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문 공원을 그린 이재영 작품
독립문 앞의 영은문 기둥
오늘은 우리나라 근대역사에서 가장 어둡고 슬픈 현장 속으로 손자들과 나들이를 떠난다. 사람들은 누구나 역사와 문화, 자연이 살아 숨쉬는 길을 걷고 싶어 한다. 쉽고 즐겁게 걸을 수 있는 길이라면 더욱 좋을 것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이와 함께라면 금상첨화다. 오늘 가는 곳은 역사 문화가 살아 숨쉬는 곳이다. 두 손자를 양 옆으로 거느리고 가는 나의 마음이 천군만마를 얻은 듯이 뿌듯하다. 버스와 전철을 이용해서 도착한 곳은 서대문구 현저동의 서대문 독립공원. 독립공원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항거하다 옥고를 치렀던 애국지사의 자주독립 정신을 후손에게 기억시키기 위해 1992년 8월 15일에 개원했다. 나는 공원을 산책하면서 우리의 슬픈 역사 이야기를 손자에게 들려주려고 한다. 이를 통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면 더 좋은 일이 아닐까?
손자들은 할아버지의 설명을 평소와 다르게 차분히 듣고 숙연한 표정도 지었으나 금새 뛰어다니며 공원을 누볐다. 그래서 동심이 좋은 것이다. 봄날의 아이들, 역사는 흘러가지만 이들이 미래의 주인공이다. 공원은 아래서부터 독립문, 서재필 동상, 유관순 동상, 3.1 독립운동 선언 기념탑, 독립관, 순국선열 추념탑이 있고, 조금 위로 올라가면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 자리 잡고 있다. 더 위로 올라가면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까지 자리하고 있다.
초창기 독립문의 모습
서대문 독립공원 남쪽 초입에는 독립문(사적 제32호)이 있다. 이곳은 과거 조선이 중국의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1407년에 세워졌던 모화관(慕華館)이 있던 곳이다. 모화관은 한자 그대로 중국을 사모한다는 말이다. 모화관의 정문이 영은문(迎恩門) 이다. 은혜로운 천자의 나라에서 온 중국 사신을 영접한다는 뜻이다. 중국을 사대하는 끝판왕이다. 그런데 이 영은문을 헐고 이곳에 독립문을 지었다. 우리나라가 이제 다른 나라에 의해 좌지우지 하지 않겠다는 독립의 표현이다. 이것을 추진한 곳은 독립협회로 1896년에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이 주축이 되어 대한제국 황실에서 만들었다. 독립협회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 독립신문도 만들었다. 독립신문이 창간한 4월 7일을 신문사들은 '신문의 날'로 지킨다. 독립문, 독립협회, 독립신문, 모두 독립이라는 말이 포함되니, 당시 조선이 얼마나 독립을 희구했는 지 알게 되어 선조들의 뜻에 머리가 숙여진다. 그러나 이 독립협회를 만든 사람들이 나중에는 모두 친일로 돌아섰으니 역사는 참으로 아니러니하다.
두 손자가 독립문의 내력이 적힌 안내문을 보고 있다
독립협회는 당시 3,825원을 모금하여 영은문을 허물고 짓기 시작하여 1897년 11월 20일에 완공했지만 영은문을 받치고 있던 두 개의 기둥은 기념으로 남겨 두었다. 수치의 역사도 남겨 두어야 나중에 후손들이 기억하지 않겠나? 그래서 우리는 독립문을 보면서 자주독립정신을 기리고 그 이전 수치의 역사도 지금 기억하는 것이다. 독립문을 만든 시기는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고종이 황제로 등극한 10월 12일에서 한 달 정도 지난 11월 20일이다.
"정말 삼천팔백이십오원요? 지금 같으면 내가 다 낼수 있는데."
손자들과 당시 화폐의 가치를 현실과 비교하며 웃었다. 어쨌든 그 모금액으로 프랑스의 개선문의 형태와 흡사한 독립문을 세웠다. 45cm × 30cm 크기의 화강암 1,850개를 쌓아 만든 독립문은 높이가 14.28m, 너비가 11.48m로, 가운데 아치형의 홍예문이 있고, 내부 왼쪽에 옥상으로 통하는 돌층계가 있으며, 꼭대기에는 난간을 둘렀다.
"여기서 사진 한방"
손자들은 독립문 안과 밖에서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었다. 독립문에는 대한제국의 상징인 이화 무늬가 방패 모양을 한 문양판에 새겨졌다. 양쪽의 현판은 한글과 한자로 독립문 글자를 넣었고, 좌우에는 태극기의 문양도 보인다.
일제시대에는 독립운동 탄압의 일환으로 독립관을 철거하였고 1997년에 이곳을 독립관이라는 이름으로 복원하여, 순국 선열 3,000여 명의 위패를 봉안하는 추모의 집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탈바꿈한 서대문 형무소
공원의 중심에 있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일본 제국주의가 지은 근대식 감옥으로 1908년 10월부터 1987년 11월까지 약 80년 동안 사용되었다. 1908년 경성감옥, 1912년 서대문감옥, 1923년 서대문형무소, 1945년 서울형무소, 1961년 서울교도소, 1967년 서울구치소로 여러 차례 이름이 변경되었다. 이후 이 현장을 보존하여 역사의 교훈으로 삼고자 1996년 11월 5일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라는 이름으로 개관하였다.
역사관은 3.1 운동 직후 유관순 열사가 투옥되어 숨을 거둔 지하 옥사와 감시탑, 고문실, 사형장, 옥사 7개 동을 이용하여 전시관을 꾸며 일제의 만행을 상기시켜준다.
"대한독립만세!!"
"유관순 만세!"
큰손자 형주가 그린 유관순열사 동상
손자들은 만세를 부르면서 독립만세를 불렀으나, 내 눈에는 피에 젖은 태극기를 흔드는 것처럼 보였다. 독립지사들의 열의에 가슴이 뭉클해지는 감정을 추스리기가 쉽지 않았다. 이처럼 우리의 슬픈 역사가 담긴 서대문 독립공원을 걸으면서 할아버지는 어린 손자에게 나라를 잃고 싸우다 목숨을 잃은 순국 선열의 희생정신을 이야기해 주었고, 이를 통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도록 했다.
이처럼 도시에서 가깝게 애국지사의 현장을 방문할수 있는 독립공원은 지하철 3호선을 이용하여 독립문역 4번 출구를 통해 찾을 수 있다.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방문해야 하는 곳이다.
[손자에게 들려주는 서울 이야기 21] 역사공부와 쉼을 얻을 수 있는 서대문 독립공원 < 문화일반 < 문화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