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현 화백 결혼 사진
세상 풍파에 무너지지 말고 당신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리세요.
붓을 놓는 것은 백기를 드는 것과 같아요.
"그렇게 생각해서 행운을 잡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림을 포기하지 않고 사는 빈털터리 남자에게 연인이 생긴 것이었지요. 자취방 하나에 모은 돈도 없는 저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여자가 나타났으니 그 사람이 지금 저와 함께 해로하고 있는 상주환입니다." - ( 『화가 한인현의 행복한 그림일기 꿈; 한인현』 중)
화재로 9백80여 점의 그림을 잃고, 물난리로 다시 80여 점의 작품을 잃은 34살 화가는 지독한 형벌도 있구나 싶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한인현은 “다시 붓을 잡았고, 하루하루 밤을 새우다시피 하며 화폭을 채워갔다.
한인현 화백과 상주환 여사
아직도 그는, 그렇게 생각해서 당신 인생의 행운, 자취방 주인의 딸 상주환을 만났다고 생각한다. 물론 자취방에 자주 드나들던 친구 신형규가 그녀의 됨됨이를 보고 그들을 이어주려 물심양면으로 애쓴 것을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뽀얀 피부에 미남이었던 한인현은 꽤 인기남이었다. 하지만 원체 그림밖에 모르는 바보이기도 하거니와 통일이 되면 북에 두고 온 가족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그는 연애나 결혼은 생각도 해보지 못한 터였다.
얼마 전 필자는 상주환 여사에게 물었었다. 어떻게 한화백과 결혼할 결심을 하게 되었냐고. 먹고살기도 어려웠던 시절, 무명 화가를 평생의 반려자로 선택한 젊은 처녀의 용기가 새삼 궁금했다. 의외로 그녀의 대답은 빠르고도 명확했다. "눈빛, 그 총명하고 정직한 눈빛이면 뭐라도 해낼 사람이라 생각했지요."
천안의 유명한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나 자란 상주환 여사는 어쩌면 한인현 화백보다도 더 완고하고 강직한 사람이었다.
"제 아내 자랑을 또 한 번 하지요. 아내는 평생 약속을 어긴 적이 없습니다. (···) 게다가 돈이 부족해 세상 살기가 힘들다는 불평을 한 적도 없습니다. 말없이 응원하는 것도 참 힘든 일일 텐데, 그리고 싶은 그림 실컷 그리라고 응원해 주었을 뿐입니다."
그녀는 날마다 그를 위해 도시락을 싸주었고 퇴근해서 돌아오면 그림을 그리게 도와주었다. 그는 아내를 사랑했고, 사랑스런 아내를 위해 열심히 직장에 다니고, 또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아내는 그가 계속 화가일 수 있는 이유였다.
한인현 화백과 큰딸 소라
“아내는 늘 '세상 풍파에 무너지지 말고 당신이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리라. 붓을 놓는 것은 백기를 드는 것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아내를 자랑하면 팔불출이라고 하는데. 나는 아내 자랑을 할 자격이 있다고 믿습니다. 아내가 그렇게 격려해 주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이대로조차 존재하지 못할 게 너무나 뻔하기 때문입니다.”
아내는 남편의 밥만은 매끼 투가리밥을 내었다. 음식 솜씨조차 좋은 그녀는 어릴적 음식을 그리워하는 그를 위해 가자미식해를 만들기도 했다. 고문으로 평생 허리가 아픈 남편을 위해 강화도까지 다리품을 팔아 인삼을 구해 달이는 것도 그녀의 일상이었다. 한 화백은 커피물이나 담배 우린 물을 물감으로 자주 사용하였는데, 그날 그릴 그림의 커피물을 농도 맞추어 준비하는 것은 특히도 아내의 몫이었다. 그는 그 일만큼은 아내에게만 부탁했다.
아내가 매일 아침 그의 그림을 위해 준비해 주는 것이 그저 커피물이었을까. 고단한 화가의 길에, 세상 유일한 생명수가 아니었겠는가.
