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원의 땅 몽골-초록
몽골에 대한 인식의 시작은 칭기즈 칸 이라는 이름을 접하면서다. 역사 공부 이전부터 익히 들어왔던 익숙한 이름이다. 칭기즈 칸에 대한 궁금증이 몽골에 대해 알아가는 동기가 되었다. 알렉산더대왕을 『플루타르크 영웅전』을 통해 먼저 알았듯이 말이다.
지구본에서 본 몽골에 대한 지식보다 귀로 들은 칭기즈 칸이 더 먼저였으니 그의 명성으로 몽골을 공부하게 된 경우다. 중국과 유라시아와 서유럽을 정복한 그는 ‘전 세계의 군주’라는 명칭을 얻는다. 알렉산더 대왕 이후 가장 넓은 영토를 정복한 칸의 몽골이, 현재의 작은 영토와 문화적으로도 뒤쳐진 나라가 되었는지는 역사의 아이러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정복한 나라에서의 융화정책으로 헬레니즘 문화를 탄생시킨 업적을 생각하면, 칭기즈 칸은 몽골의 초원과 사막, 추운 기후와 유목민의 생활환경 때문인지 정복 외에 인류에게 남긴 뚜렷한 문화 업적이 없지 않나 생각한다.
이러한 몽골을 나는 두 번 방문한다. 처음 방문했을 때, 자연 풍광에 마음을 온전히 빼앗겼기 때문이다. 울란바토르를 벗어나 테를지 국립공원으로 향하는 길의 자연풍광은 신이 내린 축복 같다. 기괴한 바위와 나무가 군데군데 높은 지대를 감싸면 그 아래로 초록 초원이 넘실댄다. 짧은 여름 잠깐 볼 수 있는 초록의 초원. 충만한 초원 멀리 한 무리의 말들이 지나간다. 흰 꽃처럼 하얀 몽골 게르 들이 점점이 모여 있다. 사람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는 너른 초원. 멀리 보이는 게르는 초록의 초원으로 더욱 희게 보인다. 스위스 알프스의 하이디가 뛰놀던 들꽃 초원과 청명한 하늘이 생각난다. 프랑스 몽블랑의 광활한 산과 구름과 들꽃이 흐드러진 언덕의 트레킹이 새롭다. 햇살이 포근한 초원에는 정적만이 흐른다.
한낮의 몽골 초원
몽골 초원의 동물들은 행복하다
지나가는 차조차 없는 뻥 뚫린 길과 투명한 하늘만이 함께한다. 하늘의 두둥실 구름들이 계속 따라온다. 길동무가 따로 없다. 이 아름다운 몽골의 구름과 하늘만, 그리고 사진 찍는 작가들이 있다. 느끼는 감성은 비슷할 텐데 재현으로 이끌어 내는 걸 보니 그들만의 작가 정신이리라. 잔지바르 섬의 하늘과는 느낌이 다르다. 안데스 산맥을 넘으며 하염없이 바라보던 창공과도 다르다. 부탄의 창공도 떠올려 보지만 몽골의 하늘은 무언가 다르다.
그 다름은 초록의 초원과 투명한 하늘과 실바람이 만들어 낸다. 눈이 시원한 초록의 풀내음과 초원이 뿜어내는 부드러움과 포근함, 초원 위로 살포시 내려앉은 햇살, 언덕에서 불어오는 실바람의 공간감에서 오는 느낌이리라.
한가로운 몽골 초원
테를지 국립공원에서의 강과 침엽수림과 말과 게르가 만들어 내는 풍광을 만끽하며, 게르에서 며칠 밤을 보낸다. 내가 사는 나라와 다른 문화를 체험하는 행복은 여행의 보상이다. 다른 문화를 체험하는 것 또한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다.
인간의 생활 문화가 각각 다른 것은, 주변 환경 때문이며 인간이 그것에 적응하며 생활 방식을 만들고 발전시키는 가운데, 그 곳 만의 독특한 문화가 생겨난다. 몽골의 추운 기후와 유목민에게 이동이 편한 게르는 그 들 만의 주거 문화다. 식생활이 고기가 주식인 것도 추위를 이겨내기 위한 그들만의 지방 섭취 방법이다.
테를지 국립공원을 뒤로하고 드디어 야생을 체험하는 흡수 골로 향한다. 어머니의 바다로 칭하는 흡수 골 호수는 몽골의 울란바토르에서 북서쪽, 러시아 시베리아를 접하는 바이칼 호수 방향으로 계속 가면 흡수 골을 만난다. 침엽수림에 둘러 쌓인 담수호인 흡수 골은 몽골의 스위스라고 불리며 몽골인 들의 버킷리스트이기도 하다.
