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고 푸른 밤, 다나에, A Deep blue night, Danae,
이효선 Lee hyo sun
Acrylic on canvas, 100.0x80.3cm, 2024
어릴 적, 내가 받았던 가장 큰 선물 중 하나는 다빈치 출판사의 ‘만화로 보는 서양미술사’ 전집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읽지 않지만, 여전히 버리지 못하는 나의 애장품이다. 핸드폰이 없었던 시절, 유난히 할 일이 없을 때면 1권부터 5권까지 반복해서 읽곤 했다. 그런 나를 본 아버지는 ‘만화로 보는 서양 음악사’ 책을 추가로 선물해 주셨지만, 이상하게도 펼치기만 하면 잠이 쏟아졌다.
책 속에 등장하는 많은 작가 중 구스타브 클림트(Gustav Klimt)는 어린 나의 마음에 강렬하게 남은 인물이었다. 책이 해지도록 읽으면서 2000 피스 짜리 클림트의 ‘키스’ 퍼즐을 맞췄다. 그러면서 언젠가는 오스트리아에 가서 직접 그의 그림을 보는 날을 꿈꿨다. 아쉽게도 그 꿈은 아직 이루지 못했다.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오마주하는 과정은 단순한 모방을 넘어서, 새로운 이미지를 발견하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창작의 한 방식이다.
클림트의 ‘다나에’.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과감한 구도와 둥근 곡선, 우아한 장식들이 매혹적인 이 그림은 오래도록 나의 마음을 붙잡는다. 언젠가 다나에 신화를 주제로 작업을 해보고 싶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이 ‘깊고 푸른 밤, 다나에’이다.
Gustav Klimt - Danae(1907)이미지 출처 : 위키피디아
다나에는 이오의 후예, 아르고스의 왕 아크리시오스와 그의 왕비 에우리디케 사이에서 태어난 공주이다. 왕자 없이 늙어가던 아르고스의 왕은 불안한 마음에 신탁을 구하러 나섰고, 신들은 그에게 충격적인 예언을 내렸다. 공주 다나에가 낳을 외손자에 의해서 왕은 죽임을 당한다는 것이었다. 공포에 휩싸인 왕은 사랑하는 공주 다나에가 아이를 갖지 못하도록 그녀를 청동으로 만든 탑 속 깊은 방에 가두었다. 그곳은 세상의 빛조차 닿을 수 없는 곳이었다.
오랜 세월 홀로 있던 다나에.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한 하늘의 신 제우스는 황금빛 비가 되어 그녀에게 닿았다. 신비한 황금빛 비 아래서, 다나에는 신의 아이를 잉태하였고, 그녀는 영웅 페르세우스의 어머니가 된다.
Tizian – Danae (1560-1565) 이미지 출처 : 프라도 미술관 홈페이지
신성한 여성성과 관능의 상징
황금비 신화로 알려진 다나에의 이야기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수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었다. 고대에는 신탁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인물로, 중세에는 성모 마리아의 수태를 설명하는 상징으로 해석되었다. 20세기 초 다나에 신화는 다시금 주목을 받으며 클림트와 에곤 실레 같은 작가들을 통해 여성 신체의 관능성과 생명력의 상징으로 다시 태어났다.
클림트의 [다나에]는 여신처럼 감싸진 다나에의 몸 위로 황금빛 정수가 쏟아지며, 성스러운 에로스적 사랑의 순간을 우아하게 시각화했다. 클림트의 다나에는 신성한 사랑과 여성의 관능미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자리 잡았으며, 여전히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클림트의 애제자로 알려진 에곤실레 또한 다나에를 주제로 한 작품을 남겼다. 오리엔탈리즘의 영향을 받은 독특한 구도와 여백이 인상적인 이 작품은 엎드린 여인의 몸 위로 황금비가 새겨진 천막이 드리우는 표현을 통해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수용하는 모습을 묘사한다. 이 두 작품에서 보이는 공통으로 발견되는 독특한 패턴은 인간 세포와 생식 구조를 상징한다고 해석되며, 여성 신체의 신성성, 관능성과 더불어 생물학적 기원에 대한 은유적 표현으로 읽히기도 한다.
Egon schiele – Danae (1909) 이미지 출처 : 위키아트
황금에 대한 탐욕, 황금만능주의
한편, 다나에 신화를 다룬 또 다른 해석은 여성의 관능성과 함께 ‘황금’ 그 자체에 집중한다. 황금은 단순히 제우스를 상징하는 요소를 넘어, 인간의 탐욕과 물질적 욕망을 대변하는 상징이 되기도 한다.
안토니오 벨루치의 〈다나에〉에서는 황금비를 반기는 여인의 모습이 묘사되며, 적극적으로 황금을 받아내는 하녀의 모습이 같이 그려진다. 이는 황금만능주의, 혹은 여성의 욕망과 연결되어 해석되며, 다나에를 수동적 존재가 아닌 능동적으로 황금을 받아들이는 인물로 그린다. 이렇게 신화 속 그녀는 성스러운 수태의 주체가 되거나, 황금에 매혹된 존재로 이중적인 상징성을 갖게 된다.
Antonio Bellucci – Danae (1695) 이미지 출처 : museum fin art of Budafest
침묵과 기다림, 그리고 빛
‘측은지심’
강압적인 아버지, 회피할 수 없는 운명, 그리고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닥쳐온 잉태. 신화는 이것을 신성한 것으로 포장했지만, 내가 바라본 다나에는 오히려 고통받는 개인, 갇힌 존재, 억압 속에 놓인 한 개인이었다.
나는 다나에를 영웅의 어머니나 탐욕의 상징이 아닌, 침묵 속에서 자신의 답을 찾아가는 한 인간으로 그려보고 싶었다. 오랜 시간 외로이 갇힌 탑 속에서 그녀는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떤 시간을 보냈을까.
불교에서 말하는 오랜 사색 끝의 깨달음처럼, 어둠 속에서 그는 자신만의 의미를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나의 작품에서 다나에는 홀로 웅크려 사색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품으로 황금빛이 흘러든다. 그것은 세상의 욕망이 아닌, 다나에가 스스로 발견해 낸 ‘자기만의 답’, 곧 깨달음의 빛이다.
[나의 작품 이야기 ② ] 클림트에서 시작된 '깊고 푸른 밤, 다나에 ' < 미술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