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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 밖으로 나온 악녀들 18] 영화 '박쥐'

by 데일리아트

나쁜 그녀들 세상을 매혹하다


어느 날 당신이 미지의 존재에 의해 초능력을 지닌 인물로 재탄생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요? 당신은 불멸의 생을 얻었습니다. 햇빛과 몇 가지 주의할 점만 피한다면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멸이란 축복만은 아닙니다. 당신은 음식 대신 피(특히 동족의 피)를 먹어야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 끔찍한 상황에 맞서려 하지만 꿀 냄새를 맡은 파리처럼 당신은 피에 대한 욕구를 피할 수 없습니다. 꿀단지에 빠진 파리가 되어 죄의식에 허우적대는 당신은 두 가지 선택을 해야 합니다. 욕망을 정당화할 근거를 만들거나, 욕망의 근원인 당신이란 존재를 없애거나. 당신은 이 도덕적 딜레마에 어떻게 맞서야 할까요?


많은 뱀파이어 영화의 주인공들 역시 비슷한 선택을 내립니다. ‘인간성’을 잃지 않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택할 뿐 아니라 자신의 동족마저 함께 데려가는 주인공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된 그들에게 ‘인간성’이란 무슨 의미일까요. 영화 ‘렛미인(2008)’의 주인공 이엘린은 사람을 살해해 피를 먹음으로써 새로운 삶에 적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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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로서의 정체성을 인정하되, 사람을 해치는 대신 편법을 택하는 주인공도 있습니다. 영화 ‘트와일라잇(2008)’에서 에드워드는 사람이 아닌 동물의 피를 흡혈합니다. 영화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에 나오는 루이(브래드 피트) 역시 동물의 피로 연명합니다. 그의 동료 레스타트(톰 크루즈)가 사람을 해치는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두 뱀파이어는 오랜 시간, 서로 반목합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박쥐(2009)’ 역시 서로 다른 윤리관 때문에 갈등하는 두 뱀파이어의 관계를 그립니다.


영화 ‘박쥐’는 욕망과 그 실현이란 간극에서 방황하는 인간을 그린 영화입니다. 기독교 윤리의 수호자이자 가부장제를 상징하는 상현(송강호)에 의해 욕망을 박탈당하는 태주(태주)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신부인 상현은 늘 갈등하는 존재입니다. 어떤 면에서 상현은 자신을 처벌하고자 하는 의지를 지닌 인물로 보입니다. 영화 초반에 나오는 그의 기도문은 신과 인간의 중개자 역할을 하는 성직자로서의 본분을 부정하며 자신을 죄인으로 규정합니다. 그리고 그의 기도문은 고스란히 현실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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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병원에서 근무하는 신부 상현은 죽어가는 환자 때문에 무력감을 느낍니다. 그는 해외에서 비밀리에 진행되는 전염병 백신 실험에 지원했다가 생존한 첫 번째 인물이 됩니다. 하지만 상현에게 피를 수혈한 미지의 존재는 누구였을까요? 상현은 온몸에 물집이 생기고, 피에 대한 갈망을 느낍니다. 햇볕에 노출되면 살이 타는 듯한 고통을 느낍니다. 마침내 그는 자신이 ‘다른’ 존재로 변화했음을 인정합니다. 그는 인간을 해치지 않기 위해 나름의 방법을 찾습니다. 의식이 없는 환자에게서 피를 공급받는 것입니다. 그는 뱀파이어가 된 이후에도 자기 존재의 정당성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며 인간 세계에 적응하려 애씁니다.


그는 우연히 만난 옛 친구 강우의 아내 태주에게 마음을 빼앗깁니다. 태주는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은 쳇바퀴 같은 삶에 갇혀있는 인물입니다. 고아였던 태주는 라 여사 집에서 더부살이하며 학대당합니다. 그녀가 복종할 상대는 라 여사에게서 라 여사의 아들인 강우에게로 옮겨 갔을 뿐입니다. 권태와 불만은 커져만 갑니다. 그녀의 억눌린 욕망은 어디로 분출될지 모를 활화산 같습니다. 몽유병을 핑계 삼아 맨발로 거리를 뛰는 것만이 그녀의 히스테리를 다스릴 유일한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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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현과 태주는 곧 서로의 몸을 탐닉합니다. 예전의 성직자 상현이라면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탈입니다. 그러나 상현의 몸을 흐르는 뱀파이어의 피는 그의 육체적 욕망을 증폭시킵니다. 마침내 상현은 성욕과 같은 인간적 욕망을 받아들이며 자신이 성직자임을 부정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상현은 여전히 인간을 살해하기를 거부하며 최소한의 ‘인간성’을 유지하려 애씁니다.


