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스틸리오네의 『궁정인 Cortegiano』(1528) 저술 이후 여성에게 요구되던 음악, 미술 등의 예술적 교양은 16세기부터 자화상으로 자주 그려지기 시작했는데, 주로 음악적 재능을 드러내는 그림이 자주 나타났다. 19세기에도 이러한 경향은 이전 시기처럼 빈번하지는 않으나 간혹 나타난다. 이를테면 미국 화가인 루신다 오레어(Lucinda Redmon Orear, 1823-1852)는 피아노 앞에 앉아서 연주하는 모습의 자화상을 그렸다.
루신다 오레어, 자화상(Self-portrait), 1835, 캔버스에 유채, 90.5×66.9cm, 세인트 루이스미술관(Saint Rouis Art Museum)
러시아 화가 마리 바시키르체프(Maria Konstantinovna Bashkirtseff, 1858-1884)는 캔버스 앞에서 작업 중인 자신의 도상 뒤에 하프를 놓음으로써 음악적 재능을 드러내고 있다. 그녀는 도회적 풍경을 객관적 시선으로 담아냈던 화가로, 1884년 파리의 살롱전에 전시되었던 <모임>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마리 바시키르체프, 팔레트를 든 자화상(Autoportrait à la palette), 1883, 캔버스에 유채, 192×73cm, 니스미술관(musée des Beaux-Arts de Nice)
마리 바시키르체프, 모임(Un Meeting), 1884, 캔버스에 유채, 195×177cm, 오르세미술관(Musée d'Orsay)
6명의 소년들이 둥글게 둘러서서 함께 뭔가를 바라보고 있는 <모임>에서, 소년들은 그들의 복장으로 미뤄 학생임을 알 수 있다. 1880년대 초는 쥘 페리(Jules Ferry) 법에 따라 프랑스에서 초등학교 의무교육이 실시되던 시기임을 감안하면 당시의 사회 변화를 나타내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와 같이 바시키르체프는 사실주의 화풍을 추구했던 화가였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시기 그녀의 자화상은 여성에게 오랫동안 사회가 요구해 온 통념을 뛰어넘기가 쉽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또한 18세기에는 여성을 아름답고 매력적인 인물이지만 남성의 경쟁 상대가 되지 않는 보완적 존재로 보는 계몽주의적 관점의 영향으로, 장식적 의상을 입고 미모를 갖춘 모습으로 자신을 미화하거나 여성성을 부각하는 자세의 자화상이 많이 나타난다. 프랑스 화가인 엘리자베스 비제 르브룅(Elizabeth Louise Vigée-Le Brun, 1755-1842)의 다수의 자화상이 좋은 예가 된다.
엘리자베스 비제 르브룅,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Self-portrait in a Straw Hat), 1782년경, 캔버스에 유채, 97.8×70.5cm, 런던 내셔널갤러리(The National Gallery)
엘리자베스 비제 르브룅, 딸 줄리와 함께 있는 자화상(Self-portrait with Her Daughter, Julie), 1789, 캔버스에 유채, 130×94cm, 루브르박물관(Louvre Museum)
그림 작업을 할 때조차도 모자를 쓰고 화려하게 성장한 모습으로 그리거나, 모성을 드러내는 행복한 모습으로 그린 자화상은 18세기 당시 사회가 요구하던 관습적 여성성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19세기에도 이렇게 여성적인 미를 드러내는 화가의 자화상이 일부 확인된다. 오스트리아 화가인 엘리자 라조네트 빌레즈(Eliza Ransonnet-Villez, 1843-1899)는 우피치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자화상에서 정교한 레이스의 의상, 턱에 댄 오른손, 꽃을 든 왼손 등으로 여성적 매력을 한껏 드러내고자 한다.
엘리자 라조네트 빌레즈, 자화상(Self-portrait), 19c, 캔버스에 유채, 74×59cm, 우피치갤러리(Uffizi Gallery)
영국 화가인 롤린다 샤플스(Rolinda Sharples, 1793–1838)는 흰 드레스를 입고 머리에 꽃장식을 한 채 미모를 자랑하는 표정으로 관람자를 쳐다보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등 뒤로는 피아노와 그 위에 놓인 악보가 보인다.
롤린다 샤플스, 화가의 초상(Portrait of the Artist), 1814, 브리스톨미술관(Bristol Museum & Art Gallery)
그러나 여성에게 가해지는 여성성의 압력은 19세기 들어 약화되는 것으로 보인다. 여성을 감성적 존재로 간주하고 전통적 여성상을 요구하는 사회적 통념을 어느 정도 벗어나, 주체적이고 비여성적 태도를 보이는 표현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자화상에 나타난 복장이나 자세, 인물의 시선 처리 등을 통해 이를 확인해 볼 수 있다.
