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정년퇴직을 한 지 5개월째 접어들고 있음에도 아직도 버리지 못한 습관이 있다. 아니 꼭 회사 생활을 해서 몸에 밴 습관이라고 할 수 도 없는 개인적 행동 양태일 수도 있다.
시간에 대한 규칙이다. 아침 5시 반에는 반드시 일어나야 하고 약속 시간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맞춰야 하며 전철이 플랫폼에 들어오는 것이 먼 발치에서 보이면 무조건 뛰어야 한다. 늦는다는 것, 뒤처지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평생 몸과 마음을 지배하고 있어서인 듯하다.
시간을 지킨다는 것을 사회 생활을 하고,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존재하는 구성원으로서의 위치를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우선조건으로 여긴 탓이기도 하다. 시간은 약속이기에 그렇다. 사물과 사물 사이의 관계에 의해 만들어지는 순서이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 형성되는 신뢰의 가치가 숫자로 형상화된 것이 시간이다. 그래서 철저히 시간의 숫자 속에서 살게 된다. 지키지 않으면 사회에서 도태되는 것처럼 불안이 엄습해,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휴일 아침에 더 일찍 눈이 떠졌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던 것이, 정년퇴직을 하고 시간에 쫓기지 않아도 되는 현실과 마주함에도 자동반응으로 움직이고 있는 시간들을 보며 흠칫 놀란다. 이제는 그만 일찍 눈뜨지 않아도 되고, 출근하기 위해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데 눈꺼풀은 아직도 5시 반에 자동인형처럼 반응한다. 눈이 떠지면 서서히 맑아져 오는 정신을 지켜보며 기지개를 켜고 몸도 움직여야 할 것 같은 사명감이 밀려온다. 그 순간 순간을 지켜본다. 일어나지 말아야지를 되뇌며 가만히 누워 몸에 족쇄를 채워본다. 그래도 한 번 뜬 눈은 스스로 감기지 않는다.
휴대폰 한 달 약속 일정이 빼곡했던 시간들이 지나고 이제는 듬성듬성 약속 시간들이 적혀 있음에도 그 시간들은 반복해서 머릿속으로 파고든다. 마치 절대 잊지 말아야 할 언약처럼 말이다.
점심식사 한 끼 같이 하자는 작은 약속일지라도 시간을 지킨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고 일상적인 일이다. 하지만 타인과 연결된 시간이 아닌 나만의 시간 속에서도 쫓기듯 가고 있는 나를 지켜보게 된다. 지금 반드시 뛰어가야 할 필요가 없음에도 자동반사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뛰어가고 있는 것이다. 뛰지 않으면 불안함을 아직도 놓지 못하고 있다. 이제는 시간을 놔줄 만도 하다. 아니 이제는 놔줘야 한다. 그런데 이게 잘 안 된다.
그래서 최근에 잡아두고 천착하는 게 '시간에 관용을 허하는 일'이다. 시간에 대한 관용은, 운전을 할 때 특히 확연히 드러난다. 약속 장소로 갈 때는 시간이 정해진 관계로 맞춰 간다. 약속 시간 전에 내비게이션을 켜서 예상 도착 시간을 검색해 본다. 그리고 막힐 것에 대비하여 20~30분 전에는 출발을 하여 만일의 지체에 대비를 한다. 여기까지는 예전의 루틴을 지켜나간다. 사람을 만나는 약속이 시간에 대한 신뢰이기에 그렇다.
하지만 약속된 점심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서둘러 돌아와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오로지 집으로 오면 되는 것이기에, 그리고 집에 와서 특별히 해야 할 일이 없기에 차가 막혀도 상관없다. 차 막힌다고 신경질 낼 필요도 없으며 옆 차가 차선에 갑자기 끼어든다고 안 비켜줄 이유도 없다. 끼어들면 끼어드는 대로, 막히면 막히는 대로 그저 천천히 여유롭게 오면 된다. 막히면 음악도 듣고 휴대폰과 연결해 유튜브 강의 하나 들으면 된다. 도로 위에서 서둘러봐야 20~30분 차이임을 경험치로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학교 앞 30km의 과속카메라에 찍힐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 사회적 시간에 따라 움직이면 된다.
서두르지 않아도 되고 천천히 가도 됨을 이제야 알았다. 그렇지만 시간에 관용을 허하는 일이 원초적 동물의 시간으로 회귀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기도 한다. 자연의 시간에 순응한다는 것은 뭔가? 먹고 자고 싸고의 생물학적 시간에 몸을 맞추는 일이 아닌가? 시계를 볼 필요가 없이 창 밖이 밝으면 낮이고, 어두우면 밤인 시간의 구분만으로도 살아내는 데 전혀 지장을 받지 않는다. 인간의 시간이 아닌 동물의 시간이다. 나이 든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시간에서 동물의 시간으로 돌아가는 과정이다.
또한 시간의 흐름을 재촉하지 않고 거스르지 않으며 현재 이 순간에 머물러 있는 것은 미래에 대한 구상을 놓아버려서일 수도 있다. 재촉하지 않는 것은 반드시 해야 할 것이 없다는 뜻이다. 지금 이 순간이 한가하다는 것은 지금 해야 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시간에 관용을 허하되 알차게 쓰는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여유가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간을 쓸 줄 알는 지혜가 필요하다.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들은 다르지만 각자는 알고 있다. 존재로서의 모래시계를 얼마나 지나왔고 얼마가 남아있는지 말이다. 알아야 자유로울 수 있다. 알면서도 잘 안 되는 것이 시간으로부터 탈출할 자유이지만 이 조절판을 잘 움직여야 함은 자명하다. 시간의 노예가 되지 말고 시간의 지배자가 되어야 한다.
"지금 몇 시야? 이런, 늦었네! 점심식사 약속 있어 나가야 하는데!"
[일상의 리흘라] 시간의 노예가 아닌 지배자로 사는 법 < 일상의 리흘라 < 칼럼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