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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창의 ‘백자 시리즈’ 읽기 - 조선(朝鮮)의 마음

by 데일리아트

공간에서 장소로


"처음에는 별 특징이 없던 공간이 우리가 그곳을 더 잘 알게 되고 그곳에 가치를 부여하면서 장소가 된다. 더욱이 우리가 공간을 '움직임'이 허용되는 곳으로 생각한다면, 장소는 '정지'가 일어나는 곳이 된다. 움직임 중에 정지가 일어난다면 그 위치는 바로 장소로 바뀔 수 있는 것이다"라고 저명한 지리학자 이푸투안(段義孚)은 말한다. 공간에 우리의 경험과 삶, 애착이 녹아들 때 그곳은 장소가 된다. 사진 이미지의 경우는 어떨까?


베이컨(Francis Bacon)은 "<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를 본 뜬 습작>이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를 찍은 사진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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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를 찍은 사진. (우) 프란시스 베이컨,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를 본 뜬 습작, 1953


사진 이미지는 베이컨에게 "새로운 형상의 길"을 열어준 정지의 장소가 되었다. 이처럼 보는 이를 사로잡는 사진 이미지의 공간에서는 정지가 일어나고 그곳은 주체의 경험과 삶, 애착이 녹아드는 장소가 된다. 이 글에서는 달항아리의 미의식을 새롭게 조명한 사진작가 구본창의 <백자 시리즈> 를 통해 사진 이미지 속에 나타나는 정지의 장소를 추적해 보겠다.


장소 1 : 1989년의 타향


"버려지고 덧없는 것들에 대한 애착. 나도 버려져 있다고 생각했기에 더욱 그것이 애틋하게 느껴졌음을 부인할 수 없다.(…) 사물도 사람도, 이미 사랑을 받고 있는 화려한 것들보다 버려진 것이 내 사랑을 받아 다시 살아나는 것에 보람을 느낀다."


그가 새로운 작업의 테마를 발견하는 것은 우연히 접한 한 장의 사진, 한 줄의 문자에서일 경우가 있다. <백자 시리즈>도 그렇게 한 장의 사진에서 탄생했다. 그 사진을 처음 보았을 때 그는 한국을 떠나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낯선 외국인과 함께 먼 타국에 있던 백자의 모습은 구본창의 가슴 깊은 곳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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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일본 잡지에 실린 루시 리와 달항아리 사진


그때는 사진에 찍힌 노부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우리 백자를 외국인이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백자가 먼 이국 땅에서 구원받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만이 남아 있었다. 그 후로 15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에야 그 사진 속 달항아리의 내력과 여인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이름은 루시 리(Lucie Rie, 1902~1995)였다.


1989년 일본 잡지에 실린 도예가 루시 리와 달항아리 사진에서 구본창에게 찾아온 정지의 요소는 무엇이었을까? 그 사진의 정중앙에는 오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손때묻은 자국들이 선명한 달항아리가 새하얀 방의 흰색 탁자 위에 올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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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쪽에서 시계방향으로) 세잔의 정물화, 작업 중인 루시 리, 루시 리의 작업실, 루시 리의 작품 사진


그 달항아리 아래로는 세잔의 정물화를 떠올리게 하는 면 천 위에 루시 리의 작업용 앞치마가 올려져 있다. 달항아리는 두 겹의 천 위에 가지런히 놓인 채 사진의 정중앙을 차지하고 있었다. 흰색 옷을 갖추어 입고 손발을 다소곳이 한 루시 리는, 달항아리에게 기꺼이 주인공의 자리를 내어주겠노라고 결심한 듯 중앙을 비켜난 자리에서 지그시 입을 다물고 있다.


루시 리의 거실 사진 속에서는 파손을 방지하기 위해 독립된 공간에 별도로 보관되어 있는 달항아리를 발견할 수 있다. 루시 리의 작품 중에서는 달항아리의 표면 한 조각을 잘라놓은 듯한 작품도 찾아낼 수 있다.


