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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일리아트 Jul 24. 2024

① 탁류 문학기행 (1)

[군산 새만금 답사기]

임피역, 채만식 생가, 채만식 문학관
임피역에서


지난 5월 7일 한이수대표는 로컬콘텐츠연구소에서 기획한 채만식의 소설 <탁류>문학기행에 참석했다. 임피역과 채만식생가, 탁류문학기행, 새만금 팸투어로 진행된 행사를 2회에 거쳐 싣는다.(편집자 주)


너무 늦게 일어났다보통은 오전 5시 정도에 일어나는데전날 너무 늦게 잤다조금만 조금만 하다가 6시에 기상했다. 6시에 출발해야 하는데 출발 시간 6시 30비도 오는 데다가 오늘은 한 주를 시작하는 첫날 아닌가어제의 연휴로 오늘 차를 가지고 출근하는 사람들로 도로는 막힐 것이다직장 생활 30여 년 동안 출근 첫날은 막힌다는 것그리고 비가 오면 도로는 더 큰 몸살을 앓는다는 것은 매번 경험하는 하나의 공식이었다군산까지 가야한다. 10시 30분까지 군산역에 도착해야 하는데, 우리 집에서 330여 킬로미터먼 길이다카맵을 켜 보니 딱 10시 30분에 도착한다는데 시간 대로라면 늦지 않을 수도 있다수도권만 벗어나면 시간이 당겨질지 모른다고 위안하며 차에 올랐다예상과 같이 11시가 넘어 도착했다다행히 내가 도착한 임피역에 일행들이 탄 버스에서 사람들이 우루루 내렸다내가 조금 늦는다니까 주최측에서는 임피역으로 바로 오라고 했다처음 와보는 임피역이다군산을 그렇게 많이 내려왔지만 이성당 같은 빵집만 다녔다.

한때는 통학생과 출퇴근 직장인으로 붐볐겠지만 임피역은 호남평야의 일등미를 수탈하기위해 지어진역이다. 1910년도에 지어졌고 지금의 역은 1936년에 증축했다.



임피역은 군산선의 간이역이라고 한다. 호남선의 지선으로 출발한 군산선은 이리역에서 분기하여 군산역까지 연결되는 24 킬로의 짧은 철도이다. 나중에는 장항선으로 통합되었고 2008년 5월부터 여객 운송 업무가 중단된 폐역이다. 그러나 시골 간이역의 정취가 남아 있어서 역을 통한 추억과 낭만을 소환시켰다. 폐역이 된 지 오래지만 그 시대의 흔적들을 여러 가지 형태로 재현해 놓았다. 당시 임피역은 통학하거나 출퇴근용으로 이용하는 큰 역이었다. 그러나 군산선의 주요 기능은 호남 곡창 지대의 쌀을 실어 나르기 위한 것이다. 너른 호남평야에서 생산되는 쌀을 싣고 군산항으로 가서 정박해 있던 배에 실으면 배는 일본으로 떠났다. 임피 역사는 조선의 쌀, 호남평야의 일등미를 일본으로 반출해 가는 역이었다. 1910년대에 지어진 건물은 1936년에 개축되어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208호로 지정되었다.


현재의 군산시의 과거 이름이 옥구이다. 일제 강점기에 옥구는 일본인들이 주요 거점인 군산부와 옥구, 임피로 나누어졌다. <탁류>와 <태평천하>, <레디메이드 인생>을 쓴 소설가 채만식이 태어난 곳도 이곳 임피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전라북도 임피군 군내면 동상리(현 전북특별자치도 군산시 임피면 읍내리)이다.

채만식 생가터에는 덩그러니 우물만 남아있다.


