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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일리아트 Jul 24. 2024

문화재를 지킨 간송 전형필 선생

논평

20대의 간송 전형필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이 사람이 없었으면 우리나라 역사가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게 되는 사람이 있다. 역사에서 '만일'은 의미가 없다고 하지만 만일 이순신 장군이 없었다면 우리나라는 임진왜란에서 일본에 패하여 조선 이후의 역사는 없어졌을 것이다. 정말로 끔찍한 일이다. 만일 세종대왕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한문만을 사용하는 중국 문화권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갈수록 우리 문화의 가치가 치솟는 시대에 이 사람이 없었다면 수많은 국보급 문화재를 구경도 못했을 것이다. 겸재 정선의 수많은 작품도,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도, 고려청자의 우수성도 이 사람이 없었다면 몰랐을 것이다. 문화계의 거목, 일제하에서 문화재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독립운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고마운 사람, 간송 전형필 선생이다. 그를 모르면 우리나라 문화의 한 축을 모르는 것이다. 간송미술관 재개관으로 그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청자운학문매병(국보 제68호)

간송 전형필은 1906년 종로 이현(현 종로4가)에서 10만 석 지기 아버지 전영기와 밀양 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 후 작은아버지에게 입양되었다. 작은아버지 집에 입양되어서도 그는 생부 밑에서 자랐다. 작은아버지는 자신의 사후 제사를 지내줄 봉사손이 필요했던 것이다. 생부와 양부가 모두 사망하자, 두 부친이 소유한 어마어마한 재산의 소유자가 되었다. 그가  많은 문화재를 사들이게 된 것은 이렇게 두 아버지를 통해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은 덕분이다. 어의공립보통학교(현 효제초등학교)와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간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나라 잃은 백성을 도와주는 변호사가 되고자 일본 와세대  법학부를 진학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평생의 스승 오세창을 만나면서 그의 삶은 180도 바뀐다. 오세창이 누구인가. 역관 오경석이 그의 조부이다. 오경석은 조선 후기 우리나라에 수많은 문물을 소개한 역관이다. 손자 오세창은 기미년 독립만세운동 시에 33인의 한 분으로서 독립운동에도 앞장선 사람이다. 그뿐 아니라 뛰어난 문화재 감식안으로 일제 강점기에 우리 문화에 대한 우수성을 간직하고 전파한 사람이다. 할아버지 오경석이 많은 서양의 문물을 중국을 통해 들어오도록 한 개화 지식인이라면 손자 오세창은 우리의 문화의 우수성을 간직하고 보급한 분이다. 그는 방학을 맞아 서울에 온 간송에게 다음과 같이 간곡하게 얘기 했다.



"우리 조선은 꼭 독립되네. 동서고금에 문화 수준이 높은 나라가 낮은 나라에 영원히 합병된 역사는 없고, 그것이 바로 '문화의 힘'이지. 그렇기 때문에 일제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우리의 문화 유적을 자기네 나라로 가져가려고 하는 것일세."



문화재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던 전형필을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갖게 한 순간이다. 오세창은 평생 간송을 지도하는 스승이 되었다. 오세창이 지은 '근역화휘'와 '근역서화징'은 당시 이곳저곳에 산재한 미술품과 많은 문화재를 엮은 책이다. 당시로서는 유일하게 우리 미술사를 엮은 서화집이다. 간송은 오세창이 건네준 이 책을 보면서 열심히 공부했다. 문화재에 대한 안목과 감식안을 키운뒤 본격적으로 우리 문화재를 수집하기 시작한다. 그가 제일 처음 수집한 것은 겸재 정선의 '인곡유거'이다. 인왕산 계곡에 인곡정사를 짓고 유유자적하며 살았던 정선의 말년 작품이다. 


