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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시대 읽기 ⑤] 1950년대 춤바람

by 데일리아트

영화 자유부인을 통해 보는 1950년대 풍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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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포스터


정비석의 소설 <자유부인>은 1954년 1월 부터 8월까지 서울신문에 연재되었다. 이를 원작으로 한형모 감독이 1956년 영화 <자유부인>을 만들었다. 개봉일은 1956년 6월 9일, 개봉극장은 수도극장(2005년 철거된 충무로 스카라극장의 전신)이다. 지난 주에는 [영화로 시대 읽기- 자유부인1]을 소개했다. 오늘은 영화 〈자유부인〉 을 통해 그 당시의 시대상을 읽어보려고 한다. 간단하게 영화의 줄거리를 소개한다.


평범한 주부 오선영(김정림 분)의 남편은 대학교수 장태윤(박암 분)이다. 아들 하나를 둔 평범한 가정이다. 아내는 무료한 시간을 달랴기 위해 양품점에 나가 일하며, 여학교 동창 최윤주(노경희 분)를 만나 명사부인들 사교모임에 드나들며 호기심에서 춤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우연히 남편의 대학교 제자인 신춘호(이민 분)를 만나 마음이 끌린다. 그는 음악에도 조회가 깊고 춤도 잘 춘다. 선영의 남편 장교수는 타이피스트 박은미(양미희 분)를 만나 사원 강의를 부탁을 받고, 박은미의 외모와 젊음에 마음이 동하기 시작한다. 선영은 양품점에서 의외로 활약이 대단하다. 무역상인 백광진 사장(주선태 분)을 단골로 만들어 고가의 물건을 판다. 선영의 학교 동창 윤주는 백사장이 큰 돈을 만지게 해 준다는 말에 속아 사기를 당해 자살한다. 선영은 춤을 배우러 옆집 청년이자 남편의 제자인 춘호를 찾아 야릇한 춤의 세계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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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한 장면, 선영과 한 사장의 불륜 장면


선영은 양품점 주인 한사장에게 댄스파티에서 자신의 파트너가 되어 줄 것을 부탁한다. 한사장의 부인(고향미 분)은 장교수에게 익명으로 편지를 보내 부인 선영의 타락하는 과정을 수시로 알려준다. 댄스파티에 가지 않고 호텔로 발걸음을 한 선영과 한사장은 호텔에서 아슬아슬한 놀이에 빠져가지만, 한사장의 부인에게 모든 것이 발각된다. 낭패한 선영은 옆집 청년 춘호에게도 망신을 당하고 갈 곳이 없어 외톨이가 된다. 선영은 집으로 돌아가 남편과 아들에게 용서를 빌고 가정으로 복귀한다.

원작 소설 정비석의 자유부인,「자유부인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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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부인 단행본


영화의 원작이 되는 정비석의 소설 자유부인이 출간되고 큰 논쟁이 있었다. 당시 서울대 법대 교수로 재직 중이던 국내 최초의 법학박사 황산덕은 『대학신문』 1954년 3월 1일자에 「자유부인 작가에게 보내는 글」을 실었다. 그는 참다 못하여 붓을 들어 일면식도 없는 귀하에게 몇 마디를 올리겠다고 말 문을 연 뒤 ,


"귀하가 가슴에 손을 대고 양심껏 반성해 보시면 아실 것입니다마는 오늘날 우리나라의 대학교수는 다행히도 그렇게 부패하지는 않았습니다. 더구나 그 대학교수의 부인들은 봉건적 가정주부의 모습을 가장 많이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뜻있는 인사는 이런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중략)…배짱도 좋고 예술도 좋으나 귀하 개인의 자제의 장래의 교육만이라고 생각하시고, 수십만 중학생의 장차의 진학을 위해서라도 대학교수를 사회적으로 모욕하는 무의미한 소설만은 쓰지 말아 주시길 앙망(仰望)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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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에 연재된 자유부인 소설


이에 대해 정비석은 3월 11일 자『서울신문』에 최소한 반박을 하려면 소설의 내용은 읽어보고 반박하라며 「탈선적 시비를 박함 - 자유부인 비난문을 읽고 황산덕 교수에게 드리는 말」을 통해 반격에 나섰다.


