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기고 싶은 이야기 ③] 바보 화가 한인현

by 데일리아트

3, 조국에서 부르는 디아스포라 칸타타(diaspora cant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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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2월 15일에서 24일까지 함흥시 흥남항에서의 열흘간의 구출 대작전, 일명 크리스마스 카고 작전(Operation Christmas Cargo)이 벌어졌다. 유엔군은 작전 보고서에 'Hungnam Redeployment'라고 쓰여있는 이 철수 작전은 작전 마지막 날인 크리스마스이브에 큰 피해 없이 성공적으로 완료되어 크리스마스의 기적(Miracle of Christmas)이라고도 불린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시가 불리해지자 미국 10군단과 대한민국 1군단이 함흥시 흥남항에서 대규모 흥남 철수작전(Hungnam evacuation)을 펼친 것이다. 12월 4일에 대한민국 국군이 평양을 포기하고 철수하면서 12월 6일에 북한이 평양을 수복하였고 유엔 사령부는 1950년 12월 8일 흥남 철수 지시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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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미국 국방성에서 비밀 해제된 흥남철수 당시의 보고서와 10군단 사령부와 유엔군 사령부 간의 무선통신 전문 등의 문서를 보면 1950년 12월 8일부터 "북한 피란민들을 구출하라"는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의 명령이 하달되어 있었다. 자신의 10배에 달하는 중국인민지원군 12만 명의 포위를 뚫고 12월 15일 흥남에 도착한 미국 제1해병사단. 이들과 함께 시작된 흥남 철수 작전은 12월 24일 메러디스 빅토리호와 온양호가 흥남부두를 떠나면서 임무를 완수하였다.


이날, 선적했던 무기를 전부 배에서 내린 뒤 피난민 1만 4천여 명을 태운 레너드 라루(Leonard P. LaRue) 선장의 결단은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가장 많은 인명을 구조한 배로 기네스북에 등재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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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주미술학교를 갓 졸업한 스무 살 청년 한인현도 12월 20일 LST(전차상륙함;Landing Ship Tank)를 타고 흥남을 탈출하여 거제도 장승포에 도착했다. 당시 일본에서 대학을 나온 아버지는 누구보다도 그 시기의 시류를 읽을 수 있는 영민한 사람이었지만 그의 책임감은 조상을 두고 고향을 떠날 수 없게 하였던 모양이다. 아니 귀한 장남을 안전하게 대피시키고자 그를 홀로 배에 태웠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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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현의 증언에 따르면, 흥남 탈출 전 자신과 같은 젊은이들은 반공호에 숨어있었고 어머니들이 몰래 음식을 가져다주었다고 한다. 그는 <행상>이라는 고등어를 담은 소쿠리를 머리에 인 여인의 그림을 몇 점 그렸는데, 이 그림 속에서 소쿠리에 음식을 숨겨와 전해주던 어머니를 두려움 속에서 기다리던 자신을 기억해내곤 한다고 했다.


사회주의가 싫어 자유를 찾아 월남한 그였지만, 반공호에서 보았던 어머니 얼굴이 마지막이 될 것이라는 작정은 애초에 없었던 일이다. 남하하여 바로 6‧25전쟁에 참전 지원한 것도 승전하여 가족을 만나 함께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쟁 중인 대한민국은 그의 순진한 조바심과 사명감을 있는 그대로 봐주지 않았다. 모두 회피하는 입대를 자원한 그는 북에서 왔으므로 간첩일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거제 포로수용소에서 겪은 모진 고문은 그에게 평생의 트라우마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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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그림에는 쪽 달 아래 웅크리고 있는 그가 혼자 혹은 여럿이 자주 등장한다. 자유를 찾아온 거제도는, 아니 대한민국은 그렇게 어린 청년이 내민 손을 짓밟고 그의 믿음은 내팽겨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을 기다리는 동생들과 가족을 외면할 수 없었다. 지옥과 같은 고문과 취조 속에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여 마침내 풀려난 그는 종군기자로, 그리고 그림 그리는 병사로 입대하여 당당히 활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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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언젠가 해주미술학교 졸업 전시에서 김일성이 두 점의 그림을 구매하였는데 그중 하나가 선생님의 작품이었다고 하던데요? 하고 말을 꺼냈었다. 화백은 그렇다고 들은 적은 있다며 씁쓸한 얼굴을 보였다. 사회주의를 피해 도망 온 그에게 북한의 국가 원수가 대수일까. 나의 가벼움이 부끄러웠다. 한인현은 1950년 6‧25 전쟁 때 대한민국을 선택한 난민이었다.