간송이 처음 구입한 것으로 알려진 겸재 정선의 '인곡유거'

그는 본격적으로 일본인의 손으로 들어가는 문화재를 구하기 시작했다. 고서화 수집의 전진 기지로 인사동에 한남서림을 인수하고, 본격적으로 일본으로 팔려 나가는, 지금으로서는 값을 매길 수도 없는 수많은 우리의 국보급 문화재를 인수했다. 고려청자, 조선백자, 탑과 부도, 금동여래입상 등이다. 고려청자의 대표 격인 '청자상감포류수금문정병(국보 제66호)', '청자상감운학문매병(국보 제68호)', '청자모자원숭이모양연적(국보 제270호)' 등은 모두 전형필이 지켜낸 문화재들이다.


청자모자원숭이모양 연적(국보 제270호)

일제 강점기 문화재가 있을 법한 무덤들은 일본의 도굴꾼들에 의해 마구잡이로 파헤쳐지고 있었다. 특히 고려시대의 부장품인 청자가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고종에게 갖다준 고려청자를 보고 이것이 어느 나라 것이냐고 물었다는 문화재의 개념조차 없던 시절이다. 고려의 수도 개경의 무덤들은 탐침봉으로 쑤셔대는 일본 도굴꾼들에 의해 벌칩처럼 구멍이 무수했다. 지금 우리나라에 소장된 고려청자의 수가  일본에 더 많다고 얘기하는 것을 보면, 일제 강점기 얼마나 많은 청자가 일본에 불법적으로 반출되었는지 알 수 있다.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은 강화도에서 도굴된 것으로 추정된다. 높이 42cm, 밑지름 약 16.5cm의 완벽한 비례를 가진 이 아름다운 문화재는 69마리의 학이 구름 위에서 노니는 모습을 한 가장 독보적인 고려청자이다. 도굴꾼은 천 원, 당시의 잘 지은 집 한 채 값이던 금액으로 이것을 일본인 골동품상에게 넘겼다. 조선총독부는 여러 번의 손바뀜으로 값이 불어난 이 청자를 만 원에 팔 것을 제안했다. 전형필은 이것을 2만원에 사서 무분별하게 밀반출되는 우리 문화재를 지켜냈다.



서울의 숭례문 국보 1호가 위협받고 '훈민정음해례본'을 우리나라 국보 1호로 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온다. 그것을 지켜낸 사람도 간송 선생이다. 1943년 6월 '훈민정음해례본' 원본이 발견 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판매자는 천 원을 불렀지만 귀한 물건은 제값을 주고 사야 한다고 집 열 채 값인 만원을 주고 사들였다. 그리고 천 원을 수고비로 주었다. 그는 제값을 주고 사와야 다음 번에도 좋은 물건을 살 수 있다는 생각으로 문화재를 사들이는 데 돈을 아끼지 않았다. 한국전쟁 때는 자신이 구입한 훈민정음 해례본이 소실될까 봐 몸에 두르고 다녔다. 기와집 400채 값으로 영국인 존 개츠비에게 고려 청자와 조선 청화 백자 여러 점을 사온 사람. 이미 일본으로 넘어간 혜원 신윤복의 혜원 전신첩을 찾아 오기도 한 전형필 선생이 없었다면 우리는 많은 국보급 문화재를 일본에 건너가서 구경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문화재의 소실 위기는 일제 강점기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950년 6.25 전쟁 때이다. 북한군이 쳐 내려와 모두 떠났으나  간송은 문화재를 지키느라 피난을 가지 못했다. 북한군은 간송에게 국보급 문화재를 포장하라 했다. 북으로 가져가려고 한것이다. 그는 포장한 뒤로도 뭔가 잘못됐다고 하며 포장한 것을 다시 재포장하는 방법으로  시간을 끌며 국보급 문화재를 지켰다. 



우여곡절 끝에 모은 문화재를 모아 1938년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미술관을 개관했다. 설립 초기의 이름 보화각이다. 보화각은 '빛나는 보석을 모아둔 집'이라는 뜻으로 오세창이 지어줬다. 간송미술관으로 이름을 바꾼 이 건물은  1년 7개월의 리모델링 끝에 이번에 재개관한다. 너무나도 반갑고 고마운 일이다. 우리나라의 문화재를 지켜내신  전형필 선생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재개관한 간송미술관을 독자 여러분들도 둘러보기를 권한다.



https://www.d-art.co.kr/news/articleView.html?idxno=5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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