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 '다윗'(1504)
미켈란젤로의 다윗상은 완벽에 가까운 비례, 팽팽한 근육, 사선으로 쏘아보는 시선으로 르네상스 인문주의가 구현한 이상적 인간형이다. 그러나 우리가 마주한 다윗상은 단지 예술적 균형과 해부학적 조화의 산물로 보기엔 충분하지 않다. 이 조각상은 하나의 전투를 전제하고 있다. 그것은 돌 하나로 거인을 무너뜨린 전투다.
전설은 다윗을 양치기 소년으로 설명한다. 나이가 어리고, 병사도 아닌 사람. 그래서 골리앗 앞에 선 그의 용기가 강조된다. 그러나 그를 정말 이해하기 위해선, 다윗이 그 당시 어떤 전투병의 역학을 했는지 이해해야 한다. 그는 양치기이자, 투석병이었다. 고대 군대에서 투석병은 명백히 분화된 전투 병종이다. 단순한 돌팔매가 아니었다. 현대의 저격병이자 포병에 해당했다.
투석기
고대 아시리아는 이 사실을 가장 먼저 전술화 한 문명이다. 신아시리아 제국의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기원전 745~727 재위)는 투석병을 정규군으로 편제했다.
아시리아의 투석병
‘니네베(Nineveh)’의 부조에는 성벽 위에 올라가 돌을 던지는 투석병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공성 무기가 발전하기 전, 고각 투사 무기였던 투석은 사다리와 충차를 지원하는 데 특화된 병종이었다. 아시리아가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지배할 수 있었던 힘 뒤에는 기병과 더불어 투석병이 있었다. 돌은 분당 수백 발로 날아갔고, 숙련된 투석병 수십 명이면 적군의 고급 병력을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 있었다. 육중한 갑옷을 입은 보병, 정지한 전차, 속도가 느린 기병 모두가 타깃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정밀 유도무기와 비슷한 역할을 수행한 셈이다.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린 것은 기적이 아니라 전술적 승리였다. 골리앗은 철기 문화의 상징이었다. 거대한 체격, 무거운 갑옷, 큰 창과 검. 그러나 이런 중무장은 민첩성을 앗아갔다. 다윗은 이를 정확히 이해했다. 돌 하나가 정확히 이마를 강타했고, 골리앗은 쓰러졌다. 다윗은 달려가 그의 검을 빼어 목을 베었다.
카라바조,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 1606, 개인 소장
이 일련의 과정은 치밀한 군사 훈련과 상황 판단, 숙련된 전투 감각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당시의 투석은 현대의 기준으로도 놀라운 살상력을 갖는다. 투석구는 초속 35m의 속도로 돌을 날렸다. 이는 시속 130km를 넘는 야구공에 맞먹는 속도이며, 경량 탄환 수준이다. 사거리도 50m를 넘었다. 다윗은 당시 군 편제로 보면 정면 보병이 아니라 원거리 타격 병과였고, 실전에 능한 포병이었다. 골리앗은 무장은 강했으나 둔했고, 근거리 전투에 최적화되어 있었다. 이 전투는 돌과 검의 싸움이 아니라, 운동성 대 중량, 기동력 대 방어력의 충돌이었다.
탱크를 향해 투석하는 아이 /출처: 경향신문
그러나 이 이야기의 시간은 멈추지 않았다. 오늘날 투석은 또 다른 맥락에서 등장한다. 이스라엘군이 점령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소년들은 탱크와 병력을 향해 돌을 던진다. 어떤 소년은 밤중에 체포된다. 15세 소년 파리스 오데는 투석 도중 총에 맞아 사망했다.
투석 행위를 처벌하기로 한 이스라엘 /출처: 경향신문
이스라엘은 2015년 형법을 개정해 돌 던지기를 중범죄로 규정했고, 최고 20년형을 내릴 수 있게 했다. 이미 수천 명의 팔레스타인 청소년이 같은 이유로 수감되었다.
이스라엘이 다윗이던 시절, 투석은 정의였다. 지금 팔레스타인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헤겔은 역사가 반복된다고 말했다. '한 번은 희극으로, 한 번은 비극으로.' 고대의 투석은 승리의 상징이었고, 지금의 투석은 저항의 상징이다. 같은 행위지만 다른 맥락, 다른 권력 구조에서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다시 예술로 돌아가 본다. 미켈란젤로의 다윗은 전투 전이다. 눈빛은 예리하고 손은 긴장되어 있다. 피지컬은 완성되어 있고, 시선은 정면을 응시한다. 르네상스가 상정한 인간의 전형이다.
도나텔로, 다윗, 1440
도나텔로의 다윗은 소년이다. 전투 후다. 갑옷 없는 몸, 부러진 골리앗의 머리 위에 서 있다. 관능적이고 모호하다.
베르니니, 다윗, 1623
베르니니의 다윗은 다르다. 그는 지금 돌을 던지고 있다. 표정은 찡그려져 있고, 몸은 뒤틀려 있으며, 에너지는 응축되어 있다. 정지된 순간 속에 움직임이 있다. 세 조각상은 서로 다르다. 하나는 전투 전, 하나는 전투 후, 하나는 전투 중. 그들은 모두 다른 시대의 시선이다. 그러나 공통점은 있다. 싸움은 피하지 않는다. 그것이 다윗이다.
[미술 속 전쟁 이야기 ⑤] 미켈란젤로의 다윗, 그리고 팔레스타인의 아이들 < 미술일반 < 미술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