달항아리를 향한 루시 리의 배려와 존중의 흔적들에도 불구하고 그 사진 속 이미지가 구본창의 마음에 애틋함을 불러일으킨 것은 단정하게 차려입은 외국인 도예가와 깔끔한 실내 분위기와는 도무지 하나의 풍경으로 어울려지지 않는 이질감, 손때묻은 조선의 달항아리가 품고 있는 시간의 흔적이었을 것이다. 달항아리 표면에 무수한 층으로 얼룩지고 번져서 켜켜이 쌓인 오랜 흔적들이 구본창에게 애틋한 감정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1912년 아사카와 다쿠미(浅川巧, 1891-1931)라는 일본인 청년이 광릉에 있는 조선총독부 임업시험장 파견근무자로 한국에 온다. 평생 조선의 미를 아끼고 사랑했던 다쿠미는 1931년 40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면서 조선의 흙이 되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다. 그는 지금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혀 있다.


1914년 여름 다쿠미의 형 노리타카는 일본의 미학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에게 <청화추초문모깎이항아리(靑花秋草紋面取壺)>를 선물했고, 야나기는 그 도자기에서 "인간의 따스함, 고귀함, 장엄함을 읽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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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화추초문모깎이항아리


한편 야나기에게 도예를 배우기 위해 일본에 왔던 영국의 도예가 버나드 리치(Bernard Leach, 1887-1920)가 그를 따라 경성에 왔다가 달항아리를 보고 반해 한 점 사 가지고 돌아갔다. 리치는 달항아리를 안고 비행기를 탈 때 "행복을 안고 간다"고 했을 정도로 달항아리를 소중히 여겼다.


그러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런던에 폭격이 시작되자 달항아리를 런던 작업실에서 교외에 있는 제자의 작업실로 옮겼다. 달항아리의 마지막 주인이 된 리치의 제자가 바로 사진 속 도예가 루시 리였다. 루시 리가 세상을 떠난 이후 그 달항아리는 영국박물관 한국관에 소장되었다.


장소 2 : 2004년의 귀향


2004년 교토를 여행하던 구본창은 일본 잡지에 소개된 조선백자를 보고 홀연히 오래전 그 사진의 기억을 떠올렸다. 당시 일본에서는 주부 대상 잡지나 인테리어 잡지에 백자가 자주 등장했다. 소박한 조선 목가구 위에 백자가 놓여 있는 풍경은 그들에게 최고의 멋이었다. 그 시기 탈에 몰두하여 전통문화를 재해석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던 구본창은 "지금까지 한국에서는 백자를 아무도 찍지 않았구나. 내가 꼭 찍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백자와의 첫 만남 이후 15년 간은 구본창이 백자의 멋을 알아보는 데 필요한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본격적으로 타국에 있는 백자를 찾아가서 사진에 담아오는 <백자 시리즈>를 시작하게 된다. 2004년 교토 고려미술관을 시작으로 구본창은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의 백자를 사진에 담았다. 세계의 주요 백자 컬렉션을 찾아다니며 오랫동안 백자 촬영에 열중했다.


구본창은 자신에게만 살결을 드러내 보여주는 백자의 모습을 잡아내고 싶었다. 백자의 외형적 형태보다 그 내면에 흐르는 깊고도 단아한 감성을 파고들기로 했다. 구본창은 백자를 단순한 도자기가 아니라 혼을 지닌 것으로 여기고 마치 인물을 찍듯이 촬영했다. 한번은 큐레이터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백자를 가슴에 꼭 끌어안고 속삭였다.“어쩌다 네가 여기까지 왔느냐. (…) 네 영혼을 사진에 담고 싶으니 너도 꼭 응해야 한다.”구본창은 백자들이 그들의 영혼을 내어주기를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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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 전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


백자의 아름다움을 사진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백자의 투박하면서도 부드러운 질감과 간결하면서도 기품있는 선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구본창은 이 작업을 통해 보여주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끝없이 질문하고 고심했다.


