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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주의 화가 열전 ⑦] 오지호 1

by 데일리아트

“회화는 태양과 생명의 관계요, 회화는 인류가 태양에 보내는 찬가(讚歌)”


따듯한 빛과 강렬한 색채의 그림에 매료되지 않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여전히 인상주의 작품이 대중에게 인기가 있는 것이 그 이유일 것이다. 인상주의는 아름답고 대중에게 인기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150년이 지난 현대에도 여전히 칭송받는 걸까? 당대에 인기 있고 아름다웠던 그림들은 늘 존재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무엇이 이리도 우리를 인상주의 그림에 매어두는 것일까?


데일리아트는 '인상주의 화가 열전' 기획으로 인상주의 화가들을 조명하고 있다. 인상주의 태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마네부터 인상주의 시작과 끝을 함께한 모네, 그리고 이들의 영향으로 태어난 후기 인상주의 세잔, 고갱, 고흐는 전 세계인에게 시대가 바뀌어도 끊임없이 사랑을 받고 있다.


이들의 영향으로 회화를 연구해 '한국적 인상주의'라는 화풍을 구사하고 자신의 회화적 성과를 이룬 사람이 한반도에도 있다. 오지호 화백이다. 오지호가 탐닉한 회화 세계, 한국적 인상주의란 무엇이며 그의 미술사적 위상은 무엇인지 그의 작품 세계로 떠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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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호, 자화상, 1931, 캔버스에 유화, 60.6×45.5cm, 동경예술학교 소장. 동경 미술학교 졸업 시 제출한 자화상이다. 짧은 붓 터치가 성실하면서도 자유롭다. 좌측으로 들어오는 빛을 경쾌한 붓 놀림으로 눈썹 위, 콧등에 잘 풀어놓았다.


어떤 사상이나 철학, 문화는 지역과 시대를 달리하면서 당대 그 지역의 흐름에 융화되어 또 다른 풍부한 문화로 재탄생된다. 미술도 당연하다. 똑같은 복사판으로 재구성된다면 그것은 아류로 그치고 만다. 서구의 인상주의는 앞선 연재에서 언급했듯이 1874년부터 1882년까지 8번의 전시회를 열었던 비교적 처음과 끝이 분명한 미술 사조다.


르네상스 이후 회화의 공간 구성이 재현을 이상으로 했던 것을 회화는 2차원의 평면 위에 물감이란 질료로 이루어진 재구성임을 자각하기 시작한 첫 사조다. 회화 본질에 대한 자각과 고찰은 시각 경험의 본질에 대한 고찰로 이어진다. 더불어 광학 기술의 발전은 표현 방식과 시각적 논리 연구를 크게 활성화한다. 사회 혁명의 기운은 민심으로 정착되고 보들레르 등의 문인과 철학가들의 이론은 현대미술에 대한 내용적인 변화를 끌어낸다. 회화의 형식적인 면과 내용적인 면을 변화 발전시킨 화가들의 집요한 노력은 세대를 이어 사랑을 받게 된 것이다.



미술사적으로 중요하고 아름다운, 1880년대 주를 이루었던 서구의 인상주의, 특히 인간 감정의 자율성을 확립한 고흐의 후기 인상주의가 어떻게 한국에 정착하게 되었는지를 알려면 해방 후 한반도에 서양화의 흐름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부터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개항 후 서양 문물이 들어오면서 미술계에도 서양의 유화가 들어온다. 한국미술사에서 첫 유화 작품으로는 네덜란드계 미국인 화가 휴버트 보스의 <고종황제 초상>(1899)이 있다. 구한말 서구의 유화는 이미 소개가 되었던 것이고 본격적인 한국 서양화의 흐름은 고희동(髙羲東, 1886-1965, 1915년 도쿄미술학교 양화과 졸업)으로부터 시작한다.


일제 강점기 서양화 유학 1세대들은 아쉽게도 한국 사회에 튼튼한 뿌리를 내리지는 못했다. 다만 고희동, 김관호, 김찬영을 이어 네 번째로 일본 유학을 마친 여성 서양화가 1호 나혜석은 시대적 어려움 속에서도 육아와 함께 경성에서 유일하게 개인 전시회를 성황리에 열었다. 또한 조선미술전람회 참가와 수상은 그녀의 열정적인 작업을 엿보게 하나 불행한 개인사로 작품 대다수가 소실되어 화가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실정이다. 한국에서 서양화의 착근은 고희동, 나혜석과 같은 유학 1세대의 씨앗들이 퍼지면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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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나혜석, 자화상 , 1928년경, 캔버스에 유채, 88×76cm, 수원시립미술관. (우) 나혜석, 천후궁 , 1926, 조선미술전 특선, 조선미술전람회도록. 남편의 근무지였던 중국 안둥에 거주할 때 근방의 유적지를 그린 작품이다. 재미있는 구도에 탄탄한 데생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양화 2세대라 할 수 있는 오지호는 어떤 화가일까? 1906년 암울한 일제 강점기 치하에서 전라남도 화순 동복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보성군수를 지낸 지조 있는 선비 사상이 강한 분이었다. 부친은 1919년 고종황제의 인산을 다녀온 후 비분강개하여 자결한다. 사춘기 소년이었던 오지호의 성장 배경이다. 올곧고 지조 있는 일이라 믿는다면 목숨을 다하는 부모를 성장기에 직면한 것은 그의 삶에 큰 충격이자 이정표가 된다. 부친은 투철한 개화론자로 "비약하라, 새로운 세계로 비약하라"


부친 사망 이후 16세에 서울로 이주하여 휘문고등학교로 전학을 했다. 3학년 때 그는 나혜석의 작품을 통해 유화를 처음 접하고 감명을 받아 양화를 배우기로 결심했다. 졸업 직후 동경 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응시하나, 첫해엔 낙방하고 가와바타학교에서 일 년 동안 수학 후 1926년 동경 미술학교에 입학한다.



