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29일 진행한 창간기념 행사 '창신동 예인을 찾아서'의 전편 격인 신세계에서 창신동 구간의 답사가 2024년 11월 24일 문화인문 그룹 '문화지평'의 행사로 진행된 바 있습니다. 30여 명이 참석한 이 행사에 전수정 칼럼니스트가 동행하여 후기를 남겼습니다. 해설은 본지 한이수 대표가 맡았습니다. 3시간 동안 동행한 내용을 글로 정리한 전수정 칼럼니스트에게 감사를 전합니다.(편집자 주)
신세계 백화점 본점을 모를 리는 없지만, 늘 지나치기만 했기 때문에 정확히 어찌 해야 도달할 수 있는지를 살폈다. 전날 분명 ‘명동역 5번 출구’라 웅얼거렸으면서 막상 당일이 되자 회현역에서 하차했다. 백화점이 있을 거 같지 않은 분위기. 이른 아침임에도 남대문 시장으로 뻗은 길에는 이미 사람이 한가득이다. 뭔가 잘못됐음을 깨닫고 지도를 켰는데, 걸어야 하는 거리가 상당해 보인다. 어제와는 왠지 급이 다른 듯한 추위에 손을 호호 불어가며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더니 늦지는 않았으나, 아침부터 나이 듦을 제대로 실감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은행 앞 분수대
답사의 시작을 신세계 백화점 본점에서 한 건 이 일대가 품은 역사 때문 같다. 지금도 서울의 한복판에 걸맞는 번화함을 자랑하지만, 직접 살아 본 바 없는 일제 시대에 이곳은 당대 산업의 중심지와도 같았다. 우선 신세계 백화점 자리에는 미츠코시 백화점 경성점이 1930년 지금과 같은 위치에서 문을 열었다. 개점 당시에는 3층이었으나 위로 층을 한 층 더 올려 현재는 4층이다.
이곳은 다시는 안 나올 천재 작가 이상의 작품 「날개」에 등장했으며, 박완서 님의 「나목(裸木)」을 언급할 때도 빠져서는 안 되는 장소이다. 작품 나목에서 주인공 이경은 미군 PX 초상화부의 점원이며, 화가 옥희도는 미군을 상대로 고향에 있는 가족이나 애인에게 보낼 초상화를 그려 줌으로써 생계를 유지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두 인물이 박완서 본인과 박수근 화백일 거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실제 박완서와 박수근은 1951년 겨울 미군 PX에서 처음으로 만난다. 모두가 전쟁을 피해 남쪽으로 도망갔지만 그들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서울에 남았다. 갓 대학에 입학한 박완서는 꿈에 부푼 대학 생활은커녕 졸지에 삶을 지탱해야만 하는 소녀 가장이 됐다. 그가 미군을 상대로 호객행위를 하면 박수근이 스카프나 손수건 따위에 초상화를 그려 넣었다. 밀레의 <만종>을 보고 그와 같은 화가가 되길 꿈꿨다는 박수근. 역경 속에서도 그는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따스한 시선을 잃지 않았다. 작품 활동을 통해 보통 사람이 지닌 위대함을 여과 없이 표현함으로써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선사했다.
소설의 두 등장인물이 그러했듯 위대한 작가와 화가가 실제로도 사랑했는가를 궁금해한다면 너무 경박하다며 손가락질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위대함끼리는 서로 통한다. 상대의 위대함을 알아보고 서로를 존경하는 태도를 ‘사랑’이라 한다면 두 인물은 사랑했음이 분명하다.
길 건너편에는 조흥은행(현 신한은행)과 더불어 가장 오래된 은행으로 손꼽히는 우리은행이 있다. 강화도조약 이후 우리 경제를 야금야금 좀먹어 가던 일본 금융업계에 대항하고자 1899년 설립한 대한천일은행으로 시작해, 이후 조선상업은행, 한국상업은행, 한빛은행 등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
참고로 조흥은행은 조금 더 걷다 보면 나오는 남대문로에 있었다. 1897년 설립된 한성은행이 이후 동일은행과 합병하면서 조흥은행이 됐다. 1997년 IMF 시절에도 굳건히 살아 남았던 조흥은행은 2006년 신한은행과 합병하면서 더는 조흥은행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게 됐다. 옛 조흥은행 위치에는 현재 신한은행 광교영업부가 있으나, 건물은 새로 지었는지 시간이 읽히지 않는다.
우측으로 시선을 돌리면 서울중앙우체국이 보이는데, 이 역시도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있었다. 당시의 이름은 경성중앙우편국이었다고. 그 옆으로 뻗은 도로를 중심으로 일본인들이 모여 거주하면서 각종 상점이 즐비하게 입점했었으니, 그 시절 '혼마치'라 불렸던 곳은 오늘날 명동 번화가로 고스란히 이어졌다.
-미츠코시백화점 경성점 말고도 미나카이 백화점(현 명동밀리오레 건물), 쵸우지야 백화점(한 때 미도파 백화점이었고, 현재는 롯데 백화점 본점 영프라자), 히라타 백화점(현 고려대연각타워 건물) 등 일대에 백화점이 총 4개나 있었다.