도자기 배경 효과를 위해 오래된 툇마루 바닥을 가져와서 촬영해 보기도 하고, 장판을 깔아보기도 했다. 이런 고심의 과정을 거쳐서 미색 한지를 바닥과 뒷면에 덧대서 촬영하는 세팅을 결정하게 되었다. 배경 수평선의 유무과 백자들 간의 구성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모란디(Giorgio Morandi)의 정물화를 참고로 했다. 무수한 고민과 실험 끝에‘엷은 수평선과 조화로운 구성’을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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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에서 시계 방향으로) 촬영 전 모습, 모란디의 정물화, 백자 사진


구본창에게 2004년 교토 고려미술관에서의 첫 촬영은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색온도가 안 맞고 여러 상황이 좋지 않아서 억지로 찍은 백자 대접의 폴라로이드 사진이 핑크 톤으로 나온 것이다. 그는 의도하지 않은 우연한 결과인 핑크톤을 "마치 조선시대의 여성 같다. (…) 조선시대의 소녀 같다. 옳거니, 나는 이 색으로 해야겠다!"라고 오히려 반기듯이 받아들였다. 그리고 <백자 시리즈>의 고정 톤으로 삼게 되었다. 그것은 구본창에게 또 한 번의 정지의 순간이 되었다.


구본창의 2004년 <백자 시리즈(KRO 01)>에는 한지에서 번져 나오는 은은한 핑크 톤의 배경을 어스름한 수평선이 가로지르고 있다. 그 수평선의 정중앙에 시간을 거슬러 과거 속에서 건져 올린 듯한 백자 대접이 고요하게 놓여 있다. 마치 이른 아침의 대지를 뚫고 솟아오르는 아침 햇살을 머금은 듯 대접 표면의 백색이 핑크 톤의 배경과 어우러지면서 풍경을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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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 시리즈(KRO 01), 2004, 교토 고려미술관 소장


그 대접은 르네상스의 이성적 비례를 지나 바로크의 흐려진 윤곽선을 향해 나아가는 감성적 색채를 표현하려는 듯, 회화적인 촉각성을 머금고 아련하게 과거에서 현재로, 타국에서 고국의 품으로 돌아와 환대받는 기쁨을 누리는 듯하다. 관객의 시선은 하나의 초점으로 모이지 않고 전면으로 흩어지며, 한지 배경과 백색 대접이 서로를 품는 듯한 촉각적 울림을 느끼게 된다. 구본창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한 듯, 백자 대접 안에 담긴 ‘조선의 마음’이 대접의 표면을 깨트리고 한지 배경 속으로 스며들고 있는 것이다.


구본창은 루시 리와 함께했던 1989년 사진 속의 달항아리를 2006년 영국박물관을 방문하여 사진에 담았다. 경매를 통해 어렵게 달항아리를 소장하게 된 영국박물관에서 깨끗하게 세척한 뒤라서 달항아리 표면을 감싸고 있던 오랜 세월의 흔적을 원형대로 담을 수는 없게 되고 말았다. 하지만 1989년 구본창에게 애틋한 구원의 손짓을 보내며 타국에 머물고 있던 달항아리는 이제 그 안에 담긴 조선의 마음이 인화지에 담겨서 고국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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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 시리즈(BM 4), 2006, 영국박물관 소장


조선(朝鮮)의 마음을 담다


"장소는 잘 알려진 친숙한 특정 입지에 대한 공명이며(…) 인간이 주체적인 경험을 통해 매개된 외부 세계다." 미술 비평가 루시 리파드(Lucy Lippard)는 거주와 장소에 대한 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철학, 즉 그가 현대적인 상황을 실존적인‘고향 상실’의 하나로 진단한 것을 상기시키면서, ‘장소 감각’을 치료법으로 제시한다. 말하자면 장소 감각은 "일반화된 소외의 해독제로서 어디엔가 속하기 위한 심리적 필요의 지리적 구성 요소다."


이러한 맥락에서 구본창의 <백자 시리즈>는 한국인으로서의 장소 감각을 되찾아가는 진보적이고 대항적인 문화적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사진 속 이미지에는 잃어버린 조선의 마음이 담겨 있다. 달항아리와 배경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스며드는 "아침의 공간은 낮의 법칙과 밤의 정열이 음양의 태극적 원형(圓形)을 이루는 균형의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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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 시리즈(OSK 02), 2005,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


<백자 시리즈>의 공간에서 현대인들은 주체 중심의 인본주의가 자행한 자연 파괴와 인간 소외를 돌아보며 정지의 순간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 정지의 순간, 달항아리의 표면에 새겨진 오랜 세월의 흔적들은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져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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