동경 미술학교 서양화과 교수는 후지시마 다케지, 오카다 사부로스케 등으로 이들은 모두 일본 양화계의 주류를 이루던 외광파 계열의 관학파들이었다. 오지호는 외광파 계열의 교수 밑에서 수학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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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후지시마 다케지, 이탈리아의 여인, 1909. (우) 오카다 사부로스케, 센강 상류 풍경, 1899, 동경예술학교 소장. 일본 근대 화가들은 프랑스 유학 시절 외광파 화가였던 라파엘 콜랭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두 일본의 화가는 동경 미술학교 서양화과 교수로 오지호에게 외광파의 영향을 준 교수들이다.


외광파는 고전적 사실 기법과 밝은 자연광 표현(실내에서도 인공조명을 거부하고 자연광을 표현)을 구사하는 라파엘 콜랭(Raphael Collin, 1850-1916)을 사사한 '일본 근대미술의 아버지' 구로다 세이키의 영향으로 일본에 정착한다. 고희동부터 나혜석, 오지호 등 모두 외광파의 그림을 습득하는데 우리에게 익숙한 인상주의와는 비슷한 듯하지만 다른 느낌의 그림이다. 즉, 아카데미즘, 사실주의, 인상주의가 적당히 섞인 절충적인 양식이었다.


오지호는 외광파 교수들의 수업을 들으면서도 색채가 풍부할 때 형태가 충실해진다는 세잔의 회화론과 작품에 감화를 받고, '동미(동경미술학교)의 세잔'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세잔에 심취했다. 그가 경도되었던 회화 사조는 형과 색의 회화적 본질을 구축하려 했던 후기 인상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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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호, 풍경, 1927, 캔버스에 유채, 65×52,5cm, 국립현대미술관. 길고 짧은 붓 터치가 고루 쓰였다. 대학 2학년 학생으로 자유로운 터치와 다양한 색감을 공부하던 작품인 듯하다. 마른 가지에 따듯한 햇볕이 느껴진다.


귀국 후 상대적으로 일본인의 간섭이 적었던 개성의 송도고보 교사로 취임한다. 이곳에서 친일 부역과 거리를 둔 채 조선 문화와 전통 서양화 기법 등을 공부하며 자신의 회화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당시 조선의 화단은 식민사관이 깃든 '향토색'의 어둡고 침울한 사조를 보였다. 이는 일본인의 시각에서 보는 조선의 서정성과 원시성을 간직한 작품 경향으로, 문명화되지 못한 이미지들은 식민지를 정당화하는 명분이 되었다. 조선미술전람회는 대다수가 일본인이 심사위원이었고 수상을 위해 그들이 원하는 작품들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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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이인성, 가을 어느날 , 1934, 제 13회 조선미전 특선 . (우) 심형구 , 수변 , 1938, 제 17회 조선미전 무감사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오지호는 세잔과 고흐 풍의 미학을 소화하여 조선 미술의 방향을 잡고자 했다. '맑고 밝은 조선의 자연, 조선의 새 그림을 그리자'는 각오를 세운 것이다. 1938년 그의 나이 32세에 김주경과 함께 2인전의 전시회를 열면서 최초의 컬러 화집을 발간한다. 일제 강점기임에도 순한글로 출판하면서 작품 10개씩과 화론을 실었다.


오지호의 「순수회화론」은 예술의 본질. 미의 본질, 미의 내용, 감정과 이지(理智), 회화의 본질, 색과 형, 예술의 영원성 등 총 10개의 소단원의 글이다.



"예술은 생명의 실현(實現)이다. 예술은 생의 절대 긍정의 세계이며(···) 환언하면 예술은 생명 본성의 실재한 모양이요, 그것은 가장 순수한 모양이다."



오지호는 빛과 시지각을 한평생 연구한 모네의 인상주의 화법보다, 이를 발전시켜 빛과 감정을 함께 쏟아부어 화면을 만든 반 고흐의 후기 인상주의에 감화된다. 오지호의 일기를 보면 "꼬호-의 수법을, 빛을 찬란하게 하자면···"과 같이당시 유행이자 선전의 주된 기류였던 제국주의적 향토색을 강조한 그림에서 탈피하여 한국적 빛을 담은 그림, 빛과 색의 약동을 담은 화면을 연구하기 시작한다. 한국적 인상주의가 펼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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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호, 임금원 , 1937, 캔버스에 유화, 71.3×89.3cm , 개인 소장. 하얀 꽃송이가 흐드러진 사과밭 풍경으로『오지호·김주경 이인화집』(1938)에 수록된 작품이다. 5월 햇볕 속에 3일을 꼬박 사과밭에서 한국의 풍토에 맞는 밝은 생명력을 지닌 강한 그림을 힘찬 붓 터치로 탄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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