'대학교수를 양공주에게 굴복시켰다고 개탄했는데 소설에는 양공주가 등장하지 않고, 미군부대에 영문 타이피스트로 다니는 박은미라는 여성을 가리켜 양공주라고 말한 것이라면 미군부대에 다니는 직업여성이 양공주인가?'라며 반문했다. '좀 더 냉정하고 학자적 태도로 작품을 봐 달라'고 공격 수위를 높였다. 그리고 글 말미에 나에게 한 “가슴에 손을 대고 양심껏 반성해보라”는 조언은 당신에게 해당한다고 썼다.


이에 대해 황교수는 재반론을 통해,


"문화의 적, 문학 파괴자, 중공군 50만 명에 해당하는 적"이라고 몰아 붙였다.


여기서 '이적'이라고 표현한 것은 북한에서 이 영화를 이용해 남한은 영화 자유부인의 내용처럼 속속들이 썩어가고 있다고 선전했기 때문이다. 즉 논쟁에 북한까지 가세한 것이다. 논란은 정계 재계의 비리를 폭로했다 해서 관련인사들이 ‘북괴의 사주를 받은 이적소설’이라고 당국에 투서하는 지경까지 확대됐고, 정비석은 치안국, 특무부대 등 고발과 투서가 들어간 곳마다 불려가 조사를 받아야 했다.


이 논쟁은 예술에 대한 윤리의 잣대를 어디에 맞춰야 할 것인가에 대한 것으로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논쟁은 소설에 관심이 없던 사람까지 신문 소설을 읽게해, 신문 부수가 3배까지 늘어나 서울신문은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소설 연재가 끝나자 신문부수는 무려 5만부가 절독될 정도였다. 단행본 발매 3일 만에 초판 매진, 총 7만부의 실적을 내어 당시로서는 우리나라 최대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런데 다른 문제가 튀어나왔다. 소설의 내용 중, '돈 오십환이 생기면 고려대생은 막걸리를 마시고, 연세대생은 구두를 닦고, 서울대생은 노트를 산다"부분이 나중에 문제가 되었다. 여자대학생들의 입장에서 보면 '연세대학생은 연애의 대상이요, 고려대학생은 결혼의 대상이요, 서울대학생은 동경의 대상이라는 것이다’는 내용이다. 이를 접한 연대생들이 정비석의 집에가서 항의 했다는 일화가 있다.


1950년대 춤바람과 「박인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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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신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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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에 선 박인수


우리나라에 서양 춤이 들어온 것은 대한제국 시대이지만, 본격적으로 사교춤이 상륙한 것은 미군정시대 부터이다. 미군들의 여가시간 유흥을 위해 들어온 사교댄스는 미국 문화에 대한 선망, 전후 불확실한 사회의 불안한 심리를 타고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마침내 전에는 생각할 수 없었던 소위말하는 「박인수 사건」이 터졌다.


박인수는 영화에서 등장하는 것과 같은 사교댄스를 활용하여 1954년 4월부터 1955년 6월까지 해군 헌병대위를 사칭하며 70여명의 여인을 농락했다. 그는 동국대 사학과 재학중 6.25 전쟁이 나자 참전, 해병대에서 헌병 부사관으로 근무하다가 예편했는데, 복무시절 애인이 소위 말하는 고무신을 거꾸로 신었다. 박인수를 배반하고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간 것이다. 이에 대한 복수심으로 장안의 인기있는 댄스홀을 돌며 여자들을 꼬셨다. 잘생긴 외모와 평균키보다 10cm이상 큰 키를 이용해서 여대생, 고위 관료와 국회의원의 딸 등 70명의 여성들을 농락했다. 그는 이것이 무슨 자랑인 양,자신과 사귄 여성 중에서 미용사였던 1명만이 처녀였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석에서는 우스개 소리로 '우리나라 처녀의 순결 확률이 70분의 1' 이라는 이야기가 회자 되었다.


