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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 밖으로 나온 악녀들 19] 영화 '마더'

by 데일리아트

나쁜 그녀들 세상을 매혹하다


바람에 갈대가 흔들립니다. 그 갈대처럼, 초로의 여자가 흔들립니다. 꽃무늬 옷을 입은 그녀의 표정은 넋이 나간 듯합니다. 처연한 듯, 무심한 듯. 그녀의 몸짓은 말보다 많은 언어를 담고 있습니다. 롱테이크로 포착된 이 장면은 한국 영화 역사상 가장 강렬한 오프닝 중 하나로 꼽힙니다. 영화의 시작 몇 분은 그 영화가 말하려는 주제와 화법을 압축합니다. 이 그로테스크하고 압도적인 도입부는 영화가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잔상처럼 관객의 뇌리를 붙듭니다.


영화 <마더>는 살인 혐의를 뒤집어쓴 아들을 위해, 직접 범인을 찾아 나서는 엄마의 이야기입니다. 전통적인 스릴러 서사에서 사회적 약자는 자주 희생양이 되고, 누군가는 그를 구하기 위해 진실을 파헤칩니다. 결국 진실이 밝혀지고, 억울한 누명은 벗겨집니다. 그러나 그 과정엔 늘 반전이 기다립니다. 선이라 믿었던 존재가 실제로는 악이었다는, 서늘한 전복의 순간. <프라이멀 피어>의 에드워드 노튼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그렇다면 <마더> 역시 그런 반전 구조를 따르는 변주에 불과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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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는 단순한 스릴러가 아닙니다. 이 영화의 여정은 진실을 밝히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진실을 파헤친 끝에 남는 것은, 진실을 덮으려는 충동입니다. <프라이멀 피어>의 변호사는 일사부재리의 원칙과 직업윤리로 인해 진실을 감춥니다. <마더>에서 진실을 덮는 힘은 모성이라는 이름의 본능입니다. 그 본능은 절절하고 지독하며, 동시에 위험합니다. 봉준호 감독은 이 영화에서 모성애라는 이름 아래 정당화되는 폭력을, 담담하면서도 냉정하게 응시합니다.


영화는 작은 마을의 약재상에서 시작됩니다. 작두질을 하던 혜자(김혜자)의 손길이 불안합니다. 그녀의 시선은 작두날이 아닌, 길 건너 아들 도준(원빈)에게 가 있습니다. 순간, 질주하던 차량이 도준을 스치듯 지나갑니다. 피를 흘리는 건 도준이 아닙니다. 혜자입니다. 아들의 사고를 목격한 혜자의 손가락이 작두날에 베인 것입니다. 조금 모자란 아들에 대한 걱정은 그녀의 삶 전체를 핏빛으로 물들입니다. 그녀의 가슴에서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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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동네는 떠들썩합니다. 이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아주 오랜만의 살인 사건 때문입니다. 여고생의 시체가 낡은 폐가 옥상 난간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 전시 행위가 지닌 뜻은 무엇일까요? 나중에 도준의 친구 진태가 내뱉은 말이 의미심장합니다. “근데 왜 죽은 애를 옥상에 내놨을까? 그 옥상에서는 이 동네가 다 보여. 이 동네는 참 이상한 동네야. 그러니까 엄마는 말야. 아무도 믿어서는 안 돼. 나도 믿지 마. 알았어?” 작은 시골 마을 형사들의 수사는 봉준호 감독의 전작 <살인의 추억>처럼 어딘가 덜 떨어지고, 불합리합니다. 사건 현장에 있는 도준의 이름이 쓰인 골프공이 그를 범인으로 몰아가는 증거가 됩니다. 혜자는 아들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파리 목숨조차 빼앗을 수 없다고 믿는 아들입니다.


혜자가 가진 모성은 어떤 것일까요? 대한민국, 아니 세계의 많은 엄마는 모성이라는 이름 아래, 자식을 보호합니다. 우리는 때로 그 모성에서 야만과 폭력의 얼굴을 발견합니다. 레이철 커크스는 <일생의 과제: 어머니가 된다는 것>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아이가 있는 엄마가 다른 여성보다 도덕적으로 더 믿을만하다거나 뛰어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때로 어머니들은 발톱을 세운 맹수처럼 맹목적으로 자식을 방어합니다. 그리고 영화는 슬슬 진실이라는 파국으로 혜자를 몰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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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혜자는 흔히 ‘야매’라고 부르는 불법 침술사입니다. 침이라는 도구는 영화에서 물리적이면서도 은유적인 역할을 하는 도구입니다. 봉준호 감독은 잘 벼려진 첨예한 침을 이용해 인간과 사회가 지닌 모순을 찌릅니다. 침은 ‘망각의 도구’이자 ‘자기 최면의 수단’, ‘폭력을 이용한 망각의 장치’입니다. 도준이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관자놀이를 문지른다면, 혜자는 기억을 뺏기 위해 침을 놓습니다.


그녀가 살해 현장에서 잃어버린 침통을 찾아주는 사람은 도준입니다. 도준은 침통을 찾아줌으로써 그녀에게도 쓸데없는 기억을 망각하기를 권합니다. 영화 말미, 관광 버스 안에서 혜자는 ‘망각의 혈자리’에 침을 놓습니다. 치유가 아닌 망각을 위한 행위입니다. 이미 침은 자신의 용도를 잃고 폭력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침 하나로 모든 죄책감이 사라졌을까요? 침은 고통의 신경을 차단할 뿐, 그녀의 뇌에 새겨진 기억까지 지우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를 속이기를 선택합니다. 관광버스 안에서 벌어지는 어머니들의 춤이 오프닝 신에서 혜자가 보여준 춤과 오버랩됩니다. 모성이라는 이름의 광기는 그 기괴한 춤 속에 녹아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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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마주한 자는 반드시 죄책감에 무릎 꿇습니다. 그러나 혜자는 무릎 꿇는 대신 침을 찌릅니다. 그래야 다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침의 기능은 통증의 신경을 차단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봉준호는 침을 윤리의 신경마저 차단하는 도구로 전복시킵니다. 모성은 보호하고 헌신하며, 끝까지 믿는 힘입니다. 하지만 <마더>는 묻습니다. “그 믿음이 죄를 덮는다면 그것도 사랑인가?”라고요. 당신이 혜자의 입장이라면 똑같이 침을 들지 않을 자신이 있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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