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무도회에 초대된 고독한 사람들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장자크 루소. 리뷰

by D보노

sns를 가까이 하지 않는 내가 얼마 전 이벤트에 눈이 멀어 계정에 로그인한 일이 있었다. 물론 자책하며 서둘러 로그아웃했지만 말이다. 마음 한편에 늘 선한 마음으로 그들을 그리워했노라고 믿고 있었는데 사실은 아니었던 걸까. 그리움보다는 미움이나 경멸, 시기가 더 많다는 것을 깨닫고 인정하는 동시에 심한 자책감이 몰려왔다. 이러한 동요로 순식간에 마음이 어질러졌는데, 사람들은 어떻게 매일 이것을 가까이 두고 즐길 수 있을까 위화감이 들어 책을 들고 밖으로 나가 걸었다.


예전에 사람들 눈에서 호의만 보고, 더 나쁜 경우라 해도 모르는 사람들 눈에서 무관심만을 보던 때에는 나도 세상 속에서 즐겁게 살았다. (중략) 오늘날에는 거리에 발을 내딛기만 해도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들에 둘러싸이게 된다. 나는 교외로 나갈 때 서둘러 성큼성큼 걷는다. 그러다 초목이 보이기만 하면 곧 숨을 돌리기 시작한다. 내가 고독을 좋아한다 해서 놀랄 일이겠는가? 사람들의 얼굴에서는 적대감만 보이지만, 자연은 언제나 내게 웃어준다. (아홉번째 산책 p157 中)


루소는 일생 동안 매일 산책을 했다고 한다. 오랜 지병 탓이기도 했지만, 산책은 그의 예민만 기질을 어르기에 효과적이었다. 물론 내가 사람들과 한데 뒤섞여 어울리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 루소가 말년에 겪고 있던 상황과 같지는 않다. 루소는 자기만의 원칙이 강했고, 그러한 좋게 말해 ‘소신’은 그가 속한 집단 전체를 뒤흔들고 배격당하기에 충분했다.


루소를 등단케 한 논문이 학문과 예술을 비난하는 『학문예술론』이었고, 연극이 사람들의 마음에 허영심을 조장하고 자신을 외면하게 만든다고 비난하면서 연애소설인 『누벨 엘로이즈』를 썼으며, 교육론 『에밀』의 저자이면서 정작 자신의 아이들을 고아원에 버린 루소의 특이한 이력은, 그에 대한 많은 비난과 조소의 빌미를 제공했다. 게다가 『학문예술론』의 성공 이후, 그는 자신이 주장한 미덕을 몸소 실천하려는 작가로서의 진정성을 발현하여 귀족들의 문예옹호 제도가 주는 혜택을 거부하고 사치스러운 의복과 시계도 포기한 채 악보 필경사로 살기를 선택했다. 이렇게 사교계와 ‘문예공화국’을 등지는 루소의 행적은 계몽철학자들과의 불화를 야기했을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비난 여론을 형성시켰다. 급기야 1762년 파리 고등법원은 『에밀』을 불경한 서적으로 규정하고 루소에게도 체포령을 내린다. 루소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이상한 괴물, 풍속을 해치는 자로 여기며 자신에게 온갖 모욕을 주기 위해 공모했다는 피해 의식에 시달리게 된다. (문학동네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역자 문경자님의 해설. p171 中)



‘첫 번째 산책’을 읽기 까지만 해도 저자의 분노가 심하게 느껴져 책을 덮을까도 많이 고민했었다. 주변에 흔히 있는 말로만 초연해진다 하는 사람처럼 느껴졌기 때문인데, 책장을 넘길수록 깊어지는 사유의 문장들이 끝까지 책을 붙들고 있게 했다.


