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리 사회의 혼란이 극에 달하고 있다. 이것을 보면서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일어난 드레퓌스(Dreyfus Affair) 사건이 연상되었다. 무명의 한 장교가 죄가 있느냐 없느냐를 두고 대립한 사건이다. 각자의 이념과 생각에 따라 나라가 나뉘어 내란에 이를 정도의 혼란이었다. 프랑스는 이런 진영의 혼란을 130년 전 미리 겪어 지금 사회가 안정된 것일까? 한 번 겪어야 할 혼란이라면 예방 주사처럼 맞고 넘어가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드레퓌스 사건의 경위와 결과를 살펴보자. 1870년에 프랑스와 프로이센 간에 전쟁이 일어났다. 이른바 알퐁스 도데의 단편소설 〈마지막 수업〉의 알자스 로렌 지역이 등장하는 보불전쟁(1870년 7월~1871년 5월)이다. 이 전쟁에서 독일은 프랑스로 부터 알자스 로렌 지역을 빼앗으며 통일 독일을 이루었다. 전쟁에서 진 프랑스 사람들은 독일에 대해 국민적 감정이 험악했다. 인근 나라끼리의 문제는 사실 많은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나라와 일본도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이것 말고도 19세기말 프랑스에는 또 다른 기류가 있었다. 프랑스를 비롯해서 전 유럽에 팽배한 반유대주의이다. 이 여론을 주도한 세력은 로마 카톨릭 교회인데, 그들은 '유대인은 프랑스의 적이고 하나님을 살해한 민족이다. 그래서 저주 받아야 마땅한 민족'이라며 유대인들을 닦아 세웠다. 프랑스에서는 이런 반 유대주의적 여론이 카톨릭 계열의 신문을 통해 확장해 가고 있었다. 교묘한 배타적이고 국수적 민족주의 정신이 반 독일, 반 유대주의 운동에 편승해 사회에 독버섯 처럼 퍼져가고 있었다.
드레퓌스의 군적을 박탈하는 삽화를 실은 당시의 잡지
이 때 드레퓌스 사건이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일어났다. 사건의 발단은 1894년 9월, 프랑스 정보국 요원이 독일대사관에서 몰래 빼내온 문서에서부터 시작 된다. 두 나라간에 첩보전이 활발한 때여서 서로 정보를 빼 건네 주기도 하는 때의 일이다. 문서(명세서)를 보니 누군가가 프랑스 자국의 기밀을 독일로 빼돌리는 프락치, 우리나라말로는 간첩이 프랑스 군부에 있다는 것이다. 독일로 흘려보낸 문서의 글씨체 주인을 찾으면 그가 독일에 정보를 넘긴 범인인 셈이었다.
범인으로 지목된 사람은 유대인이며 독일계인 육군 포병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였다. 재판에서는 글씨체가 드레퓌스의 것과 다르다는 이의가 있었으나, 범인이 글씨체를 일부러 바꾸었다고 누명을 씌우고 의견을 묵살시켜 범인으로 확정 시켰다. 왜냐하면 그는 프랑스 군인이었지만 보불전쟁에서 독일에게 빼앗긴 알자스로렌 출신의 유대인이었다. 그에게 죄를 덮어 씌워도 누구 하나 그를 편들지 않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1894년 12월 군사법정은 그를 반역죄로 종신형은 물론 군적까지 박탈했다. 자신의 무죄를 외치는 그에게 돌아온 것은 "유태인을 죽여라"라는 군중의 소리 뿐이었다. 그는 1895년 2월 21일 기아나의 악마섬으로 유배당한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났다. 1896년 3월, 프랑스 장교 조르주 피카르는 참모본부 정보국으로 발령받고, 자신의 제자이기도 한 드레퓌스 사건을 다시 들여다 보았다. 자세히 사건을 살펴보니 범인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났다. 적국에서 발견한 비밀서류 (명세서)의 글씨의 주인공이 에스테라지 소령이라는 것을 찾은 것이다. 피카르는 참모본부에 사실을 알렸다.
그러나 군사 법정은1898년 1월 10일에 열린 재판에서 진범 에스테라지 소령은 무죄라고 판결했다. 드레퓌스가 범인이라는 것을 확정하기 위해 에스테라지의 거짓 주장을 법정에서는 눈감아주었다. 그를 진범으로 지목할 경우 군부의 체면이 말이 아니기에 진실과 상관 없이 드레퓌쉬를 범인으로 몰고 간 것이다.
식사 전과 후, 식사중에 두레퓌스 사건에 대해 이야기 하다가 식탁을 엎고 싸움을 하고 있는 모습을 풍자한 삽화
그러나 문서를 조작한 앙리 중령이 자살하며 사건은 반전을 맞는다. 1899년 고등법원이 재심 진행을 결정하고 6월 10일에 드레퓌스는 유배지인 악마섬을 떠나게 된다. 1904년에 재심 청구, 1906년에 대법원에서 드레퓌스에게 무죄가 선고되었다. 군에 복귀해서 드레퓌스는 최고의 훈장까지 받았지만 사건의 충격으로 그는 평생 마음의 상처를 지고 살아가게 된다.