이번 여행이 채만식의 탁류 문학 기행이니만큼 일행을 따라 채만식의 생가를 찾았다. 뭔가 볼 것을 기대하고 찾았으나 아무것도 없는 빈 터였다. 참 아이러니 하다. 해설사의 이야기를 들으니 생가를 복원 못하는 이유는 행정 부처의 재정 부족이 아니고 채만식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낙인 찍혔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생가를 복원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는 일제 말기에 <아름다운 새벽,1942>, <여인전기,1945> 등 친일 소설을 여러 편 발표했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로 많은 작가들이 친일로 돌아섰다. 채만식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다른 친일 작가들과 다른 것은 친일에 대해 혹독하게 자기 자신을 반성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것을 작품으로 온 세상에 공개했다. <민족의 죄인>이라는 작품이다. 그는 1948년 10월 '백민'이라는 잡지에 발표한 연재 지면에 소설 <민족의 죄인> 옆에 이름을 썼다. '민족의 죄인 채만식'이라고 표기되어 있는 듯하다. 그만큼 그는 자신의 과오를 숨기지도 변명도 하지 않았다.

채만식문학관에는 그의 친일에 대한 흔적을 여과 없이 전시했다.


'당신, 죄 지셨잖아요? 그 죄, 지신 채 그대루, 저생 가시구퍼요? 아내가 나를 죄인이라고 부르기는 처음이었다. 그는 울면서 그 말을 하였다. 나를 죄인이 아니라 여기려고 아니하는 이 낡아빠진 아내가, 나는 존경스럽고 고마웠다.' (채만식, 민족의 죄인 일부분)


남편의 친일을 뼈아프게 아파하는 아내의 외침이 소설에 녹아 있다. 아내가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자 채만식은 아내를 존경스럽다고 얘기를 한다. 그가 얼마나 자신의 과오에 속죄의 마음을 가졌는지 반성의 깊이를 알 수 있다. 해방되자 친일 행적에 대해 반성은커녕 온갖 이유와 궤변을 늘어놓았던 다른 문인들에 비하면 과거의 문제를 솔직하게 고백하는 모습에 오히려 고개가 숙여진다. 그가 학자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그의 문학성 외에도 삶에 많은 요소가 중첩되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발표된 학위 논문과 학술 논문이 500여 편에 달한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친일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력을 가지고 있는 우리 문단사는 단지 작품만으로 그 사람을 평가할 수 없는 과거사를 가지고 있다.

전시장의 채만식 입상


과거를 그토록 철저하게 반성한 것은 그의 성격에 기인한다. 그에게는 유달리 심한 결벽성이 있었다. 다른 사람이 잡은 문고리조차도 잡지 못하고 소독하고 잡았다는 것이다. 그의 성격이 작품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근대화는 되어 가는데 일제에 의한 문명 개화이다. 올바른 이념 없이 세상이 흘러가니 잘못 흘러간다. 정확히 표현하고 싶은데 그러기에는 여의치 않다. 그래서 식민지의 현실을 우회적으로 표현해 갔다. 성격상 외면할 수 없는 결벽증이 현실을 풍자해  갔다. 그의 소설을 풍자 소설의 진수로 말하는 이유이다. 소설 <태평천하>의 일부이다.


윤 직원 영감은 팔을 부르걷은 주먹으로 방바닥을 땅 치면서 성난 황소가 영각을 하듯 고함을 지릅니다.

"화적패가 있더냐? 부랑당 같은 수령(首領)들이 있더냐······? 재산이 있대야 도적놈의 것이요, 목숨은 파리 목숨 같던 말세(末世)넌 다 지내가고오····· 자 보아라, 거리거리 순사요, 골골마다 공명헌 정사(政事), 오죽이나 좋은 세상이여······ 남은 수십만 명 동병(動兵)을 히여서, 우리 조선놈 보호하여 주니, 오죽이나 고마운 세상이여? 으응······? 제 것 지니고 앉아서 편안허게 살 태평세상, 이걸 태평천하라구 허는 것이여, 태평천하······! 그런디 이런 태평천하에 태어난 부자놈의 자식이, 더군다나 왜 지가 떵떵거리구 편안허게 살 것이지, 어찌서 지가 세상 망쳐 놀 부랑당패에 참섭을 헌담 말이여, 으응?"(네이버 지식백과, <태평천하> 인용)

