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오발탄 포스터
영화에서 말하려는 것은 무엇일까
영화는 시종일관 엄마의 단말마 '가자!'로 현실을 환기 시킨다. 북으로 가자는 외침. 자유를 찾아 남한으로 왔지만 아무런 희망도 제시하지 못하는 사회, 정말 죽도록 일하지만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는 현실에 저항이다. 경찰서에 잡힌 동생을 면회하고 집으로 돌아오지만 철호에게는 더 어려운 상황에 맞닥 뜨린다.
만삭의 아내가 아이를 낳기 위해 병원에 갔다는 말을 듣고 집을 나설 때, 여동생 명숙은 그동안 모아둔 돈을 오빠에게 건넨다. 이 돈을 받아야 할까? 명숙은 그동안 미군들에게 몸을 판 댓가의 돈을 차곡차곡 모아둔 것이다. 돈을 받는 오빠의 맘도 착찹하다. 그러나 여러가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병원으로 향한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병원은 서울대학병원이다. 지금은 서울대학병원에 서민은 갈 엄두도 못낸다. 어렵게 가더라도 수술일정을 잡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그러나 1960년대 초에는 송철호네 같은 서민도 더러 이용한 모양이다. 서울대병원 49호실, 병실에 아내가 없다. 아내는 아이를 낳다가 죽은 것이다. 어쩌면 영화는 이 가정을 이토록 무참하게 짓밟을까?
이 장면을 보니 불현듯 현진건의 소설 <운수좋은 날>이 떠오른다. 인력거꾼 김첨지는 아픈 자신을 위해 하루 일을 쉬라는 아내의 말을 뒤로하고 일을 나간다. 비오는 날이라서 그런지 운수좋게도 사람들이 인력거를 많이 타서 돈이 벌린다. 서둘러 집을 가려고 값을 두 배로 불러도 인력거를 타려는 손님들이 계속 몰린다. 아내가 좋아하는 설렁탕을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가지만 아내는 이미 싸늘한 시체가 되었다. 젖먹이 아들은 죽은 아내의 젖을 빨며 큰 소리로 울고 있다. 이런 광경속에서 김첨지는 오열하고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하며 탄식 한다. 송철호는 치통을 참아가며 죽어라 일을 하지만, 병원에서 아내가 죽어 간다는 것이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과 오버랩되는 부분이다.
좌)영호의 전우들, 우상) 영호와 철호의 아내(문정숙 분) 딸, 우하) 치통에 시달리는 철호
그러나 <운수 좋은 날>에서 김첨지는 '왠지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하면서 오열하지만 <오발탄>의 송철호는 아내의 주검을 확인하고도 무표정하다. 울지도 않고 슬퍼하지도 않는 모습이다. 그는 집으로 돌아 가는 대신 치과로 향한다. 그동안 돈이 없어서 앓던 이를 빼지 못한 철호는 치과에 들려 썩은 사랑니를 뺀다. 남은 이도 더 빼달라고 하지만 의사는 만류한다. 결국 다른 치과에 가서 남은 이를 뺀다. 그리고 고통 속에서 신음한다. 자학이다. 이 장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소설 속 이 장면은 이렇게 기술되어있다.
"의사가 집게에 뽑아 든 이를 철호의 눈 앞에 가져다 보여 주었다. 속이 시꺼멓게 썩은 징그러운 이뿌리에 뻘건 살점이 묻어 나왔다."
숨겨진 고통을 밖으로 드러내는 행위로 보면 어떨까? 자기의 속을 시꺼멓게 만든 현실을 뽑는 행위? 동생의 은행강도, 아내의 죽음 등으로 엉망인 현실을 자신의 발치를 통해 벗어나고 싶어하는 철호의 마음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을까? 영화에서는 이빨을 뽑고 더 빼달라는 요구를 거절당하자, 다른 치과에서 남은 이를 뽑고 설렁탕 집으로 향하는 장면이 나온다.
