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께서는 그림에만 전념하셔야 합니다. 직장을 그만두시지요.”
어느 날 아끼는 제자가 찾아와 결연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그는 후배의 말에 뜨끔했다. 반공연맹, 문화공보부, 그 다음 농업진흥공사. 충실한 봉급쟁이로서 가족을 지켜온 그의 귀에, 그날은 왠지 이상하게도 쏙 들어왔다.
현실과 타협하는 것이라는 생각과 당신 원하는 대로 하라는 아내의 동의에 그동안의 세월이 아깝기까지 했다.
"새로운 세상이 확 달려들었습니다. 올망졸망한 아이 둘에 대한 생계 대책이 막연했지만 그림에 전념한다는 것은 얼마나 환상적이고 설레는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요즘 말로, 나는 꿈에도 그리던 전업 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단칸방 우리 집을 만든 이후 참으로 무모하게도 직장을 때려치우는 용기를 낸 것입니다."
결단을 내리고서 그는 가슴이 뛰었다. 변두리에 조그마한 집 한 채를 살 수 있는 퇴직금을 아내 손에 쥐어 주고는, 곧바로 중장기적인 스케치 여행의 계획도 세웠다. 그것은 삶의 새로운 길이며 희망이자, 고행의 시작이기도 했다.
표지화 '새 행원'
표지화. 월간21, 2004년3월호-7월호
딱한 처지의 친구에게 아내와 합심해 퇴직금을 속절없이 주어버린 그는, 생계를 위해 출판사, 잡지사를 수도 없이 들락거렸고 밤새도록 삽화를 그려야 했다. 그리고 이 바보 화가에게는 그림을 알아보고 일감을 주는 고마운 사람들과 삽화에 감동했다며 편지를 보내오는 독자들이 생겼다.
"행복과 고난이 교대로 찾아오는 격이었지요. 그렇지만 고난을 먼저 생각했던 적은 없습니다. 가난해서 돈이 없었지만 행복하다고 자부했지요. 무엇보다, 그림에 전념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분명 행복이었습니다."
작은 삽화 한 컷이지만 그 모두가 작품이기 때문에 온 정신을 담았다. 그래서 전업 화가 한인현은 행복했다. 먹고살 수 있는 돈이 쥐어진다면 행복 찾기가 조금 더 쉬워지겠지만 그런 것은 아무에게나 오기 힘들다는 것쯤이야 알고 있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열심히 일했지만 출판사와 잡지사에 그려준 그림들의 화료를 받는 일도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하루종일 문 밖에서 기다리기도 했고 한 달, 두 달 계속 찾아가서 받아야 할 때도 많았다.
"지금 생각하면 참 좋은 공부였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런 일을 겪으면서 존경할 만한 사람들을 만난 인연, 그 가치를 귀하게 여기게끔 가르쳐 준 공부였다는 점입니다."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은 소 판 돈을 들고 나와 세계적인 회사를 일구었는데, 훔쳐낸 돈으로 고흐 화집을 산 후 화가의 길을 갈구해 온 사람이라면 하다못해 그림 그릴 종이라도 마음껏 살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이 밀려든 적이 없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삶의 여러 고지에서 만나고 마음을 나눈 사람들, 그 사람들과 지나온 시간들을 얘기할 때가 그림 그리는 시간 다음으로 즐거운 한인현에게는 이후로도 평생, 사람이 재산이라는 말처럼 귀한 말은 없었다.
게다가 그는 그림으로 무엇이든 이야기할 수 있는 화가였다. 그리고 이 전업 화가에게는 그를 숨쉬게 하고 온전히 살아 있게 하는 그림 속 주인공들이 있었다.
한인현, 어머니 마음, 1983, 먹 수채, 16.7×23.5cm
한인현, 기다림, 2008, 혼합제, 53×72cm
어머니를 그릴 때 화가는 단신으로 고향을 떠나와 살아야 했던 시절을 떠올렸다.
“이 땅의 어머니들은 모두 성인과 다름없습니다. 더울 때는 더운 대로, 추울 때는 추운 대로 당신이 먼저 고통을 감내하는 사람이 바로 어머니기 때문이지요. 그런 고통 대신 아들이든 딸이든 무럭무럭 자라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의 가슴 속에는 늘 어머니의 품에 안기고 싶다는 욕망이 들끓었다. 한인현의 그림 속에서 어머니는 아주 긴 팔을 가지고 있다. 어머니의 팔은 언제 어디서든 아들을 감싸 안기에 부족함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꿈이 없다고 여긴 사람들에게 이 그림을 주고 싶습니다. 동굴 속에 갇힌 삶과 다름없다고 여긴 사람들에게 이 그림을 주고 싶습니다. 자, 받으십시오. 자고 나면 또 하루가 다가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루가 열린 이상 어떻게든 살아내야 하는 것이 인생일 터이니 그날 그날을 겸허히 받아들이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무제, 1988, 한지,먹, 31cmx21.5cm
그는 삽화를 건네주러 잡지사에 가서는 점심 값이 없어 끼니를 걸렀으면서도 밥 먹고 왔다고 하곤 했다. 버스 삯이 없어 허청허청 걸으면서도 세상 구경하는 재미에 걸어다닌다고 거짓말을 한 적도 있지만, 그렇다고 행여 슬퍼하거나 세상을 원망한 적은 없었다.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으니까.