쵸우지야 백화점에서는 1955년에 이중섭 작가의 전시회가 열리기도 했다. 작품 45점이 전시됐으며, 적잖은 작품이 판매됐다는 설명을 들었다. 평생을 가난과 씨름하며 힘겹게 살았다고 알고 있었는데, 문제는 수금에 있었다. 지금처럼 바로 바로 입금 여부를 확인할 수 없었던 시절, 그림이 팔린 것과 실제 돈이 들어오는 것은 별개와도 같았던 모양이다. 작품을 판매한 돈으로 일본 유학을 준비하려 했던 화가에겐 현실이 참으로 혹독하다고 말할 수밖에.
또한, 신세계 백화점 본점 앞 도로는 한때 조선 왕의 행차로였으며, 숭례문을 오가는 전차가 오가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나석주 열사가 폭탄을 투척한 동양척식주식회사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했다. 그야말로 '경성판 월스트리트'였다고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우리은행 종로 금융센터로 쓰고 있는 광통관
청계천 변
청계천으로 향하던 길목, 정확히는 현 롯데호텔 위치에서 반도호텔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노구치 시타가우라는 인물이 작업복 차림으로 당대 최고의 호텔이었던 조선호텔에 갔다가 입장을 제재 당하자 호텔을 지었으니, 그것이 반도호텔이다. 미군정 시절을 거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도 그럭저럭 운영이 됐던 호텔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노후화 등으로 경쟁력이 떨어졌고, 롯데가 사들여 건물을 철거 후 신축하여 1979년 롯데 호텔을 개관했다.
반도호텔의 1층 로비에는 반도 화랑이 있었고, 이 곳에서 박수근의 작품이 전시, 판매되기도 했다. 그의 그림은 한국의 목가적 정서를 잘 반영한 덕에 외국인들에게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또한 이곳에서는 후에 갤러리현대 회장이 된 박명자 씨가 근무하며 화랑 일을 익히기도 했다. 롯데호텔 1층에는 한떼 ‘페닌슐라’라는 이름의 카페가 있었다. 반도호텔로부터 비롯된 명칭이었으리라 짐작된다.
정조대왕 능행 반차도
왕이 탄 말. 그러나 왕은 보이지 않는다
잠시 청계천을 따라 걷는 시간을 가졌다. 정조대왕이 혜경궁 홍씨 등과 더불어 그의 아버지 장조(사도세자)가 잠들어 있는 화성 현륭원 참배를 위해 행차하는 모습을 도자 타일로 재현한 반차도가 청계천 벽면을 수놓고 있었다. 본래의 그림은 목판화로, 같은 그림의 변주 재현이지만, 인물 하나하나의 익살스러운 모습이 잘 표현돼 있는 것이 궁중화가 김홍도의 화풍을 느낄 수 있다. 원래의 반차도는 행사를 앞두고 동선 확인 등을 위해 그려지는 것이다. 이 그림을 토대로 행차가 이루어졌다고 본다면, 사료 측면에서도 높은 평가가 가능하지 싶었다.
인물 하나하나가 누군지를 헤아릴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그럴 시간적 여유가 없거니와 공기가 부쩍 차가워졌다. 지금의 헌병 격인 군뢰가 기다란 막대 같은 걸 들고 행차의 가장 선두 자리에 선 것과 경기감사, 서리, 장교, 총리대신 체제공이 그 뒤를 따르고 있는 모습, 혜경궁 홍씨와 정조의 누이 청연군주, 청선군주 등을 살폈다. 반면 왕의 얼굴은 함부로 그려서는 아니 되었기에 정조대왕의 모습은 반차도에 그려지지 않았다.
가장 익살스러웠던 부분은 나인, 호위 군사 들이었다. 장옷으로 얼굴을 가린 채 말을 탄 나인들을 힐끔힐끔 훔쳐보는 호위 군사의 모습이라니. 이 그림을 그리며 김홍도는 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행렬의 말미에 병조판서를 등장시킨 것도 의미심장했다. 직책을 따지자면 그는 행렬의 안전 전반을 책임져야 하나, 병조판서 심환지는 여러모로 정조대왕과는 관계가 껄끄러운 인물이었다. 이를 고려한 배치가 아니었을지, 조심스레 예측을 해보지만 확인할 길이 없다.
김홍도에 대해서는 말이 많다. 우선, 그의 고향을 두고 경기도 안산시라는 주장과 청계천 사람이라는 주장이 맞선다. 그 자신이 서호(서울의 마포에서 서강에 이르는 15리를 이르는 말)라는 별호를 사용했다는 점이 경기도 안산시를 주장하는 이들의 근거이다. 이에 반해, 청계천 쪽이라고 보는 입장에서는 ‘낙성 하량인’이라고 김홍도를 지칭한 기록을 주목한다. ‘하량’은 수표교 동쪽 하량교를 지칭하며, 현재의 위치는 관수교 즈음일 것으로 추정한다.