예전엔 바이칼 호수와 붙었으나 지각변동으로 분리되었다 한다. 현지인들에게 흡수 골 안내를 맡긴다. 고생스럽지만 현지인들 방식으로 가고 싶었고, 그런 야생의 여행으로 여러 가지 체험을 하고 싶어서다. 초원과 사막과 습지와 거친 돌길에 유용하게 만든 차를 앞세우고, 허름한 텐트에서 숙식을 하며 간다. 현지인들을 앞장세우니 예기치 않은 재미있는 일들이 많다.
준비한 도구들을 보니 우리나라의 옛 어른들이 즐기던 천렵이 생각난다. 허술한 조리 도구들을 잔뜩 싣고, 돌길, 계곡, 밭, 습지, 가리지 않고 흡수 골 한 방향만 바라보고 달린다. 바퀴가 습지에 빠져도 멈추지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물이 흥건한 습지 위에 텐트를 치고 잔 날도 있다. 그들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 피곤으로 깊은 잠에서 깨어보니 옷이 다 젖는 줄도 모르고 잤다. 그런데 거기에 반전이 있다. 주변 아무것도 없는 너른 초록의 습지 한가운데서 아침 안개가 만들어낸 몽환적인 동양화를 본다. 습지 초원과 하늘의 경계도 모호하고, 습지에 바퀴가 잠긴 자동차와 나와 땅과의 경계가 모호하다. 습지 위에서 용케도 뜨거운 아침 차를 끓여주는 그들이 신기하다. 뻣뻣한 몸이 따듯한 운기로 깨어난다.
며칠을 달려가는 흡수 골 가는 길엔 온갖 들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하늘의 구름도 둥실 둥실 신이 나서 따라온다. 이들과의 동행으로, 거친 길로 인한 온몸이 춤을 추는 여정임에도 지루하지도 피곤한 줄도 모른다. 프랑스 몽블랑을 트레킹 할 때도 트레킹 내내 지천인 알프스의 들꽃들로 행복했다. 아프리카 메마른 사바나를 지나는 길목에도 들꽃들은 여지없이 총 천연색이다. 나라 전체가 화산지대인 아이슬란드의 잠깐의 여름, 군데군데 초지에는 들꽃들이 질세라 서로 다툰다. 그 중에서도 이름 모를 보라색 꽃의 들판은 초록의 풀들과 어우러져 캔버스에 보라색을 흩뿌려 놓은 듯 했다.
문득 강원도에서 자연을 그리는 화가 김종학이 생각난다. 그는 생동하는 색채와 리듬으로, 꽃이 핀 계절과 공기를 담아내어, 자연을 다시 태어나게 한다. 그의 그림 앞에 서면 깊은 숲속을 거니는 듯하다.
북쪽으로 갈수록 흙길은 더 거칠어지고, 가파른 언덕과 높은 산이 나타난다. 나무가 많아지더니 점차 침엽수림이 보인다. 산을 몇 개 넘으니 저 멀리 흡수 골 호수 언저리가 보인다. 가까워 보이는 호수 옆 게르는 한참을 가도 그 자리에 있다. 침엽수림의 호수 가장자리에 위치한 하얀 게르는, 초록 숲과 짙푸른 물색을 만나 유난히 희게 보인다. 집채가 큰 게르는 초록 오지 숲의 하얀 성처럼 보인다.
게르에 짐만 내려놓고 호숫가로 발길을 재촉한다. 수심이 깊어 물색이 검푸른 흡수 골의 석양을 보기 위해서다. 흡수 골을 온전히 체험하고자 현지인들의 방식으로 며칠을 산 넘고 강 건너 달려온 호수. 흡수 골에서 지낼 며칠의 여정에 가슴은 두근거린다. 흡수 골 호수의 한 낮과, 석양과 그리고 어둠이 서서히 내려앉는 시시각각의 호수 풍경과 색은 조물주가 만든 빛과 공기의 축제장이다.
흡수 골 한낮의 풍경
흡수 골 호수에 어둠이 내리다
흡수 골 호수 황혼에 물들다
다음날 이른 아침, 게르 안의 장작 타는 소리가 나의 등을 떠민다. 비밀에 쌓인 듯 한 선선한 아침 공기가 내려앉은 호숫가의 산책. 괴테가 즐겨 걸었던 하이델베르그의 산책길이 이에 비길까 싶다. 호숫가 옆 길 따라 걷다보니 풀 뜯는 말들을 만나고, 호수의 아침 안개도 만난다. 호숫가로 밀려와 잔돌들을 때리는 물소리가 상쾌하고, 숲속 벌레들과 새들의 지저귐도 정겹다. 자연과 모든 생물이 깨어나는 아침. 신선한 공기로 나의 몸도 깨어난다. 몸속으로 들어온 신선한 공기는 한 바퀴 휘돌아 오장육부까지 깨운다.
