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생애] 이승우. 리뷰
친구들 사이에서 용한 점쟁이로 통했었다. 시작은 늘 연애상담. 결국은 인생 전반에 걸친 하소연의 향연. 하소연하는 친구들 대부분은 답정너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왜 그렇게 내가 내놓는 해결책에 주목했을까. 지나친 이입으로 내놓은 해결책들은 그저 사이다 한 모금에 지나지 않았다. 트림 한번이면 잊을 시원함. 물론 지금은 은퇴한 점쟁이다. 그 친구들은 모두 옛 친구가 되었다. 옛 친구가 친구였던 때 내게 따져 물었었다. “너도 나처럼 좀 털어놓으면 좋잖아. 나는 그것이 되레 서운해.”
털어놓을 수 없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털어놓기 이전에 그럴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이해시키고 이해받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런 만큼 사랑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사랑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상대적으로 사랑에 대해 더 진지하다. 더 진지하기 때문에 함부로 하지 않는다. 함부로 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시도하지 못한다. 함부로 하는 것은 사랑을 모독하는 것이기 때문에, 함부로 함으로써 모독하느니 아예 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피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두려움은 멸시가 아니라 공경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소설 속 형배는 나를 많이 닮았다. 형배를 보며 남들 앞에서 사랑에 대해 이야기할 때 작아졌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진지해서 놀림거리가 되어야 했던 순간들. 형배는 이전에 사귀었던 선희에게 얼마 이상의 마음을 줄 수 없었고, 결국 헤어지게 된다. 이후 회사동료 결혼식에서 2년 만에 우연히 그녀를 만나게 되고, 이전과 달라진 마음에 귀 기울인다. 형배는 갑작스런 두근거림이 사랑일지도 모른다 생각하지만 여전히 사랑이 무엇인지 몰라 힘들어한다.
사랑을 믿지 못하는 네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정말로 믿지 못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이들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단지 자기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자기가 누군가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할 뿐이다. 타인에 대한 불신은 자신에 대한 불신의 여파에 지나지 않는다. 이 불신의 뿌리에 있는 것이 사랑의 특별함에 대한 선입견 – 아무나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라면 아주 나쁘지는 않다. 반대로 사랑의 평범함 – 아무나 사랑한다, 그러나 나는 아니다, 이기 때문에 위험하다. 특별해서가 아니라 특별하지 않은데도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위험하다. 평범하고 도처에 널린 것이 사랑인데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위험하다.
선희는 형배의 옛 연인이자 새로운 구애 대상이다. 갑작스런 고백에 당황했던 것은 아마도 형배 자신보다 형배를 잘 알고 있어서였을 터. 또한 선희의 새로운 사랑이 아이러니하게도 형배와의 사랑을 하소연하는 자리에서 싹텄기 때문이기도 했다. 선희는 취기에 이전의 사랑에 대해 토로하고, 이전의 사람에게 듣고 싶은 말을 영석에게 부탁했을 뿐이었다. 그렇게도 사랑은 시작되었다.
조금 짜증이 난 그녀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린 다음 그 말을 했다. “나한테 사랑한다고 말해줄래요? 그 말을 하기가 그렇게 어려워요?” 가로등 불빛을 받아 눈송이가 반짝거렸다.
사랑한다고 말했기 때문에 사랑하는 자가 되었음을 알게 된 것은 신비였다. 말이 힘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사랑도 그러했다. 그가 한 말은 ‘사랑한다’였다. 그녀가 자기를 사랑한다고 말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사랑이 자기 안에 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그를 흥분하게 했다
영석은 단지 선희에게 부탁받은 대로 ‘사랑한다’는 말을 함과 동시에 사랑에 빠졌다 믿는다. 하지만 사랑에 대해 가장 모르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이전의 형배와 마찬가지로 영석은 사랑에 대해 모르면서 탐구하지도 않았다. 당연히 그런 태도가 상대방을 힘들게 하는지도 몰랐다.
행복해지려 하지만, 행복해지면 안 될 것 같아서 행복해지지 않으려 한다. 행복해지면 불행해질 것 같아서 행복해지지 않으려는 당착이 그를 지배한다. 행복은 그가 간절하게 갖기를 원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갖게 될까봐 주저하는 것이 된다.
고아의 내부에는 그처럼 복잡한 회로가 엉켜 있다. 선희는 영석을 만나는 동안, 특히 연애 초기에 크고 작은 상처를 많이 받았는데, 그것은 영석이 자기 내부의 엉킨 회로를 제대로 풀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해 생긴 일이었다.
사실 영석이 사랑을 탐구하지 않는다는 것은 오해일 수도 있다. 영석의 사랑이라 여겨지는 것들이 모두 선희의 추측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고아의 사랑으로 비유된 영석의 사랑은 어쩐지 형배의 사랑과도 닮아 보인다. 고장난 사람들은 사랑을 알아감과 동시에 자신을 알아가야 하기에 다른 사람들보다 많이 아픈 법이다.
줄기를 휘감고 올라간 탐욕스러운 이파리들로 인해 참나무의 몸통은 아예 보이지 않았다. 나무의 몸통을 휘감은 넝쿨 줄기들은 다른 넝쿨 줄기들과 얽히고설켜 난잡했다. 그날 그녀가 거기서 본 것은 아름다움이나 에로티시즘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전력투구였다. 사랑이 아니라 생존이었다. 사랑이라면, 그것은 생존을 위한 사랑일 것이다. 살기 위해 사랑의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랑도 있는 것이다. 아니 단지 살고자 움직였을 뿐인 움직임을 외부의 시선이 사랑으로 읽은 것일 수도 있다. 생존이라는 한 이국의 단어가 사랑이라는 단어로 번역된 책을 읽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선희는 영석의 사랑이 그런 사랑이라는 것을 나중에 깨달았다. 그의 사랑이 왜 그렇게 집요하고 필사적인지, 목숨을 건 것처럼 맹목적인지, 사랑이 아니라 다른 걸 하는 것처럼 느껴지는지, 다른 사람의 사랑과 다른지 깨달았다.
그런 사랑도 있었다. 생존을 위한 사랑. 선희는 영석의 사랑을 그렇게 치부했다. 그것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두려운 결의 사랑이었다. 내 사랑이 아니라고 내 사랑이어선 안 된다고 외면하는 와중에 맞닥뜨린 형배의 오만은 선희의 사랑에 확신을 주게 된다.
형배는 자기가 물속으로는 들어가지 않고 물 밖에서 물의 성분과 성질을 따지는 연구자와 진배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선희와 영석은 물 안에 있었다. 그들이야말로 사랑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행하는 이들이라는 사실이 깨달아졌다. 물속에 들어가 물의 파동에 몸을 맡긴 사람은 물 밖의 조건들과 상태에 연연하지 않는다.
운명처럼 만나 바로 사랑을 확신한다면, 사랑하면서 아플 일이 적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대부분이 사랑을 하면서 사랑을 알아가기에 나아가 자신을 알아 가야하기에 아플 수밖에 없는 것이리라. 이전의 나도 형배 못지않게 타인의 사랑을 쉽게 멸시하고 냉소했었다. 사랑을 하는 와중에도 진짜 사랑은 다른 것일지 모른다 생각하기도 했다. 그 같은 경솔을 스스로 알게 되는 것은 나에게도 아픔이었다. 하지만 사랑을 냉소하는 때에도 난 늘 사랑을 믿었다. 유치한 모순. 스스로 자초한 당착은 사랑에 자꾸만 여지를 주었던 탓일 거다. 나는 영원히 사랑을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