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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여성 미술가의 자화상 ①]

by 데일리아트

'자화상'은 화가가 자기 자신을 그린 초상화다. 자화상은 작가의 자의식 없이는 그려지지 않는 장르다. 자의식에는 개별적 특성도 있지만 사회적 인식도 반영되어 있다. 서양 미술사에서 19세기는 여성에게 공적인 미술 교육이 처음 제공되면서 여성 미술가가 늘고, 그들이 아마추어에서 전문 화가로 변모한 시기다. 남성 화가의 그림 속에서 전형적으로 대상화되어 왔던 여성은, 이제 표현 주체가 되어 자신들의 자화상에서 타자의 미술로서의 여성 이미지를 극복하고 자신의 의식과 사회의 변화를 드러낸다. 자화상에 드러난 미술가의 자기 인식은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공동체적 언어라 할 수 있는 시대 정신을 반영한다. 이 글에서는 19세기 여성 미술가의 자화상에 시대 정신(근대성)이 어떻게 드러나 있는가를 살펴보려고 한다. 이해의 편의를 위해 먼저 시대적 배경을 개관해 보자.


18세기 유럽에서는 자연을 탐구하는 과학적 사고와 함께 계몽주의가 확산되었다. 계몽주의는 인간 이성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과학적 방법을 적용함으로써 절대군주제, 교권주의 등의 봉건 체제를 탈피하고 자연 세계와 인간 사회의 진보를 이룰 수 있다고 보는 합리주의 운동이었다. 이에 따라 18세기 중반에는 교양 문화의 확산으로 여성의 본성과 권리, 역할에 대한 저술이 다수 출간되었다. 장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7-1778)는 인간의 참된 본성 회복을 위해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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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의『에밀, 또는 교육론(Emile, or On Education』(1762) 표지 /출처: 교보문고 홈페이지. 인간을 인간답게 기르라는 루소의 자연주의 교육관을 주인공 에밀의 성장 과정에 반영한 소설 형식의 교육서


그러나 그는 남성이 지성적 능력을 갖추었다면 여성은 감각과 직관이 있다고 하여, 여성을 남성의 보완적 존재로 보았다. 이에 따라 예술 교육이 숙녀의 필수 교육과정으로 추가되었으나 남성 영역을 넘볼 수 있을 정도의 전문 기량을 다루지는 않았다.


계몽주의는 사회 개혁, 진보, 합리와 이성을 주창했으나 여성에게도 남성과 동등한 기회를 부여하지는 않았다. 18세기 회화에는 '행복한 어머니상'을 보여주는 그림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계몽주의자들이 봉건적 가족 의식을 탈피하고자 제시한 근대적 가족 제도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여성을 가정 내의 어머니, 아내라는 수동적 역할에 머물게 하는, 젠더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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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댕, 식전 기도(The Prayer before the Meal), 1740, 캔버스에 유화, 38.4×49.5cm, 에르미타주미술관(Hermitage Museum)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기의 외교관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Baldassare Castiglione, 1478-1529)가 궁정 신하의 덕목과 매너를 다룬 책 『궁정인(Cortegiano)』(1528)을 저술한 이후, 명문가 여성이라면 노래, 춤, 드로잉, 악기 연주 등 교양으로서의 예술이 권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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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로, 카스틸리오네의 초상(Portrait of Baldassare Castiglione), 1516, 캔버스에 유화, 82×67cm, 루브르뮤지엄(Louvre Museum)


이러한 경향은 18세기 말에는 중산층으로 확산되고, 숙녀 화가(lady painter, 아마추어 여성 화가)가 증가했다. 19세기에는 유럽 전역에서 소녀들이 교양으로 드로잉과 회화를 배우게 되었다.


마침내 19세기 후반에는 여성이 미술 교육을 받을 제도적 기회가 제공되기 시작했으나 그 양상은 국가별로 상이했다. 영국의 아카데미는 1860년대 초부터 교육을 제공했으나 1893년까지 실물 모델 수업을 허용하지 않았다. 프랑스의 사립 미술학교인 아카데미 줄리앙은 1870년대부터 여성의 입학을 허용했으나 국립학교인 에콜 데 보자르는 1897년이 되어서야 허용하게 되었다.


지속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직업적 예술 활동은 차별을 받거나 부자연스러운 일로 간주되었다. 누드화가 금지되는 등 장르 제한이 있었고, 아카데미 회원 가입도 대부분 허용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 화가 안나 스타이너 니텔(Anna Stainer-Knittel, 1841-1915)은 1859년에 뮌헨미술아카데미에서 공부를 시작했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본교에 다닐 수가 없었다. 미국 화가 엘렌 데이 헤일(Ellen Day Hale, 1855-1940)은 1882년에, 스위스 화가 루이즈 브레스라우(Louise Breslau, 1856-1927)는 1876년에 파리로 갔으나 에콜 데 보자르에서 여성을 받지 않아 사립학교인 아카데미 줄리앙에 다녀야 했다. 사립 미술학교에서는 여성이 남성보다 더 많은 수업료를 지불해야 했다. 여성들은 전문적 경력을 가질 가능성이 없고 단지 여가를 위한 교육을 추구한다는 것이 그 근거였다.