그가 선한 관리는 아니었다는 말도 들린다. 연풍(현 괴산 지역) 현감으로 부임한 김홍도는 극심한 가뭄을 한 차례 불심으로 극복하는 경험을 한 후로 불교에 심취한 나머지 정사 돌보는 일에 소홀해진 듯하다. 결국 부정적인 여론으로 파직을 당했다. 당시 상소문에는 ‘김홍도는 고을의 수장인 몸으로 즐겨 중매나 행하고 노비와 가축을 상납케 하고 사냥이나 즐겨하여 원망과 비방이 자자합니다’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정조가 그를 아껴 궁으로 불러들임으로써 의금부로 압송되는 사태를 피할 수 있었다.
청계7가 사거리까지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박수근의 그림 ‘빨래터’를 재현해 놓은 것 같은 터에서 멈추어 잠시 그가 남긴 그림을 살폈다. 때는 하천이 복개되기 전,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들어 아비규환과도 같은 상황이 나날이 전개됐던 시절이다. 화가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길에 나앉아 물건을 파는 우리네 어머니들의 모습을 주목했다. 좌판을 벌인 이들의 한없이 우울한 표정과 함께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던지 손님을 외면할 듯 뒤돌아 앉은 이의 모습도 화폭에 담았다. 시장에 오로지 여성만 존재했던 건 아니다. 그렇지만 당대 경제의 주역은 여성이었다. 대부분의 젊은 남성은 전장에 나가 생사조차 확인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동네에 남은 남성들을 그렇다고 운이 좋았다고만 볼 순 없었다. 작품명 <실업>. 드러누운 남성의 모습에선 절망마저 뛰어넘은 나머지 어떠한 의지도 읽히지 않았다.
가난한 이들의 공간은 여러모로 열악했다. 생활 과정에서 생성된 오물은 여과 없이 하천에 버려지기 일쑤였다. 개인이 가난한 거 이상으로 나라도 힘겨웠기에, 위생 개선을 위한 투자를 고민할 수 없었다. 가장 단순하고, 어찌 보면 무식하기까지 한 하천 복개 카드를 꺼내 들었던 건 당시로선 최선이었을 수도 있다. 사거리에 위치한 건물은 원래 8층짜리였으나 이러저러한 개선 사업의 과정에서 2층까지만 남았다. 3층에서 8층을 댕강 자른 것을 두고 ‘패기’라 칭하기도 뭐하고, 그런 일이 가능했다는 점 자체가 경악스러웠다. 문화는 끈질기다. 인위적으로 잘라내도 뿌리가 살아 있다면 언젠가는 부활한다. 많은 사람들이 문정동 쪽으로 이주했지만, 동묘, 황학동의 벼룩시장, 신설동 풍물시장 등이 당시 난전의 흐름을 잇고 있음이 신기하다.
동대문 문구 완구 종합시장
박수근이 다니던 창신교회
문구완구거리(종로52길 21-1)로 접어들기에 앞서 박수근 집터를 지났다. 박수근의 그림 한 점이 걸려 있고, 좁다란 골목 초입에 잘 보이진 않지만 집터를 알리는 표지판도 설치됐다. 가시성만을 놓고 본다면 전 문화재청장 유홍준이 썼다는 글씨가 눈에 더 잘 들어왔다. 다양한 작품이 다 이곳에서 창조됐다는데, 양구가 박수근의 도시로 거듭나는 동안 서울은 무얼했는지 묻고 싶었다. 골목을 지나 그가 다녔다는 동신교회에 도달해서까지도 이와 같은 생각은 변치 않았다. 오로지 명예도로명 ‘박수근길’로만 존재하기에는 안타까움이 컸다.
동대문역으로 이동하는 동안은 폐허와도 같은 분위기를 맛보았다. 사람이 떠나고 황량해진 집마다 출입을 금한다는 노란 스티커가 붙었다. 공동 화장실이 있으며 저렴한 가격에 잠만 잘 사람을 구한다는 방이 붙어 있는 여관과 여인숙 들 사이로 ‘시대여관’이라 이름 붙은 갤러리가 하나 있었다. 젊은 커플이 이를 숙박 시설로 오인했던지 안으로 들어갔다가 바로 나왔다. 조금은 민망한 표정의 남성과 연신 담배 연기를 내뿜는 여성. 왠지 이 골목은 그들과 어울리지 않는 듯했다.
그렇다고 이 일대가 마냥 어두침침했던 건 아니다. 각종 문구류를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고 있는 가게들이 몰려 있는 거리는 ‘낙후됐다’는 말만으로는 담아낼 수 없었다. 해외까지 가서 굳이 특색 있는 벼룩시장을 찾고, 국내에서도 공방 거리 등에 탐닉하는 현대인의 습성을 고려한다면 이곳 또한 얼마든지 매력적인 공간으로 보일 수 있다.
명동 쪽에서 걸어서 이동하기에 창신동은 거리가 있었다. 그냥 걷는 게 아니라 주요 지점마다 해설을 곁들여야 했으므로 시간이 부족했다. 추후 기회가 닿는다면 창신동 쪽 이야기는 별도로 엮어 다시 한 번 살피자며 오늘의 자리를 파했다.
[창신동 예인을 찾아서 ②] 신세계에서 창신까지 < 답사 < 아트체험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