마침내 철호는 택시를 탔다. 자신의 집 해방촌으로 가자고 하다가 이내 동생이 갖혀있는 중부경찰서로, 또다시 아내가 죽어있는 서울대학 병원으로 가자고한다. 그리고도 내리지 못하고 어머니에게 들었던 '가자! 가!'를 외친다. 운전사는 투덜거린다.
"제기랄 어쩌다 오발탄 같은 손님이 걸렸어, 자기 갈 곳도 모르고..." 여기서 오발탄은 잘 못발사한 탄환이 아니라 목적지 없는 탄환, 갈래야 아무데도 갈 곳 없는 목적지를 잃은 탄환과 같은 존재를 말한다.
철호의 마지막 대사가 마음을 울린다.
"오발탄? 아들구실, 남편구실, 애비구실, 형구실, 오빠구실, 구실이 너무 많다. 난 니말대로 조물주의 오발탄인지 모르겠다. 어딘지 가긴 가야할텐데...가자!"
영화속 시대읽기
영화 속 송철호가 무거운 걸음으로 해방촌의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자신의 집으로 걸어가는 송철호의 모습. 아이들은 왼쪽편에서 모여 놀고 있다. 1961년 영화이니 이 아이들이 살아있다면 벌써 70세는 되었겠다. 남산 밑자락 해방촌에 지어진 집들은 나무와 거적으로 지은 판자집들이다. 당시 서울에서 흔하게 보는 풍경이다. 철호가 가는 길 방향 정면 우물 곁에서는 청년으로 보이는 사람이 머리를 감고 있다. 철호의 집은 이곳에서 더 올라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다.
서울이 내려다 보이는 곳. 해방촌
해방촌은 행정구역상 용산동2가와 후암동 고지대 동네 일부 지역을 지칭한다. 일제강점기 당시에 조선신궁의 일부와 일본군 제20사단의 사격장으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해방이 되니 조선신궁도 불타 없어졌고, 사격장은 텅 빈 공간이 되었다. 갈 곳 없는 월남민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그래서 해방을 맞아 형성된 동네라 하여 '해방촌'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자유를 찾아 남하한 사람들이 꾸역꾸역 서울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모두 어디로 갈 것인가? 주로 동대문 밖 청계천 천변이나 해방촌 같은 비어있는 공간으로 몰려들었다.
핫플레이스로만 기억하는 요즘 세대는 최초의 '~리단'으로 불리던 경리단 길 후면이 해방촌라고 생각하면 된다. 영화는 1960년대 서울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감독 유현목이 네오리얼리즘을 영화에서 추구한 까닭이다. 영화에서의 동네 모습은 공동화장실이 등장하고, 집들이 언덕 빼기에 지어져서 사다리를 타고 찾아가는 모습이다.
이 곳에서 바라보는 광경을 그림으로 남긴 화가 박득순의 그림을 보자. 화면의 각도로 보아서 박득순은 남산에서 시내를 굽어보며 그렸다. 영화의 장면은 남산 아래 해방촌에서 시내를 바라본 모습이다. 박득순이 그릴때는 해방 이후 1949년,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이다. 영화는 1961년의 서울모습이니 15년의 차이가 난다. 영화 속 서울 경관과 박득순의 시내 풍경을 비교해 보자.
해방촌에서 바라다 보이는 시내와 백악산의 모습, 시내가 가깝게 보인다.철호는 집 앞의 언덕에서 시내를 바라다 보고 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박득순,,1949,캔버스에 유채,98*162cm, 출처: 서울시립미술관. 남산에서 바라 보이는 시내와 백악산 모습. 박득순은 남산에서 서울을 그린 것이고, 영화는 남산 아래 해방촌에서 전경을 보는 장면이다. 그림에서의 모습이 더 큰 화각이다.