“아내에게 하고 싶은 말은 고생시켜서 미안하다는 것이 거의 전부입니다. 서른네 살의 노총각에게 시집온 이후 사십 년 가까이 무능한 남편을 뒷바라지해 왔으니 아무리 칭찬해도 모자람이 없는 일이죠. (···) 누구보다 성실하고 착한 아내를 보면서 나는 혼자 눈물짓고는 한 게 전부지요.” -
큰딸을 임신한 처, 1969, 연필, 21x31
그들은 오랫동안 부엌도 없는 곳에서 셋방살이를 했다. 겨울에는 추위에 떨고 여름에는 들이치는 빗줄기를 맞으며, 허당에서 지은 밥으로 끼니를 이으며 눈물겨운 생활을 했다. 그보다 더 그의 그림을 존중해 주고, 화가로서 가는 길을 힘들어할 때면 '소신대로 사는 당신이 가장 당신 답다'고 격려해 주는 아내는, 서로에게 믿음이었다. 아내는 한인현을 정말로 괜찮은 화가 남편으로 생각해 주었다. 두 딸을 낳고, 출가시키고, 손자 둘에 손녀 둘까지 생겼다.
어머니를 닮아,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하는 딸로, 할아버지를 존경하는 손주로 자라주었다. 불면 날아갈까 너무나 귀해 초등학교를 매일 등하교 시킨 할아버지에게 서울대 박사라는 기쁨도 안겨주었다.
외할머니 등에 업혀있는 영석, 2000, 색연필, 18x26
외손자 외손녀 영석과 서원, 2002, 색연필, 17.5x26.5
결혼 한 큰딸과 살림을 합쳐 지금껏 함께 살고있는 한인현은, 처음 걱정과 달리 그림을 절대 상하게 한 적이 없는 손자들을 신기해하곤 했다. 화실이 없는 화가에게는 할아버지의 작업을 훼방하지 않는 손자를 내는 것이 섭리인 모양이라고 한인현은 회고 했다.
필자가 투병 중인 한화백의 집을 방문했을 때 큰딸은 아버지가 걱정되어 1년 넘게 거실 쇼파에서 24시간 귀 기울여 대기하고 있었다. 지금 딸들은 매일, 손주들은 주말마다 병원으로 요양병원으로 출근한다. 아버지가 혹여 외로우실까봐 그런단다.
"화가 아버지를 둔 탓에 그리 행복한 시절을 보내지는 못했습니다. 무엇보다 용돈을 넉넉히 주지 못했고, 장난감 같은 것도 많이 못 사줬습니다. 그래도 나로서는 두 딸을 업고 걸리고 하면서 지낸 세월이 가장 행복했던 것 같은데, 아이들 입장에서는 예쁜 옷 입고 싶었을 테고 맛난 것 먹고 싶었을 것입니다. 주머니에 용돈이 있어 떡볶이집에 들어가고 싶을 때 선뜻 들어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못 해 주어서 그런지 큰딸을 시집보냈을 때 몹시 가슴이 아팠습니다."
천 원짜리 한 장을 주면 그걸 아끼고 아껴두었다가 나중에 아빠 생일 선물을 사오는 딸들에 대해 아빠는 많이 아팠다.
외손자 준석, 2000, 색연필, 23x34
차손자 오영석. 처음이자 마지막 가족여행 부산에서 먹은 게딱지에 그린 그림
2024년 겨울,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찾아간 응급실에서 한 화백을 만난 15분 내내 그가 반복한 말은 아내에게 고생만 시켜 미안하다는, 딸들에게 호강시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것이었다.
평생 돈이 없어 불편하다는 말 한마디 안하고 살아 온 아내와 여유가 되면 설악산도, 제주도도 가리라 마음먹었었지만, 코로나 시절 부산에 간 1박 2일 여행이 처음이자 마지막 가족 여행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삶을 통해 가족들에게 모두 전했고 그들은 모두 받았다.
"소라와 소영 두 딸이 정직하게 사는 모습, 명예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살아가는 모습이 중요하다고 여긴다면 나는 더 이상 바랄 게 없습니다. (중략) 화가 할아버지를 두어 할아버지 방에 마음대로 들락이지도 못하고, 이것저것 호기심 나는 물건들을 마음껏 가지고 놀지 못한 준석이에게 미안하고 고맙다는 얘길 전합니다."
"'당신, 사랑하오' 소리를 이 지면에서나마 하고 싶습니다."
[남기고 싶은 이야기 ⑥] 바보 화가 한인현 - 그리세요! 붓을 놓는 것은 백기를 드는 겁니다 < 인터뷰 < 뉴스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