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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영의 영화 한 되] 미키17 - 봉준호는 왜

by 데일리아트

* 본 기사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 <미키17>과 에드워드 에슈턴의 소설 「미키7」, 「미키7: 반물질의 블루스」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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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17>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프로젝트였다. <기생충>으로 아카데미 4관왕을 수상한 봉준호 감독의 차기 프로젝트라는 점에서, 그가 원작 소설이 정식 출간되기도 전에 영화화 판권을 사들이고 제작에 착수했다는 점에서, 기대감은 그의 전작들 중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지금까지의 어느 한국 감독의 영화를 통틀어서도 최고로 높았다. 주연으로 로퍼트 패틴슨, 조연으로 나오미 스캇, 마크 러팔로, 스티븐 연 등의 캐스팅 소식이 들려오는 와중에, 제작사인 워너 브라더스와 봉 감독의 불화설, 몇 번의 개봉일 변경까지 불안과 기대 사이를 오가는 뉴스들이 터져 나왔고, 공식 예고편은 공개되자마자 수백만의 조회수를 기록했다.


2월 28일, 세계 최초로 <미키17>은 한국에서 극장 개봉을 맞았다. 나도 당일에 극장으로 향했다. 평일 이른 오전 상영 회차인데도 380석 규모의 영화관엔 빈 자리를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잠시의 기다림. 그리고 마침내, 얼음에 뒤덮인 미키 반즈의 얼굴이 스크린을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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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진해진 작가주의 성향


할리우드 자본을 입고 더욱 신나게 춤을 춘 봉준호.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가장 먼저 메모장에 적었던 생각이다. 단편 <백색인>을 데뷔작으로 본다면 30여 년, 장편 <플란다스의 개>를 데뷔작으로 본다면 25년. 봉준호 감독의 데뷔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이다. 이제 봉준호라는 이름은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영화에 전혀 관심이 없다고 해도 한국인이 아는 이름이 됐다.


<기생충>의 대대적인 성공 이후 <기생충> 자체의 분석을 포함, 이전 작품들과의 연관성까지 모두 찾아내 그의 작품 세계와 연출적 특징을 파헤친 글과 영상이 쏟아졌다. 그 특징들 중에서도 이번 <미키17>에서 더욱 두드러진 두 가지 특징인 계급 투쟁, 블랙 코미디, 봉 감독의 이전 작품에서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미키17>에서는 매우 눈에 띄는 특징인 사랑을 원작 소설과 영화 속 설정의 차이를 비교해 보며 감독의 의도까지 함께 읽어보는 시간을 가져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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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17


영화 개봉 전부터 눈에 띈 원작과 가장 큰 차이점은 제목이었다. 미키라는 이름 뒤에 붙은 원작보다 10이 더 큰 숫자. 안 그래도 불쌍한 미키를 열 번이나 더 죽인 봉감독이 가차 없다는 농담조의(하지만 뼈 있는) 댓글이 공식 예고편에서 가장 많은 공감을 얻었다.


왜 우리의 안 그래도 불쌍한 미키는 열 번을 더 죽어야 했을까? 왜 감독은 그를 열 번이나 더 죽였을까? 그 이유를 알려면 원작 소설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는 원작과 영화의 가장 큰 차이점인 동시에 소설이 영화화 됐을 때의 어쩔 수 없는 아쉬움을 동반한다.


<미키7>과 <미키17>의 미키는 둘 다 새로운 행성으로의 이주 시에 여러 위험 요소를 가장 먼저 파악하게 되는 '익스펜더블(expendable, 소모품)'이다. 그럴 듯하게 말했지만 더 노골적으로는 그냥 '실험용 쥐'다. 대기 중에 위험한 독성 물질은 없는지(물론 있었다), 이미 살고 있던 외계 생명체는 없는지(역시 있었다) 확인하기 위해 투입되는 쥐. 그리고 미키는 당연히 죽는다. 다만 바이오프린팅 기술로 기억만 옮겨 새로운 몸으로 다시 태어날 뿐.


이 지점에서 원작과 영화의 가장 큰 줄기가 다르게 뻗어나간다. 원작은 '테세우스의 배'로 대표되는 존재론적 질문, 계속 뽑혀 나오는 미키는 이전과 같은 미키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똑같이 생긴 미키가 둘이라면 둘 다 미키라고 할 수 있는가? 한 명의 인간이란 정의는 결국 어떻게 내릴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이 원작의 주제 의식이라면 봉준호 감독은 '익스펜더블'이라는 직업의 특성, 죽어도 되는 노동자에 더 초점을 맞췄다.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아무도 선뜻 나서서 하려 하지 않는 일을 하는데 누구보다 못한 대접을 받는 노동자. 그가 바라본 미키 반즈는 이렇다.


미키가 처한 이런 비극성은 그가 영화에서 열 번이나 더 죽으면서 심화된다. 사람들은 미키에게 묻는다.

죽는 건 어떤 기분이야?


정말 순수하게 죽음에 대한 호기심일 수도 있겠지만, 영화의 맥락을 살펴보면 이 질문은 "네가 항상 우리 대신 죽어서 정말 다행이야"의 방관과 안도를, "왜 네가 죽지 않은 거야?"의 원망과 질책을 포함한다.


물론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을 고려한 전략적인 선택이기도 했을 것이다. 미키를 더 죽이면 그의 몸이 바이오프린팅 되는 장면을 더 보여줄 수 있으니까. 실제로 그 덕에 소각로에 던져지는 미키, 가래떡처럼 뽑혀 나오는 미키를 우리는 더 만날 수 있다.


