 납궤 속의 메시지는 올바른 선택을 칭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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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바사니오가 포샤의 마음을 얻는다. 안토니오 파올레티 작. Public domain


외관만 보고 선택하지 않는 자여.


제대로 선택하였도다.


이제 이 복된 선택을 했으니


만족하고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찾지 말라.


너의 복에 만족하고 기뻐한다면


네 여자가 있는 쪽으로 돌아서서


사랑의 입맞춤으로 그녀가 네 여자라고 선언하라.


(내일 2부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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