일제강점기의 헝클어진 삶을 태평천하라고 빗대어 말한것이다. 이어서 들린 곳이 채만식 문학관이다. 답사 일행은 매체사 기자들과 블로그 활동을 열심히 하는 인플로언서로 구성되었다. 전라북도의 다양한 콘텐츠를 발굴하고 알리는 '로컬콘텐츠 연구소, (소장 손안나)'가 기획했다. 나는 데일리아트 기자로 참석했다.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얼마 전 직장을 다닐 때만 해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이참에 탁류의 채만식, 채만식의 군산을 꿰뚫어 보기로 했다. 문학관에 들어가니 누군가 그의 생몰 연대를 가리킨다. 1902년에 태어나서 1950년 6월에 폐병으로 돌아가셨다. 6.25전쟁, 동족상잔의 비극을 보지 못하고 사망했으니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 전체 인구가 3천만 명도 되지 않을 때 5백만 명이 죽거나 불구자가 되었으니, 여섯 명에 한 명은 죽거나 장애를 입은 전쟁을 보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원고지를 쌓아놓고 맘껏 글을 써보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가졌던 사람이다. 그의 결벽스런 성격답게 수도 없이 원고를 수정해서 많은 원고지가 필요했다고 한다. 문학관에서도 역시 친일파로 변절한 것을 가감 없이 전시해 주었다.

늘 원고지가 없어 쪼들렸던 채만식. 원고지를 쌓아놓고 원없이 글을 쓰고 싶다고 했다.


오후에는 본격적인 채만식 문학 기행이다. 채만식 탁류 문학 기행 이라고 쓴 명찰을 걸고 지나가니 사람들이 뭐하는 사람들이냐고 묻는다. '탁류 문학기행'이라고 얘기하니 이 사람은 탁류를 '탁주'로 알아들었다. 막걸리 먹는 모임이냐고 되묻는다. 탁주. 탁한 술, 색깔이 흐려 막걸리를 탁주라고 부른다. 왜 탁류라는 제목을 붙였을까? 소설을 읽어보니 탁류로 이름 붙인 것이 이해가 간다. 채만식은 탁류에서 어떤 모습으로 군산과 이곳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 것일까?


"에두르고 휘몰아 멀리 흘러온 물이, 마침내 황해 바다에다가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째 얼러 좌르르 쏟아져 버리면서 강은 다하고, 강이 다하는 남쪽 언덕으로 대처(시가지) 하나가 올라 앉았다. 이것이 군산이라는 항구요, 이야기는 예서부터 실마리가 풀린다."

금강내항에는 이런 선술집이 많았다.


멀리 흘러들어온 물은 금강을 말한다. 전북 장수군에서 발원하여 부강, 공주, 강경을 지나 군산만으로 흘러들어가는 강이다. 한강에 유역을 둔 백제가 공주와 부여로 도읍을 정한 것도 금강과 관계가 깊다. 금강을 통하여 백제는 중국, 일본과 교류할 수 있었다. 19세기 후반까지 매년 1만 5천척의 배가 드나들었다고 하니 금강은 이곳 해로의 중심이었다. 금강을 금산에서는 '적벽강'으로, 부여에서는 '백마강'으로, 공주에서는 '웅진강'으로 부른다. 의자왕이 거느린 삼천 궁녀가 백제가 망하자 강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는 그 백마강이 금강이다. 그러고 보니 금강은 서울의 한강이나 강화도를 연상시킨다. 서울의 길목인 강화도가 외세 진출의 입구이듯이 이곳도 끊임없이 외세의 공격에 시달렸고 많은 수탈의 대상이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고려 시대에 왜구들을 무찌른 최무선이 활약한 진포대첩도 이 지역의 이야기이다.

채만식은  탁류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금강의 물은 전북 장수에서 발원하여 충청 남북도를 거쳐 강경을 지나 군산에 이른다. 물이 흐리다.



https://www.d-art.co.kr/news/articleView.html?idxno=6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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