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산소리>를 만나게 된 건 한정원의 <내가 네 번째로 사랑하는 계절>이었다. '이 책에는 실패와 실패의 기미가 녹음처럼 너르게 드리워져 있기 때문이다'라는 문장이 나를 소설 <산소리>로 이끌었다. 어느 지점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인생의 어느때 부터는 실패의 연속선상에서 살고 있는 것 같다.
4월,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왔다. 개나리도 목련도 벚꽃도 피었다. 봄이 왔는데 내 마음은 아직 봄이 아니다. 아, 이런 봄을 맞이하다니 이제껏 맞이해보지 않은 봄이 낯설어서 당황스럽다. 큰 병을 앓았을 때도 봄이 지금과 같지 않았었는데 무슨 일일까? 몸에 없던 통증이 생기고 쓸쓸한 감정이 나를 파고든다. 갱년기라는 인생에서 새로운 장에 들어서게 되었을 뿐인데 뭔가 실패한 기분이다. 이 실패는 노화와 죽음에 내가 무력할 수밖에 없어서 느끼는 것이겠지? <산소리>에 등장하는 '신고' 또한 기억을 잘하지 못하게 되면서 자신의 늙음을 확인하고 심지어 '산소리'를 듣게 되면서 죽음에 천착한다. 일본에서 '산소리'는 사람이 죽을 날이 다가오면 듣는 소리라고 한다. 소설 <산소리>는 내게도 이 불가항력적 노화와 죽음을 생각하게 한다.
노화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패배감에 앞서, 신고의 인생에서 가장 먼저 실패의 경험은 바로 첫사랑이었다. 실패는 그 이후로 욕망으로 남았다. 그녀의 동생과 결혼을 하고 딸을 낳고서는 첫사랑의 그녀와 닮기를 기대했다. 지금은 첫사랑의 현현이라고 할 만한 며느리에게 남다른 감정을 가진다. 이전에는 잘 생각하지 못했다. 실패의 경험이 욕망을 낳게 하는지. 내게 있어 이처럼 만들어진 욕망은 무엇이 있을까?
신고와 며느리 기쿠코 관계에 있어서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루틴이 있다. 기쿠코는 신고를 위해서 뜨거운 엽차(일본에서 가장 많이 마시는 녹차인 센차煎茶로 여겨진다. 일본은 중국과 우리나라와는 달리 녹차를 만들 때 찻잎을 덖기보다는 증기에 찐다)를 마실 수 있도록 늘 신경 써서 끓여준다.
“신고는 여름에도 차가운 음료를 싫어했다. 야스코가 못 마시게 했기 때문에 언젠가부터 그렇게 되어버렸다. 아침에 일어나거나 밖에서 돌아오면 우선 뜨거운 엽차를 듬뿍 마시는 것이 습관이 되었는데, 매번 기쿠코가 신경을 써주고 있다.” 50쪽
며느리 기쿠코는 남편의 외도로 괴로워서 태아를 낙태시킬 만큼 반항도 하지만 며느리로서는 성실히 기쁨으로 살고 있다. 남편과는 달리 다정하게 자신을 대하는 시아버지에게 의지하며 살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신에게 시아버지가 욕망을 품고 있을 거라고는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만약 자신이 남편 슈이치와 헤어지더라도 아버지 곁에서 차를 끓여드리고 싶고, 다도 선생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기쿠코가 매번 끓여주는 차가 고마웠던지 옥로玉露(교큐로, 그늘에서 3주간 재배한 찻잎이 특징)를 부의답례품으로 받고선 신고는 본인이 직접 끓여 며느리에게 맛보라고 권해주기도 하며 두 사람은 보통의 시아버지와 며느리 관계보다 가까워 보인다. 하지만 슈이치가 늦게 돌아와 술주정을 부린 다음 날 아침, 마음이 심란하여도 묵묵히 아침밥을 차리고 차를 끓이는 기쿠코를 보며 신고는 분가를 얘기한다. 기쿠코가 끓여주는 엽차를 포기하지 않고 싶겠지만 그는 슈이치와 기쿠코가 단둘이서 해결책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고 애써 생각한다.
신고와 기쿠코 사이에서 차는 두 사람의 관계를 보여주지만 과한 친밀함을 드러내는 메타포로 보이기도 한다. 그 이유는 차의 온도에서 알 수 있다. 엽차라고 쓰여진 센차도 그렇고 옥로도 그렇고 뜨겁게 마시면 그 맛이 잘 살지 않는다. 특히 옥로의 적정 온도는 60도이다. 솥에서 덖어낸 초청 녹차가 아닌 증기에 찐 증청 녹차는 찻물의 온도가 최대 75도 정도로 낮은데 옥로(교쿠로)는 더 낮은 60도로 우리기 때문이다. 만약 적정 온도였다면 뜨겁다라는 표현보다 따뜻하다라는 표현이 적당할 것이다.
“잠에서 깨어난 신고는 옥로도 뜨거운 물로 마신다. 뜨거운 물이기 때문에 끓이는 방법이 오히려 어렵다. 기쿠코가 가늠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 같다.” 209쪽
차에 있어서 적정 온도가 필요하듯 사람 사이에도 적정 온도가 필요하다. 신고도 알고 있다. 자신의 욕망이 잘못된 것임을. 꿈에서나마 자신의 욕망이 발현되지만 언제나 그 얼굴은 기쿠코가 아니라 다른 얼굴이었다. 결국 그도 사회적으로 길들여진 사람이었고 가장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는 사람이었다. 쇠잔해지는지는 육체와는 반대로 강해지는 욕망이 그를 붙잡는 것을 탓할 수는 없을 거 같다. 내가 가까이서 지켜보았던 몇 번의 죽음 앞에서 나는 욕망에 사로잡힌 모습들을 보았다. 내가 그 앞에서 느꼈던 것은 분노보다는 가련함이었다. 세상에 태어나 누리지 못하고 억압되었던 것이 그만 그들을 놓아주기를 바라게 되었다. 나도 이제 점점 그들의 뒤를 이전보다 더 빠른 속도로 따라가고 있다. '나는 그렇게 살지 말아야지 한다'고 그러지 않을 문제가 아니라 쓸쓸하다.
신고도 자주 쓸쓸하다고 고백한다. 자신의 욕망이 지금이야 꿈속에서 표출되지만 더 이상 무의식을 통제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허무하게 탄로 나버릴 욕망이 두렵다.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싶을수록 더 쓸쓸해지리라. 드러내도 쓸쓸해지는 건 마찬가지겠지?
앞에서 얘기했던 책 <내가 네 번째로 사랑하는 계절>에서 작가는 여름이면 이 책을 읽는다고 했다. 나는 꽃이 피는 4월의 봄이면 이 책을 읽지 않을까 싶다. 새싹으로 만들어진 햇차가 나오는 계절이기에 신고가 마시는 옥로가 기억날 것이고 꽃들이 너무 아름답기에 신고처럼 노화와 죽음 속에서 반짝일 욕망이 꽃필지도 모르니까. 그러다 결국 쓸쓸해지려나. 다음 계절에는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담대해지고 환희가 있기를 기대해본다. 왜냐하면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계절이니까.
[이은영의 작품 속 차 이야기④] 차의 적정 온도는 몇 도 일까? < 칼럼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