두 그림을 비교해 보면 멀리 백악산이 보이고, 그 너머에 보현봉의 장쾌한 모습이 보인다. 영화의 장면 속에서는 백악산이 왼쪽에 많이 치우쳐 있다. 그림 속에서의 백악산은 중앙에서 왼쪽으로 약간 비켜선 모습이다. 그림 속 중앙청이 백악산 아래에 보인다. 그림 속 죄측 길게 올라간 건물이 지금의 서울시의회 청사, 그 오른쪽에 서울시청도 보인다. 영화 속 장면에는 이와 같은 것들이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림의 화각이 훨씬 더 넓다. 남산 아래 해방촌이 시내와 더 가깝기 때문이다.
실직한 사람들의 모습
전쟁 이후의 모습을 문학과 영화로 표현한 것이 소설과 영화<오발탄>이라고 한다면, 그 시절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들이 국민화가 박수근의 작품들이다. '인간의 선함과 착함'을 그리고자 했던 박수근은 시대의 어두움을 두꺼운 물감으로 덫칠했다. 물감으로 어두움을 걸르고 걸러, 힘겨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악하지 않고 아주 선하게 화폭에 담았다. 같은 시대를 어쩌면 이렇게 다르게 표현한 것인지 영화와 그림은 너무도 대비가 된다.
<빨래터>와 <노상>의 모습은 청계천변에 몰린 실향민들의 소소한 일상을 무덤덤하게 그렸다. 전쟁의 상흔으로 악 밖에 남지 않았을 터인데 박수근의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선한 모습이다. 그러나 길에서 남쳐나는 실직자들의 모습은 그도 피해가지 못했다.
실직, 1960년 박수근 작품
그의 작품 <실직>을 보면 두 사람이 등장한다. 한 사람은 길에 널브러져 있고, 다른 양복을 입은 한 사람은 정면을 응시한다. 길에 누워있는 사람은 구직을 포기하고 낮술을 한 잔 걸치고 될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길 바닥에 누워 있는 듯하다. 그러나 앉아있는 사람은 이력서를 들고 구직을하다가 낙방한 사람처럼 멍하니 먼 산을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아래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은 지게꾼이다. 직업이 없이 가장 손쉽게 하는 일이 지게꾼이었다. 지게하나만 메고 나오면 그걸로 그만이다. 찾는 손님이 없자 지게에 몸을 기대어 한 잠 휴식을 취한다. 실직한 사람이나 지게에 몸을 의탁한 사람이나 처지는 똑 같다. 이들에게 운수 좋은날은 오지 않을 것인가.
영화를 제작한 1960년 무렵의 서울 풍속도이다. 박수근이 그린 동대문 근처 창신동 실직자의 모습과 용산 해방촌의 지게꾼과는 어찌 이리도 닯았는지. 영화속 장면은 영호가 은행강도를 할 무렵에 비춰진 은행 밖의 모습이다. 실직자도, 지게꾼도, 은행강도도 모두 시대의 부평초이다.
1961년 작 오발탄에 나오는 지게꾼 모습, 거리에 실직자가 넘쳐나는 시기이다.영화에서 영호는 은행을 털려고 하고 있고 밖에는 일이 없는 지게꾼이 낮잠을 자고 있다.
복개 전 청계천의 모습
설희를 통해서 구한 권총으로 상업은행 남대문 지점에 권총 강도를 벌여 돈다발을 가지고 나오지만, 그는 경찰에 의해 쫒기는 신세가 되었다. 그가 도망가는 곳은 복개하기 전의 청계천이다. 복개하기 전 청계천의 실물을 보기 어려운데 이 영화에서 등장한다.
복개되기전 청계천, 한 여인이 아기를 업은 채로 목을 매달아 죽은 모습, 영호는 은행에서 강탈한 돈다발을 들고 청계천을 지나고 있다.