한편 태주는 뱀파이어인 상현을 이용해 자신이 처한 지옥 같은 현실을 빠져나가려 합니다. 태주는 상현에게 육체적으로 학대당한다는 핑계로 남편 강우를 살해할 것을 제안합니다. 상현과 강우, 태주는 밤낚시를 떠난 뒤, 강우를 물에 빠뜨려 살해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상치 못한 극심한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그들이 함께하는 침대에 강우의 환영이 함께 합니다. 상현은 라 여사에게 무례하게 구는 태주의 뺨을 때립니다. 종교가 만든 위계에 익숙한 상현에게 뱀파이어가 지닌 폭력성이 더해진 것일까요? 그때 태주가 한 말실수 때문에 상현은 강우가 태주에게 폭행하지 않았음을 알게 됩니다. (오히려 태주에게 물리적 폭력을 가한 쪽은 상현이지요)


극도로 예민해진 태주는 상현을 자신의 단란한 가정에 침입한 타자 취급합니다. 영화에서 내내 상현은 자신의 ‘타자성’을 인식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지독한 죄책감과 고통 속에 울부짖으며 태주는 자신을 죽여달라고 상현에게 부탁합니다. 상현은 태주를 죽이지만, 그녀를 그대로 떠나보낼 수는 없었습니다. 자신의 피를 먹여 태주를 뱀파이어로 되살립니다. “해피 버스데이, 태주 씨”라는 상현의 대사는 태주가 뱀파이어로서 다시 태어났음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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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직자로 오래 살아온 상현은 뱀파이어로서의 삶 속에서도 나름의 의미를 구현하려 애씁니다. 수혈을 자원하는 이들의 도움을 받아들입니다. 혹은 자살하려는 사람들의 커뮤니티를 통해 그들을 조력사(?)한 뒤, 그들의 피를 먹습니다. 그러나 갓 태어난 태주에게는 인간의 윤리와 도덕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그녀는 마치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그동안 억눌린 욕망을 보상이라도 하듯, 폭주합니다. 그녀로서는 살인이 선악의 문제가 아닌, 생존의 문제입니다. “닭을 사냥하는 여우가 왜 나빠?”라는 말로 태주는 살인을 정당화합니다.


영화 초반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던 태주에게는 생명력이 넘칩니다. 초인으로 거듭난 태주는 상현에게 골칫거리입니다. 집에 찾아온 지인들에게 라 여사는 눈을 깜빡거리는 방법으로 태주와 상현이 강우를 죽였음을 알립니다. 피의 살육극이 펼쳐집니다. 이때, 상현은 태주와 자신이 이미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음을 깨닫습니다. 단죄할 시간입니다.


상현은 살인 현장에서 도망쳐야 한다는 이유로 태주와 라 여사를 데리고 자동차로 떠납니다. 상현은 백신 실험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존재라는 이유로 자신을 신격화하는 사람들의 무리에 잠시 들립니다. 그는 일부러 한 여성을 강간하는 듯한 행동을 연출합니다. 그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등지고 떠나는 상현의 입꼬리가 들려있습니다. ‘머리에 종양이 든 환자처럼 올바른 지력을 갖지 못하게 하시고 영원히 순결에 바쳐진 부분을 능욕하여 어떤 자부심도 갖지 못하게 하시며 저를 치욕 속에 있게 하소서.’라는 그의 기도문이 실현되는 순간입니다. 그는 처음부터 신성(神性)과는 거리가 먼 나약한 인간에 불과했음을 알고 있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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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도착한 장소는 바닷가가 보이는 허허벌판입니다. 새벽이 밝아옵니다. 태주는 겁에 질립니다. 햇볕을 받으면 그들의 몸은 재가 되어버립니다. 트렁크에 들어가도 자동차 밑에 들어가도 소용없습니다. 상현은 트렁크 뚜껑을 뜯어 멀리 던지고 자동차를 옮겨 그녀를 햇빛에 노출되게 합니다. 마침내 태주는 죽음을 받아들입니다. 그녀는 예전에 상현이 벗어주었던 구두를 발에 신고 상현의 품에 안깁니다. “지옥에서 봐요, 태주 씨.”라는 상현의 말에 태주는 “죽으면 끝. 신부님 즐거웠어요.”라고 대답합니다. 태주는 타고난 유물론자이며 피안의 세계를 믿지 않습니다.


태주는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려고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 악녀입니다. 하지만 태주의 죄는 인간에서 벗어나 다른 존재가 된 자신을 받아들인 결과일 뿐입니다. 이미 인간이 아닌 태주에게 인간 세계의 도덕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갓 태어난 아이처럼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힘에 만족합니다. 그에 비해 상현은 뱀파이어가 된 이후에도 인간으로서의 고뇌를 멈추지 않습니다. ‘박쥐’를 감독한 박찬욱 감독은 ‘영화 속 상현은 자기 책임이 아닌데도 책임을 지려고 한다’라고 설명한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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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상현은 자기 책임을 넘어서 타인의 행위마저 죄로 규정하고 처단하는 독단적인 인물이기도 합니다. 태주에게서 다른 사람들을 보호하려는 의도였을까요? 탈주하는 여성의 욕망을 제동하는 성직자이자 가부장으로서의 역할 때문이었을까요? 상현은 라 여사가 그들이 불에 타 괴롭게 죽는 장면을 목격하게 합니다. 자신과 태주의 처참한 죽음을 직접 목격하게 함으로써 아들에 대한 복수를 마무리하려는 의도입니다. 이처럼 상현은 절대자, 신을 포함한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물입니다.


영화 ‘박쥐’는 2009년 제62회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해 심사위원상을 받았습니다. 박찬호 감독은 ‘박쥐’가 자신이 연출한 작품 중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든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박찬호 감독은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화를 만드는 행위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은 관객에게 질문하도록 하는 것인데 그 질문은 자극적이어야 한다. 질문이 자극적이지 않으면 근본적인 질문을 회피하려는 게 사람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의식이었다면 감독의 의도는 성공적이었습니다. 죄의식과 욕망이 빚어내는 불협화음에 대한 고민은 모든 사람이 살아가며 겪는 화두이니까요. 비록 몇몇 관객처럼 그 고민에 대한 감독의 화법에 불편함을 느끼는 이가 있더라도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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