대한민국은 그에게 법적으로 대한민국 국민의 모든 자격을 주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그를, 다는 믿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었다. 북에 가족이 있는, 북에서 공부한, 북한 출신이라는 꼬리표는 그를 부당하게 검열하고 사회에서, 학계에서 소외시켰다. 한 민족이며 한 국가이던 우리는 이념으로 둘로 쪼개지고 1953년 이후로, 하나도 둘도 아닌 나라. 휴전국이 되었다. 이 서러움은 하나의 언어를 쓰며 하나의 역사와 문화 안에 있는 우리가 내 나라 안에서 난민이 되고 정당하게 받아들여지지 못하게 하였다. 결국 그들이 하나의 *디아스포라diaspora가 되도록 몰아갔다.


마을에서 한달음 달려가면 바다였습니다. 아무것에도 오염되지 않은 모래밭이 하염없이 이어졌고 그곳의 여기저기에서 등이 후끈거리도록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조개를 줍고 게를 잡기도 했습니다. 학교 공부는 뒷전에 두고, 노을 지는 바닷가에 나가 모래밭을 뛰어다니며 시를 이야기하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중략.....,....


이 세 친구들이 나와 함께 세상을 떠날 수 있다면, 다음 세상에서도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 친구가 되어 흥남 바닷가에서 뛰어놀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나는 가끔 화폭 앞에 앉아서 그 시절의 일들과 그 시절의 이야기들을 꿈꾸듯 그립니다. 그리기는 하지만 이미 꿈이 된 시절의 일이지요.”


(<화가 한인현의 행복한 그림일기 꿈 ; 한인현> 중에서)


그가 그리움에 게워내는 고향은 이제 남아있지 않다. 해가 지도록 맘껏 뛰어놀던 흥남 바닷가에서 홀로 군함을 타고 영영 이별도 해야 했고 부모님 품에 돌아갈 일도 아마 없을 것이다. 거제도 장승포에서 도착하며 기대했던 희망은, 결국 조국에 따뜻하게 안기지 못한 90대 주변인으로 저물어 간다. 그의 그림들은 그럼에도 지켜왔던 삶 속의 의리, 사랑, 기다림, 회한, 억울함, 고뇌이다. 이 모두를 기록하려 죽도록 노력했던 화가 한인현의 서러운 디아스포라 칸타타(diaspora cantata)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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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diaspora는 그리스어 dia(너머) + sperien(씨뿌리다)에서 유래한다. 기원전 3세기에 성서에 처음 등장한 후 팔레스타인을 떠나 망명생활을 하는 유대인을 대문자를 써 Diaspora라 줄곧 칭하던 용어이다. 디아스포라에는 희생자VICTIM 디아스포라, 노동LABOUR 디아스포라, 제국IMPERIAL 디아스포라, 무역TRADE 디아스포라, 탈영토화DETERRITORIALIZED 디아스포라 등이 있으며 전통적 유대 디아스포라 이외의 의미로 일반적으로 소문자 diaspora를 사용한다. 1990년대부터 활발해진 디아스포라 연구는 이 단어의 영역을 무한 확장하고 있으며 학자마다 다양한 정의를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는 ‘국외로 추방되거나 떠나게 된 소수집단 공동체’라고 하는 윌리엄 사프란 William Safran의 정의를 참고로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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