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기너스> 마이크 밀스. 리뷰
누구나 사랑에 대한 선입견을 갖고 있다. 내가 고집스럽게 사랑에 경중이 있다 믿는 것처럼. 하지만 보통 선입견은 사랑에 힘을 실어주는 역할이기 보다는, 사랑을 막아서거나 등 돌리게 하는 일등공신이어서 문제가 된다.
올리버(이완 맥그리거)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평생 곁에서 보아온 부모님의 사랑이 곧 자신의 사랑에 대한 선입견이자 잣대 역할을 한다. 서로를 존중하며 살아가셨지만, 무미건조한 키스로 일관했던 열정 없는 부모님의 부부 생활. 이 때문인지 올리버에게는 관계의 시작보다는 늘 유지가 고민이었다. 결국은 사랑하게 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그를 지배했던 탓일까. 어렵게 시작된 사랑일지라도 곁에 둔 사람을 처절하게 밀어내는 자신을 매번 발견하는 것은 가혹한 일이었다. 그런 그에게 아버지의 말년은 사랑에 대한 많은 질문들을 던진다.
올리버의 아버지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커밍아웃을 하게 된다. 게다가 자신을 가감 없이 광고하고 젊은 애인을 구한다. 아버지는 보다 적극적으로 사랑을 찾아 나선 것이다. 올리버는 그제서야 왜 자신의 부모가 그토록 서로에게 열정이 없었는지... 왜 가족 안에 알 수 없는 외로움이 존재했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은 명쾌한 답임에도 사랑의 도피처를 없애는 역할을 하여 그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자신의 선입견을 합리화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그는 같은 곳에 머물면서 많은 사람을 떠났다. 어떠한 노력도 무용지물이며, 자신의 부모처럼 사랑은 원래 그런 것이라 굳게 믿었는데 이제는 도망갈 곳이 없어진 것이다.
파티를 싫어하는 사람이 이상하게 이끌려 나간 파티에서는 유독 닮은 사람이 있다. 서로는 서로를 알아본다. 슬픈 눈은 슬픈 눈을 알아본다.
이를 영화에서만 자주 본다싶지만 사랑에 보수적인 사람들이 사랑에 빠지는 패턴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원래 알던 사람이 아닌 우연히 알게 된 사람의 진가를 알아가는 편을 더 선호하는 것 같다.
올리버는 안나(멜라니 로랑)에게서 단숨에 운명을 느낀다. 그녀는 신비로운 매력을 풍기는 만큼 그와 닮은 구석이 많았다. 한 곳에 머물지 않고 호텔을 옮겨 다니며, 언제든 사람들을 떠날 준비를 하며 살아가는 그녀였다. 해서 서로에게 이끌리는 만큼, 결국은 같은 이유로 서로를 떠나보내고 떠나게 될 것임을 직감했다. 끝을 전제한 연애가 행복할리 없지만, 그 이상으로 서로를 당기는 힘이 대단하여 자꾸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를 기대하게 했다.
아버지의 커밍아웃으로 비롯된 도피처 상실로 새로운 핑계거리를 찾아 헤매던 그였다. 하지만 안나와의 운명적인 시작으로 다시금 사랑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사랑에 대한 선입견에 직면하여 새로 정의하려 애쓴다. 그녀는 그렇게 그에게 처음으로 애쓰고 싶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사랑의 재 정의를 막아서는 장애물이 있었다. 어머니가 아버지가 결혼 전부터 게이임을 알고 결혼했다는 사실 말이다. 아버지는 여러모로 그에게 새로운 숙제를 안겨준다. 어머니는 아버지 당신을 고쳐줄 수 있다고 자신했다 한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비슷한 고충을 극복해야만 하는 올리버와 안나에게 그 문제는 사랑을 막아서는 가장 큰 벽이 된다. 올리버는 안나와 결국 헤어지게 된다.
올리버는 안나가 떠난 자리에서 홀로 남아 어머니의 모습을 되뇐다. 엉뚱한 모습 속에 감춰진 우울한 뒷모습만이 어머니의 전부는 아니었다. 어머니는 누구보다 아버지를 사랑했고 그만큼 사랑받길 기대했다. 어머니의 모습 속에서 간과했던 무력한 눈빛을 읽는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아닌, 사랑하면서도 무력한 사람의 눈빛을 말이다. 그것은 안나의 것과 매우 닮아있었다. 자신을 사랑하면서도 무력해서 슬퍼했던 그녀의 눈빛을.
올리버는 이제까지 어림짐작해왔던 모든 사랑의 시작과 결말을 부수려 한다. 이것은 아버지로부터 비롯되었지만, 그녀 때문에 일어난 기적이라고 할만하다. 관계를 적극적으로 다시 시작하고, 극복하려 애쓰는 것은 그에게도 그녀에게도 처음 있는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랑을 처음 시작할 때, 자신에게 어떤 ‘처음인 마음’이 동기가 되는 경우가 많지 않던가. 올리버와 안나도 멀리 돌아서 결국은 사랑의 보편에 안착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다짐과도 같은 눈빛을 끝으로 영화는 끝이 나서 더 이상 그들의 이야기를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이 일방적으로 누군가를 고쳐주는 사랑이 아닌, 서로를 보듬는 사랑을 해 나갈 것이라 기대하게 된다. 내가 자주 이 영화를 꺼내보고, 그들의 사랑이 오래가길 비는 것은 내 사랑의 이입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