1898년 1월 13일자 에밀졸라가 기고한 '나는 고발한다 '
에듀아르 마네, 에밀졸라의 초상, 캔버스에 유채,147*114cm, 1868, 오르세 미술관
묻힐뻔한 사건을 프랑스와 국제 사회에 알린 사람이 있다. 프랑스의 대문호 에밀 졸라이다. 그는1898년 1월 13일 신문 『로로르』(L'Aurore, 여명)에 〈나는 고발한!〉'(J'accuse!)'라는 제목으로 드레퓌스의 결백을 주장하며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 편지를 신문에 기고했다.
"대통령 각하. 바로 이렇게 해서 오판이 저질러졌습니다. 게다가 드레퓌스의 도덕성, 부유한 환경, 범죄 동기의 부재, 끝없는 무죄의 뫼침은 그가 뒤파티 드클랑 소령의 기발한 상상력, 그를 둘러싼 종교적, 환경, 우리 시대의 불명예인'더러운 유태인' 사냥 등이 희생자였음을 더울 확신하게 합니다... 저는 그토록 큰 고통을 겪은 인류, 바야흐로 행복 추구의 권리를 지닌 인류의 이름으로 오직 하나의 열정, 즉 진실의 빛에 대한 열정을 간직하고 있을 뿐입니다. 저의 불타는 항의는 저의 영혼의 이침일 뿐입니다. "
신문이 공개되자 반 드레퓌스파는 졸라의 기사를 길거리에서 불태우기도 하고 군주을 선동하여 유대인에게 테러를 가하기도 했다. 일상속에서 드레퓌스의 사건에 대한 말다툼과 주먹다짐은 예사였다.
파장이 증폭되자 프랑스 군부는 에밀졸라가 군법회의를 중상 모략했다는 이유로 징역 1년을 선고했다. 대부분의 언론들은 반 유대주의 감정을 드레퓌스에 대한 폭언을 일삼았다.
앙드 드 그루 작 '분노에 찬 군중들에 둘러싸인 졸라'(1898년)
정신적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여 그는 영국으로 망명했다가 1899년에 다시 귀국해 사건이 종식 될 때까지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전에 지식인은 단순하게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엘리트 계층으로 사회에서 대접을 받는 존재였으나, 에밀졸라의 주장과 양심있는 지식인들의 정의로운 주장으로 지식인의 이미지가 변했다. 즉 지식인은 사회를 올바른 방향으로 개선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며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제적으로는 시오니즘 운동이 일어났다.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건국해야 한다는 운동이다. 유대계 오스트리아 언론인 테오도르 헤르츨은 이 운동을 주장하여 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제 1차 시오니스트 대회가 개최되었고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되기에 이른다.
드레퓌스의 유죄를 주장하는 세력은 로마 카톨릭 교회와 군부, 보수 언론이었고, 무죄를 주장한 그룹은 개신교, 지식인, 소수의 언론이었다. 이 두 그룹이 갈려 프랑스 사회의 대립이 극에 달했다. 사건이 연상되는 헨리크 입센의 연극 〈민중의 적〉(En folkefiende)이 공연 할 때는 관객들의 난투극을 벌일 정도였고, 가족들은 밥상에서 이 문제에 대해 토론을 벌이다가 밥상이 엎어지는 일들이 다반사였다.
그러나 드레퓌스가 외딴 섬에서 죽음을 맞지 않고 진실에 의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사회에 살아있는 소수의 양심세력과 깨어있는 언론, 시대에 올바른 가치를 일깨우는 종교가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12년에 걸친 이 사건을 겪으며 보수세력과 진보세력의 끝없는 투쟁을 지켜봐야 했다. 또한 유대인이라는 다른 존재에 대한 인정과 다양성의 포용력을 얻을 수 있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대통령의 탄핵에 대한 입장으로 온 나라가 뒤죽박죽이다.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이 일어날 때와 비슷한 양상으로 가고 있다. 6.25전쟁으로 불과 70여 년 전에 서로 죽이고 죽이는 참상이 일어났는데, 좌파 우파 여전히 우리는 서로 갈등하며 끝모를 갈라치기로 서로를 원망하고 있다. 진정으로 우리에게 양심시스템이 가동한다면 우리의 혼란도 금방 복원되지 않을까? 드레퓌스 사건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교훈이다.
[저항하는 예술 20] 130년 전 프랑스에서 일어난 사건, 우리나라와 똑 같다. 드레퓌스 사건 < 문화일반 < 문화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