그러나 교육 기회가 증가함에 따라 여성도 화가라는 직업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고, 아마추어 화가 전성기가 끝나고 전문 화가가 증가했다. 19세기에 자화상을 그린 여성 미술가들을 살펴보면, 그들은 대부분 지명도나 성공 여부에 관계없이 활동 기간 동안 유럽 지역의 미술 아카데미, 사립 미술학교, 개인 교습 등을 통해 미술 교육을 집중적으로 받고 전시 활동을 하면서 예술적 역량을 길렀다. 또한 작품을 공개적으로 전시하고 수상함으로써 남성 미술가들과 경쟁했다.


봉건 체제를 부정하는 계몽주의가 영향력을 떨치면서 미술 분야에도 전통적 미술과는 다른 양식이 요구되었다. 더구나 19세기 중반에는 사진이 발명됨으로써 초상화 시장을 점유해 버렸다. 완벽한 재현을 실현한 사진의 등장으로, 고전 시기 이래 미술의 중요한 목적이었던 자연의 모방은 더 이상 추구할 수 없는 가치가 되었다. 미술은 자율적으로 존재 의미를 증명해야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19세기를 ‘이즘(ism)의 시대’라 부를 정도로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 인상주의, 후기인상주의 등의 다양한 유파가 나타난 배경에는 이러한 미술의 현실이 있었다.


그러나 여성 미술가들에게는 19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미술 교육이 열렸으므로 이러한 양식 변화를 바로 따라잡지 못하고 기존의 미술 표현 양식에 머물렀던 측면이 있다. 그러나 여성성에 대한 당대의 압력이 줄고 개인을 중시하는 근대의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관심에 따라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는 특성도 보인다. 이러한 근대적 자아 인식은 자의식의 발현인 자화상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보수 사회에서 요구하던 전통적 여성성 표현, 이를테면 몸을 비틀지 않고 팔꿈치를 몸에 바짝 붙인 근엄한 표정과 단정한 몸가짐은 남성적, 양성적 묘사로 바뀌고, 아마추어 화가라는 모호한 전문성은 직업적 정체성을 명확히 하는 표현이 대신하게 되었다. 사회적 시선을 의식하는 묘사는 자기 자신을 중심에 놓고 성찰하는 표현으로 달라졌다.


위키미디어 커먼스(Wikimedia Commons)를 검색하면 여성 미술가의 자화상으로 알려진 작품의 수가 16세기에는 15점, 17세기에는 35점, 18세기에는 98점, 19세기에는 180점으로 나타난다. 근대로 오면서 자화상의 수가 증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세기 작품은 180점 중 1800~1850년까지 56점, 1851~1900년까지 124점이 확인된다. 미술학교가 여성에게 개방되어 교육이 활성화된 이후인 19세기 후반 이후 더 많은 자화상이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표현하는 자화상의 증가는 여성 미술가들에게 수용된 근대적 사고를 의미한다.


근대 세계는 전통적 권위의 틀이 무너지면서 주체적 시민과 개인의 사고를 중시하는 가치관으로 변모하는 시기였다. 권위가 무너지는 사회 환경 속에서 여성 미술가도 자신의 정체성과 개인을 자각하는 근대성을 지니게 되었음을 근대 이전과 근대 시기의 두 자화상을 비교하면서 확인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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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비니아 폰타나, 자화상(Self-portrait at the Clavichord with a Servant), 1577, 캔버스에 유화, 27×24cm, 우피치갤러리(Galleria degli Uffiz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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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 메이블 트레버, 자화상(Self-portrait), 캔버스에 유화, 66×55cm, 1890년경, 아일랜드국립미술관(National Gallery of Ireland)


16세기는 여성 미술가 자화상의 서막이 열리는 시대였다. 미술가의 기량과 함께 여성에 대한 사회적 기준을 충족시키도록 표현된 인물은 음악적 재능을 과시하며 위엄 있고 정숙한 숙녀로 표현된다. 미술가의 자화상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이젤에서 작업 중인 자화상 형식은 많지 않았다. 유명한 여성 미술가 라비니아 폰타나(Lavinia Fontana, 1552-1615)는 나이 든 하인과 이젤을 배경으로 클라비코드를 연주하는 자화상을 그려 자신의 젊음과 미모에, 음악성을 포함한 예술적 재능을 과시했다. 반면, 19세기 아일랜드 화가 헬렌 메이블 트레버(Helen Mabel Trevor, 1831-1900)는 작업복 차림에 팔레트를 든 나이 든 모습을 자화상으로 남겼다. 미술 외적 재능이나 외모에 대한 자부심이 자화상에서 더 이상 주요 표현 내용이 되지 않는 시간이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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