신문이나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곤 하는 뉴스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벼슬 싸움에 의리를 저버리고, 돈을 탐하다 교도소엘 가는지 그저 딱하다는 느낌밖에 들지 않았다.
"내 마음 속에는 늘 달이 떠 있습니다. 높다란 산자락 아래에는 빈 바가지가 놓여 있습니다. 달은 밝고, 이런 밤, 산중에 앉아 바가지에 물을 담아 한 모금 마시는 상상을 합니다. 그 물 속에는 달이 떠 있을 것입니다. 물 한 모금에 달빛도 가슴 속으로 흘러들어갈 것입니다. 어찌 마음이 비워지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때 비로소 맨손으로 왔다가 맨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요.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산 중의 물 한 모금을 드립니다. 달빛 한 조각도 드립니다. 가난한 화가의 선물로 알고 받아 주십시오. 산새는 울고, 깊은 밤에는 산울음 소리까지 들립니다. 맑은 산바람에 목덜미가 서늘해집니다."
한인현, 달빛, 1998, 먹, 붓, 34x25cm
한인현, 무제, 2001, 종이, 먹물 ,파스텔 ,이쑤시개, 29.5x21.5cm
어렸을 적 해변 마을에서 살았던 한인현은 전쟁통에 피난을 나온 곳이 거제도 장목이었다. 거제도. 수많은 포로들이 수용소에 갇혀 있었고, 수많은 사람의 명을 끊은 곳. 흔히 바다는 낭만의 장소로 통하지만 우리 시대의 슬픈 역사 속에는 사람의 목숨이 끊기는 것을 지켜본 바다가 있었다.
"내게는 내가 겪어온 바다가 있는 법이라서 나는 아직도 장승포의 바람과 파도와 영하의 수은주를 기억합니다. 혈혈단신 남으로 내려와 겨울 북풍과 맞섰을 때 천애 고아가 됐다는 느낌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것이 자유를 찾아 내려온 사람이 느끼는 절망감이라면 자유의 의미가 무엇인가, 자꾸만 되뇌이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내가 바다를 그릴 때마다 새를 그려넣고, 소라 고둥을 그려 넣는 것은 그 시절을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그는 생각했다. 소라는 바다에 산다. 소라는 천 년이 지나면 커다란 새, 붕이 되어 날아오른다고 한다. 아무리 큰 희망도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지만 천 년이 지나면 새가 되어 날 수 있는 소라의 꿈, 그것이 희망이다. 새 역시 그러했다. 천 년 전, 지금의 새는 소라 고둥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천 년 전의 소라 고둥이 아주 간절히 새가 되기를 원하여 우리 앞에 새가 되어 나타난 것인지 누가 알겠는가. 그러므로 이 화가의 그림에서는 새가 모래사장 위에 앉아 있고, 소라 고둥이 하늘에 떠 있다 한들 하나 이상할 것이 없다. 천 년 전의 희망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소라 고둥은 그에게 있어, 늙어가는 바보 화가의 꿈을 얘기하는 장치이고, 꿈이란 게 과연 있는 것인가 의아해 하는 사람들에게 꿈은 존재한다고 얘기하는 한인현만의 화법이다. 어느 한 시절 어렵지 않은 세월이 없었지만, 큰 희망, 작은 희망 가리려 하지 말고 조금씩 희망 곁으로 다가가니 그 희망이 어느 결에 내 곁에 다가와 있는 것을 알겠더라고 말이다.
"겨울 바다에 갔을 때, 여름 바다에 갔을 때 갈매기를 만나거든, 소라 고둥을 만나거든 희망이 있으면 말하라고 얘기해 주십시오. 천 년 후거나 백 년 후거나 꼭 이루어질 것이라고 얘기해 주십시오. 어느 늙은 화가가 그렇게 믿으면 될 거라고 얘기했다는 말과 함께 말입니다."
"나는 그런 날을 기다리며 하루하루 살겠습니다."
[남기고 싶은 이야기 ⑦] 바보 화가 한인현 - 그림에만 전념하세요. 직장을 그만두시지요 < 인터뷰 < 뉴스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