일제 강점기부터 논의된 청계천 복개공사는 1958년부터 시작되었다. 1962년까지 오간수문까지 복개되었다. 영화는 1961년 개봉되었으니 촬영 당시에 청계천은 복개공사하기 전이다. 충격적인 것은 영호의 추격 장면에서 등장하는 목을 멘 여인의 모습이다. 그런데 더 애처로운 것은 엄마의 포대기에서 울고 있는 아기이다. 엄마가 죽은 줄도 모르고 아가는 젖을 달라고 운다. 이 영화는 일제강점기였던 시절, 소설가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과 많은 부분에서 오버랩된다. 오발탄이 운수좋은 날의 영화 버전같은 느낌이다. 일제 강점기와 전쟁, 그리고 그 이후, 우리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들은 엄혹한 시절을 이렇게 살아왔다.
오리온 제과
영화에서 철길이 등장한다. 소위 말하는 땡땡거리이다. 철길 건널목을 땡땡거리며 기차가 지나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서울에는 이런 철길 건널목이 몇 군데 있다. 서소문앞에 있는 '서소문 건널목'과 용산 '백빈 건널목'이다. 이곳에 등장하는 오리온드롭프스라는 간판이 이채롭다. 일제 강점기 용산 일대는 대표적 일본인 거주지였고 '모토마치'로 불렸던 원효로는 당시 교통의 요충지이며 일본군의 주둔지였다. 이곳에 군용 납품 일본 제과회사들이 문을 열었다. 이곳에 1934년 유일하게 한국인이 경영하던 '풍국제과'가 있었고, 이를 인수하여 1956년 7월 동양제과공업(주)가 등장한다. 제과 시장은 해태 50%, 동양 30%, 롯데 20%였다. 그중 가장 오랜 시간 한자리를 지켰던 오리온 제과의 최초 본사 건물이 영화에서 또렷이 잡힌다. 최무룡이 군대에서 알게된 여군 장교 설희를 우연히 만나는 장면에 등장한다. 철길로 열차는 달리는데 차단기는 내려가 있고, 맘 급한 최무룡은 여군장교 설희를 만나기 위해 차단기를 올리고 달려가 해후한다. 이후 두 삶은 사랑이 깊어가지만 설희는 한 청년에 의해서 4층에서 떨어져 죽고, 설희가 가지고 있던 권총은 영호의 은행을 털때 사용된다.
현재 용산의 오리온 제과가 당시에도 있었다. 오리온 드롭프스 라는 상표가 이채롭다. 영화에서 영호(최무룡이 설희를 우연히 만나 집으로 가는 모습)
지금 용산의 백빈 건널목에 가면 위의 영화속 풍경을 바로 접할 수 있다. 아니면 서소문 건널목을 가더라도 같은 느낌이다. 영호는 전쟁시절 간호장교였던 설희를 이 건널목에서 만났다.
오발탄의 영화사적 의미
2024년은 유현목감독이 태어난지 100년이 된 해이다. 2024년 '한국영화 100선'에서 4위를 차지한 오발탄은 60년이 훌쩍 지난 영화임에도 여전히 예술성과 시대성을 인정받고 있다. 영화는 1960년에 완성되었으나 상영이 보류되어 이듬해에 상영되었다.
이유는 어머니의 대사중 '가자!'에 있다. 북으로 가자고 하는 것이 아닌가하여 반공법 위반으로 1년 이상 상영이 보류되었기 때문이다. 이범선이 쓴 소설의 원작이 워낙 우수해서 촬영감독인 김성찬은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서라도 촬영을 감행했다. 그래도 재정이 부족해서 배우들이 출연료를 받지 않았고, 영화 관계자들은 집안의 금부치를 들고와 제작비에 보탤 정도였다. 스텝과 배우들의 열성으로 제작된 영화이다.
영화는 전쟁의 상흔이 가시지 않은 현실을 가감없이 재현해서 유현목감독의 천재성이 돋보인다. 우리나라 영화 리얼리즘의 전형으로 평가 받고 있다.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서울의 모습은 리얼리즘의 명성에 맞게 그 시절의 풍경을 그대로 보여준다. 명동의 서울 거리와 양공주들, 넘쳐나는 상이군인들의 모습이다. 오발탄이 사영된지 60년이 훌쩍 넘었다. 우리는 지금 올바른 목적지 보고 나아가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