오르탕스 오드부르 레스코(Hortense Haudebourt-Lescot, 1784-1845)는 프랑스의 성공한 초상화 및 풍속화 화가였다. 그녀는 1825년에 남성 초상화에 자신의 모습을 대입시켜 자화상을 그린 첫 여성 화가가 되었다. 이 자화상은 1편에서 제시한 바 있는 르네상스 화가 라파엘로의 <카스틸리오네의 초상>(1514-15)을 본보기로 하여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르탕스 오드부르 레스코, 자화상(Self-portrait), 1825, 캔버스에 유채, 74×60cm, 루브르박물관(Musée du Louvre)
그녀는 15세기 이래 화가의 상징물이 된 베레모를 쓰고 있다. 또한 금목걸이를 하고 있는데, 이는 전통적으로 통치자가 미술가에게 수여하는 명예이자 지위를 나타내는 표식이었다. 17세기의 여성 미술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도 긴 금목걸이를 늘어뜨리고 작품 제작에 몰두하는 자화상(1638-1639)을 그린 바 있다. 오드부르 레스코는 이렇게 남성 미술가의 전유물로 인식되던 복장을 하고 붓을 든 손을 조용히 모은 채, 빛 속에서 화가로서의 자부심과 예술적 능력을 드러내고 있다.
베다 슈티른샨츠(Beda Stjernschantz, 1867-1910)는 사실주의 양식으로 시작해서 상징주의로 선회한 핀란드 상징주의 운동의 선구적 화가다. 자화상에서 그녀는 검은 가운에 흰 리본, 간결한 머리 스타일을 한 채 비스듬히 서서 오른쪽으로 얼굴을 돌려 관람자를 쳐다보고 있다.
베다 슈티른샨츠, 자화상(Self-portrait), 1892, 캔버스에 유채, 46×32.5cm, 핀란드국립미술관(Finnish National Gallery)
이 작품은 인물의 성별이 모호하게 보인다. 아마도 슈티른샨츠는 자신을 남성적으로 그리려고 했다기보다는 자신의 자화상에서 여성이라는 성이 드러나게 하고 싶지 않았던 듯하다. 예술이 단순히 현실의 외형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이면의 영구적인 사상을 묘사해야 한다는 상징주의 예술 철학을 받아들인 그녀로서는, 자신의 여성성이 내면을 표현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다.
엘렌 데이 헤일(Ellen Day Hale, 1855-1940)은 미국의 인상파 화가다. 메리 커샛(Mary Cassatt), 세실리아 보(Cecilia Beaux), 엘리자베스 노스(Elizabeth Nourse), 엘리자베스 코핀(Elizabeth Coffin) 등과 함께 19세기 말에 활동한 성공적인 미국 여성 미술가로 꼽힌다. 1885년에 제작된 그녀의 자화상은 도발적 시선과 자세가 특징적인 작품이다.
엘렌 데이 헤일, 자화상(Self-portrait), 1885, 캔버스에 유채, 72.4×99.1cm, 보스턴미술관(Museum of Fine Arts, Boston)
19세기 말 미국에서는 여성들이 독립적이고 반항적인 행동으로 머리를 잘랐다. 이 작품에서도 그녀는 귀를 드러내는 짧은 머리를 하고 소년 같은 중성적 얼굴을 하고 있다. 단추와 모피 칼라가 있는 검은 옷을 입고 타조 깃털 부채를 든 채, 화가임을 나타내는 도구도 없이 턱을 들고 자신감 있게 관람자를 비스듬히 내려다보고 있다. 오른손을 의자 위에 올려서 구도의 전경에 배치함으로써 이 작품이 자신의 작업의 결과임을 암시하고 있다.
마리안네 폰 베레프킨(Marianne von Werefkin, 1860-1938)은 러시아 출신의 화가로 독일 표현주의의 선구자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1893년에 그린 <세일러복을 입은 자화상>은 그녀의 후기 작품에 비해 사실적이다.
마리안네 폰 베레프킨, 세일러복을 입은 자화상(Selbstbildnis in Matrosenbluse), 1893, 캔버스에 유채, 69×51cm, 아스코나시립현대미술관(Museo communale d'arte moderna, Ascona)
왼손을 허리춤에 얹고 가슴을 편 채 당당한 표정으로 얼굴을 정면으로 돌려 서 있는 그녀는 거침이 없어 보인다. 이러한 자세와 태도, 오른손에 든 긴 붓은 그녀가 독립적인 성격의 미술가임을 드러낸다.
이와 같이, 여성성을 강조하는 복장에 두 손을 앞으로 모으거나 팔꿈치가 몸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공손하게 시선을 처리하던 여성의 전통적 자화상 구성 방식은 19세기 들어 도전을 받다가 19세기 후반에는 낡은 전통이 되었다.
[19세기 여성 미술가의 자화상 ②] 관습과 통념에서 벗어나다 < 미술일반 < 미술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