오늘은 종일 숲에서 말을 탄다. 길들여진 말을 타고, 침엽수림을 걷고, 나뭇가지에 부딪히며 달리는 체험은, 색다른 자연에서의 신나는 모험이다. 한국과는 나무가 다르고, 숲이 다르고, 물이 다른 오지. 나는 이런 오지가 좋다. 숲속에는 뿔이 큰 사슴들이 유유자적 고고하게 나무 사이를 노닌다. 말과 사람이 지나가도 개의치 않는다. 이런 색다른 체험의 호사가 고맙다. 출발 전 많이 준비한 보람을 느낀다.
나는 호숫가 근처 풀숲에서 노천 화장실을 만난다. 잡풀과 온갖 꽃들이 뒤섞여 있는 곳에, 나무판자로 3면만 세워 놓은 화장실이다. 겨우 가슴을 가릴 정도의 높이다. 문도 없고 천장도 없다. 그야말로 열린 공간이다. 화장실 앞에 호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고개를 들면 파란 하늘에 구름한 점 떠 있다. 바람은 풀내음, 꽃내음을 몰고 와 인간의 냄새를 날려 버린다. 세상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화장실! 완전 밀폐도 오픈도 아닌 그런 긴장감 없는 화장실. 작가의 시선으로 그림을 그려보고 싶은 엉뚱한 충동을 느낀다.
흡수 골 호수의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화장실
자연을 사랑한 빈센트 반 고흐는 본인의 <나무와 덤불>이라는 작품을 그리고 말한다. ‘어떤 때는 문명 세계를 전혀 느낄 수 없는 장소가 필요해... 어떤 때는 바로 그런 장소에서 평안을 얻을 수 있어’ 고흐의 작품과 그의 말을 되새겨 본다. 자연의 힘과 영향력에 대해 곱씹어 보게 하는 말이다.
흡수 골 호수 청정지역에서 낚시한 물고기로 호사스런 한 끼의 만찬을 즐기고 이내 숲속으로 향한다. 나무 기둥을 세우고 마른 풀로 엮어 만든 세모 천막이 숲속 안에 있다. 고개를 들이밀고 들어가 보니, 거기에는 주술사가 앉아있는 외국 방문자들 앞에서 무언가 열심히 말을 하고 있다. 언어를 모르니 주술사의 얼굴 표정과 침묵하고 있는 주문자들의 눈을 번갈아 쳐다본다. 숯불만이 천막 안의 어둠을 밝힐 뿐 천막 안의 공기가 무겁다. 아마도 이곳 땅의 기운이 남 다른가 싶다. 숯불 위 시커먼 냄비로 주술사 할머니가 만들어 준 투박하지만 담백하고 구수한 빵 맛이 더 앞선다.
흡수 골 호수 여행을 마무리하는 저녁. 처음으로 양 잡는 모습을 지켜본다. 고통을 주지 않고 순식간에 처리하는 그들의 손놀림이 익숙하다. 전통적 양고기 요리 방법인 허르헉으로 아쉬움을 달랜다. 현지인들이 밝혀 준 캠프파이어가 인상적이다. 죽은 큰 나무를 통째로 여러 개 가져와 둥그렇게 세워 불을 밝히니 어마한 불꽃이 하늘을 향해 날아간다. 캠프파이어가 아니라 세상을 밝히는 특별한 의식 같다. 불꽃이 타들어가 하늘로 뻗치던 불길이 잦아지자 그 자리를 대신하는 별들이 보인다. 주먹만 한 별들은 어둠이 짙어질수록 점점 머리위로 내려온다. 주먹만 한 별들은 다이아몬드로 변해 눈이 부시다. 눈이 호사를 한다. 주변 현지인들을 모두 불러 나무가 모닥불이 될 때까지, 오랜 시간 양고기를 나눠 먹으며 아쉬움을 달랜다. 붙잡으려 해도 흡수 골의 여름밤은 이렇게 간다.
바이칼 호수의 밤하늘도, 옥룡설산의 밤하늘도 빙하 호수가 많은 파타고니아 밤하늘도 흡수 골의 별밤을 따라올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또 한 번의 방문으로 그 감동들을 다시 경험한다.
[오지화가 이향남의 예술기행 ④] 초원의 땅 몽골-초록 < 칼럼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