현재 공개된 인터뷰 영상에서는 성인으로 넘어가는 숫자라는 의미에서 7과 8을 17과 18로 바꿨다고 감독이 직접 언급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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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파


영화의 오리지널 캐릭터로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이 '마샬'의 부인 '일파'다. 그녀는 소스에 광적으로 집착하고 어딘가 많이 모자란 마샬을 옆에서 케어하는 인물로 나온다.


왜 감독은 일파라는 캐릭터를 굳이 새로 추가했을까? 원작의 마샬은 이성적이고 냉혹한 군인이다. 원작에서의 마샬과 미키의 갈등은 개인과 개인의 갈등이다. 하지만 이 단수 대 단수 의 구도가 복수 대 단수, 즉 마샬&일파 대 미키로 변한다면, 이는 곧 지배 계급 대 노동자라는 봉준호 감독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인 계급 갈등으로 층위가 변한다.


이 층위에서 바라보면 소스의 의미도 좀 더 명확해진다. 영화에서 소스를 만들 때 일파는 믹서기를 사용한다. 마구 갈린 원재료는 스테이크 위에 뿌려져 맛을 더한다. 새로운 행성에서 최대한 많은 인구가 살아남으려면 보급되는 칼로리의 제한이 매우 중요해서 우주선의 일반 승선원들은 음식 같지도 않은 음식을 먹지만 마샬과 일파는 스테이크를 썬다. 소스라는 사치까지 부려가면서. 소스는 이러한 지배 계급의 허영과 사치, 혹은 피지배 계급의 말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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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너파티씬


봉준호 감독의 블랙 코미디적 특징으로 비틀린 한바탕 왁자지껄을 들 수 있다. 여러 인물이 한 공간에서 뒤엉키며 예상치 못한 결과를 만들어내는데, <살인의 추억>의 논두렁 씬, <괴물>의 장례식장 씬, <기생충>의 '띵동' 전의 술자리 씬 등이다. 본 영화의 디너 파티 씬도 그 연장선상에 위치한다.


이전 영화들과의 차이점은 이번이 더 과장됐고, 더 비틀렸다는 것. 이번 왁자지껄은 할리우드 자본의 힘으로 정말 '때깔'이 다른 왁자지껄이지만, 마샬과 일파가 갑자기 노래를 부른다든지, 일파가 카펫에 구멍이 뚫리니까 안 된다며 미키를 총으로 쏘려는 마샬을 말린다든지 하는 장면은 영화보다 의도가 앞서서 영화의 밀도를 얕게 만든다.


그럼에도 분명 이 디너 파티 씬은 영화 전체에서 감독의 블랙 코미디적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장면으로 영화가 끝난 뒤에도 떠오르는 성취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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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사랑하시죠?


<미키17>에는 사랑이 있다. 그의 전작에 사랑이 전혀 없었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괴물>에서 강두가 현서를 찾으러 가는 것도 사랑이고, <마더>에서 도준이를 향한 엄마의 마음도 사랑이다. 다 어딘가 조금씩 어긋나거나 뒤틀려 있긴 하지만. 그런 의미에서 로맨스, 사랑 그 자체에 어울리는 사랑은 이번 미키와 나샤의 관계가 최초다.


왜 본 영화에는 사랑이 있을까? 미키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답이 나온다. 앞서 말했듯 미키의 존재론적 의문에 관해선, 영화에서는 원작에 비해 많이 옅어졌지만 자꾸만 죽고 새로 태어나는 미키의 입장에서 자아에 대한 혼란이 없을 수는 없다. 그의 옆에는 누군가 "넌 나에게만은 계속 원앤온리 미키 반즈야"라고 말해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런 보조 인물이 없다면 우리의 미키는 절대 이 일을 계속할 수 없겠지. 결국 나샤의 존재는, 나샤와 미키의 사랑은 이 세계관에서는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다.


각자의 미키17, 혹은 한 명의 미키 반즈


<미키17>은 분명 단점이 없는 영화는 아니다. 영화보다 감독의 의도가 앞서 보이기도 하고, 제작자의 입김이 들어간 PC 요소가 노골적이기도 하고, 원작을 재밌게 읽었다면 익스펜더블이라는 설정을 제외하곤 사실상 감독의 오리지널 창작물 같기도 하고, 1억 5천만 불이라는 적은(어디까지나 할리우드 입장에서) 제작비로는 SF적 공간을 충분히 보여주지 못해 이 점을 기대한 사람이라면 실망할 수도 있다. 원작에선 꽤 자주 나오는 통신기기를 이용하는 장면도 안 나오고(영화에선 시작부터 고장난다.) 반물질이라는 원작의 설정도 영화에선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 장점도 명확하다. 봉준호 감독의 팬이라면 그가 이 정도 규모의 영화에서 작가주의적 색채를 가감없이 발휘할 수 있는 위치에 올랐다는 게 뿌듯하면서 자랑스럽기도 할 것이다. 영화 내적으로도 죽음과 인간 윤리, 개인의 정체성과 노동, 계급의 문제 등 여러 측면에서 다양한 이야기들이 가능하다. 무엇보다 봉준호라는 이름 석 자의 영향력으로 이미 유튜브에는 영화에 대한 비하인드, 여러 디테일과 상징에 대한 해석 영상들이 올라오고 있는 중이다. 아직 해외 개봉 전이니 정식으로 해외 개봉을 하면 더욱 반응이 뜨거울 예정이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우리는 기꺼이 관람하고 반응을 지켜볼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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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는 이렇게 사랑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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