이렇게 혼자 산책하면서 때때로 맛보는 도취감과 황홀감은 나를 박해한 자들 덕분에 누리게 된 쾌락이다. 그들이 없었다면 나는 내 안에 품고 있던 보물들을 발견하지도 알아차리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 풍성한 보물들 한복판에 있으면서 어떻게 그것을 충실히 기록하겠는가? 그토록 달콤한 몽상을 다시 떠올리려 할 때면 나는 그것을 묘사하는 대신 다시 거기에 빠져들곤 했다. 몽상의 기억이 나를 데려가는 곳은 바로 이런 상태로, 그런 느낌을 조금이라도 가질 수 없게 되면 그에 대한 인식도 이내 멈춰버리는 그런 상태다. (두번째 산책. p20 中)


루소는 고독을 스스로 즐기기 시작한 것이 아님을 초반부터 인정한다. 자신을 박해한 사람들로부터 비롯된 고독을 즐기게 되기까지의 시간이 필요했고, 그것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그는 기록하기 시작했다. 많은 작가들이 기쁠 때 글이 잘 써지지 않는다고 이야기했던 것 같다. 고독도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고독을 처음부터 자초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고독은 글쓰기와 비슷해서 마음이 밝음보다는 어둠에 가까이 있을 때 스스로 찾게 되는 경향이 큰 것 같다. 그렇게 고독 속에서 자신을 기록하기로 마음먹은 루소는 총 열 개의 산책 기록에서 고독과 몽상, 과오에 대한 해명, 배움과 연구, 거짓과 선행, 행복과 자유, 식물학 등에 대해 다양하게 이야기한다. 그러다가 나는 페이스북을 들추다 어질러진 마음을 다스리기에 괜찮은 구절을 발견한다. 내가 느끼는 ‘불행’과 ‘불안’이 결국은 매우 상대적임을 인정하게 하는 대목이었다.


불행의 가장 날카로운 공격을 피하는 방법은 더는 그 불행에 신경쓰지 않는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불행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게 불행은 아무것도 아니다. 자신이 겪고 있는 불행에서 불행 자체만 보고 그 의도를 보지 않는 사람에게는, 또 자신감이 있어 남들이 기꺼이 내준 자리에 좌지우지되지 않는 사람에게는 모욕도 복수도 차별 대우도 불의도 아무것도 아니다. 사람들이 나를 보는 방식이 어떠하든 그들이 내 존재를 바꿔놓을 수는 없고, 그들의 위력과 온갖 음험한 음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이 나는 계속해서 지금의 나 그대로 존재할 것이다. (여덟번째 산책. p135 中)


바쁜 일상 속에서도 남들보다 뒤쳐져선 안 된다는 강박에 모두들 sns에 심취하고 있다. 실로 sns라는 가장 무도회는 외로운 사람들의 축제다. 그 안에 전시된 행복들은 모두 사람에 대한 기대를 전제하고 있어서 고독한 사람들은 소외되기 마련이다. 혼자임을 인정한 사람들, 그들은 기대라는 게 헛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전시된 행복들은 얼마만큼 행복에 닿아 있을까.


우리가 느끼는 가장 강렬한 향락 속에서도 마음이 진심으로 이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은 거의 없다. 이전의 무엇인가를 그리워하거나 이후의 어떤 것을 욕망하게 만드는, 그런 덧없는 상태를 어떻게 행복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중략) 내 마음이 아쉬워하는 행복이란 덧없는 순간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는 조금도 강렬하지 않지만 지속되면서 점점 매력이 커져 마침내 그 속에서 최고의 행복을 찾게 되는, 그런 단순하고도 영원한 상태다. (다섯번째 산책. p85,86 中)

휴식이 사실 별것 아니기는 하지만 경쾌하고 기분좋은 생각이 영혼의 바탕은 흩뜨리지 않고, 말하자면 그 표면을 스치기만 한다면 휴식 또한 더욱 유쾌해진다. 자신의 모든 불행을 잊고 자기 자신을 생각하기에 충분한 그런 휴식만이 필요하다. 이런 종류의 몽상은 조용히 있을 수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맛볼 수 있어서, 나는 종종 바스티유나 심지어 어떤 대상도 내 눈을 자극하지 않는 지하 독방에서도 즐겁게 몽상에 빠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다섯번째 산책. p88 中)


그래도 가끔씩 뜻하지 않게 헛된 마음에 사로잡힐 때면, 이 책에서 일컬어준 대로 조금 걸어볼 일이다. 온전히 혼자가 될 수 있는 곳에서, 다른 생각들을 차단하고 공간(자연)과 내가 하나가 되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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