1심에서 법정은 "법은 정숙한 여인의 건전하고 순결한 정조만 보호할 수 있다"고 하면서 혼인빙자감음죄에 대해서 무죄를 선고했으나, 2,3심에서는 1년의 징역형이 확정되었다. 영화에서의 춤바람은 그 당시의 풍속도와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소설의 연재는 1954년, 박인수 사건이 1955년에 발생하고, 영화는 1956년에 개봉되었으니, 1954년부터 1956년까지 전쟁의 상흔이 곳곳에 배인 우리 사회에 때 아닌 춤바람이 강하게 분 건이다. 소설 춤바람,영화 춤바람, 논쟁 춤바람에 문화계는 물론 정계, 법계 북한까지 모든 영역에서 강한 춤바람이 차고 넘쳤다.


사랑의 길 영성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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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대사관저와 덕수초등학교로 사이의 길을 사라으이 길이라고 불렀다.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 연인들이 헤어진다는 속설이 있다. 덕수궁 대한문에서 정동교회 쪽으로 가다보면 왼쪽 편에 법원 단지가 있었다. 그 중에는 가정법원도 있었다. 이혼하려는 사람들은 덕수궁 돌담길을 걸어 법원에 가서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고 나와서는 정동교회 앞에서 헤어져 각자 다른 길로 갔기 때문에 이런 속설이 생긴 것이다. 다른 하나는 덕수궁 돌담길을 걷다가 이화여학교 학생들은 오른쪽으로 가고 배재학교 학생들은 왼쪽으로 가서 이런 말이 생겼다고도 한다.


그런데 이 말과 무색하게 정동교회에서 미국대사관저를 지나 구세군회관, 덕수 초등학교로 가는 길은 참 호젓해서 예로부터 많은 커플들이 자주 찾는 길이 되었다. 이 길이 영화에서는 등장하지 않지만 정비석의 소설 「자유부인」에는 등장한다.


소설 원작에 “덕수궁 담 뒤 영성문 고개는 사랑의 언덕길 ”이란 대목이다. 이 길이 정말 사랑의 언덕길일까? 길 왼쪽에는 미대사관저가 있고, 오른쪽에는 덕수궁이 있다. 미 대사관저 이전 미국 공사관 시절부터 울창한 나무들이 담장 밖으로 뻗어 나갔다. 덕수궁도 돌담 담장 밖으로 울창한 나뭇가지가 뻗어나와 도로에는 자연적인 '나무 터널'이 형성되었다. 그래서 남의 이목을 꺼리는 연인들이 이곳을 자주 찾았다. 특히 불륜 커플들은 호젓하기도 한 길을 거닐면서 낭만과 더불어 사람의 눈길을 피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정비석은 소설에서 이길을 '사랑의 언덕길'이라고 했다.


그러면 이 길은 언제부터 생긴 것일까? 정동은 모두 덕수궁 권역이었다. 지금의 덕수궁과 비교할 바 아니다. 덕수궁이 대한제국 시기 법궁이었던 시절에 비하면 지금의 크기는 3분의 1에 불과하다. 1919년 3.1운동의 발화 요인이던 고종이 1월 21일 승하했다. 이를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는 덕수궁 영역을 축소하고 여기저기 도로를 내기 시작했다.


현재 빈터로 남아 있는 경기여고 자리에 있던 선원전을 헐고 가로질러 큰 길을 냈다. 이 자리에 있던 선원전은 역대왕의 어진을 봉안하는 곳인데, 이 곳에 있던 많은 전각을 매각했다. 현재의 신문로에서 선원전으로 들어가는 문이 덕수궁의 북쪽문인 영성문이다. 지금 덕수 초등학교 지나 왼쪽 공터에 있었다. 동쪽의 대한문이 덕수궁의 정문이고, 신문로 쪽에 연해 있던 영성문이 북쪽에 있었다. 그래서 소설 자유부인에서는 이 고개를 '영성문 고개'라 했다. 이 문과 가장 관계가 깊은 왕이 조선의 26대왕 고종이다. 고종은 아관파천 당시 경복궁을 나와 덕수궁 영역인 영성문을 통과해서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 것이다. 이 길을 지금은 '고종의 길'이라고 명명하지만, 정비석이 소설을 쓸 1950여 년 당시에는 이 길의 일부가 불륜 커플들의 '성지'가되어 '사랑의 길'이라고 한 것이다. 이런 논쟁을 생각하면서 영화를 다시 보자. 한국 영상자료원에서 복원한 탓에 영화는 무료 감상이다.

https://youtu.be/FkAbVQhfpmw

유튜브 출처: 한국고전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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