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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덕X최덕 Dec 12. 2019

모두가 <동백꽃 필 무렵>에
열광할 때

혼자 산통 깨는 소리를 해보자

최덕은 <동백꽃 필 무렵>을 1화부터 쭈욱 보았으며, 다수의 시청자가 그렇듯 황용식이의 촌므파탈의 매력에 푹 빠져서 종방까지 달려버린 시청자였다. 많은 시청자들이 강하늘의 ‘재’발견이라고 황용식 캐릭터를 칭송했고, 최덕은 강하늘이라는 배우의 약간은 촌스럽지만 그만큼 우직해보이는 매력을 잘 살려준 캐릭터로 황용식을 사랑했다. 특히나 ‘니가 먼저 했다’ 키스신 이후에 동백이를 데려다주면서 ‘좋아해유’ 라고 고백하는 부분의 황용식에 대해서는 백줄 정도는 쓸 수 있다.(그러나 줄이도록 하겠다.)

KBS <동백꽃 필 무렵> 17-18회에서 탄생한 '니.먼.했' 키스

 그렇다고 해서 아쉬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메이킹 필름에서 강하늘 배우가 말한 바에 따르면 황용식의 대사는 일부러 로맨스의 기운을 살려야 하는 부분에서는 심한 사투리를 빼고 서울말을 사용하길 디렉팅 받았다고 한다. 그런 디렉팅의 힘으로 ‘니.먼.했’ 키스신 같은 명장면이 탄생했고, 처음에 제목과 줄거리를 보고 최덕이 우려했던, 드라마에서 나는 ‘촌스러운 느낌’을 로맨스에 적절하게 녹일 수 있었던 것이리라. 시청층이 원하는 두 주연 배우의 멜로를 놓치고 가지 않는 이 방식은 제작발표회에서 말했던 '로맨스4 휴먼4 스릴러2'라는 적절한 배합이 약 20화까지는 아주 적절하게 버무려진 채 쭈욱 나아갈 수 있었던 힘이기도 했다. 


 ……그리고 약 30화에 다다랐을 때 최덕은 이런 생각을 했다. 

 '까불이'가 실검에 오르던 그 순간부터 이 드라마를 놨어야 하는 게 아니었을까? 

 어쩌면 제작발표회에서 '휴먼5 스릴러4 로맨스1'을 잘못 말한 게 아니었을까?


 이미 네이버 실시간 댓글창에서는 까불이가 흥식이, 아니면 흥식이 아버지라는 말이 공공연히 돌고 있는 데(어쩌면 드라마 시청자들의 너무 빠른 촉이 문제였을지도 모르겠다. 제작진이 시청자들과 지니어스 게임을 시작하고 싶게 만들었으니까.) 제작진은 홍자영부터 동백이 엄마, 제시카, 노규태까지 웬갖 용의자들을 등장시키며 스릴러로 스토리를 지지부진 끌어갔다.


 그 뿐이랴. 각성에 각성을 거듭하고도 동백이는 엄마 때문에 울고, 향미 때문에 울고, 필구 때문에 울고, 그 놈의 팔자 때문에 우느냐 줄거리 소개에도 버젓이 써있는 본인의 ‘하마’력은 전혀 발휘하지 못하고 흥식이한테 맥주500잔을 던지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이 외에도 최덕은 동백이 캐릭터 빌딩에 대해 문제를 느끼는 부분이 많이 있는데, 그 중 몇 가지는 상세하게 적어보고자 한다.




 우선, 동백이는 대체 왜 종렬이의 3천만원을 받지 않았나. 동백이는 필구가 47만원의 경비가 드는 중국 여행도 보내줄 수가 없도록 어려운데 필구에게 ‘숟가락’을 얹을 지도 모른다는 무형의 공포 때문에 친부에게 양육비를 받지 않는다. 그것은 필구를 위한 일도 아니지만 동백이 스스로를 위한 일도 아니다. 실체가 없는 두려움 때문에 아들과 스스로를 궁지에 모는 선택은 참으로 비논리적이기도 하지만 더 큰 문제가 있다. 이 드라마에서 전면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 ‘싱글맘’ 이슈인데, 많은 싱글맘의 불행은 단순히 ‘사회적 시선’에 의한 차별에서 오지 않는다. 아이의 아버지에게 경제적 지원을 받지 못하는 현실적인 문제가 더 크게 작용하고 있다. ‘싱글맘’이라는 설정을 단순히 동백이를 모성애의 화신, 불행한 여자 정도로 몰아넣기 위해 쓰기에는 이 세상이 그렇게 평평하지 않다. 동백이가 사이다를 보여주는 장면은 사실 흥식이를 맥주잔으로 때려잡는 장면이 아니라 애 아버지에게서 매달 적정 수준의 양육비를 받아내고도 ‘내면의 죄책감’ 같은 걸 갖지 않는 장면이었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KBS <동백꽃 필 무렵> 35-36회 동백과 용식의 이별


 또 하나, 필구가 결혼을 싫어한다고 하자 동백이는 용식이와 헤어진다. 현실적으로 아이가 있는 여자/남자와의 결혼에 여러 장애물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결혼을 못하면 연애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인가? 또, 동백이가 용식이에게 이별을 고한 시점은 용식이와 풍문에 휩싸였던 때도, 덕순이 속상해했을 때도 아닌 필구가 ‘결혼’이 싫다고 했을 때였다. 필구는 겨우 8살이고, 아직은 미성숙한 나이다. 그런 아이에게 결혼을 정확하게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과정 없이 필구의 어리광을 받아주는 것은 옳은 걸까? 필구는 동백이의 아들일 뿐이지, 동백이의 인생을 결정할 권리는 없는데도?


가장 묻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왜 엄마들은 아무런 조건도 없이 자식들을 위해 희생해야 하나? 이 드라마가 덕순과 동백이라는 싱글맘들, 그리고 옹산의 다양한 여성들을 등장시킴으로써 우리가 사랑하는 여배우들이 대거 등장한 것은 이 드라마의 큰 장점이다. 그러나 엄마들이 끊임없이 스스로를 탓하고, '남자의 도움 없이 해내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하는 것을 보다보면 이것은 여성 캐릭터를 가두는 또다른 제약이 되는 게 아닌가, 자문하게 된다. 특히나 50프로의 확률로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유전병 때문에(결국 없다고까지 결과도 나왔다.) 딸의 신장을 끝까지 거부하는 동백이의 엄마는 자식을 위해서라면 엄마는 자신의 인생조차 포기해야 한다는 모성애의 고리타분한 신화를 떠올리게 했다.

 

휴먼이라는 이름 하에 엄마들의 희생(또는 불행 포르노)을 우리가 감상하는 동안 드라마는 로맨스4를 잊어버린 것 같았다.




 동백이와 용식이의 사랑은 결국 주말드라마에서 두 사람의 관계가 아닌 외부의 관계성 때문에 괴로워하다 결국은 또 외부의 관계성 회복과 함께(이를테면 여주인공이 부잣집 딸로 밝혀진다거나 남주인공이 웬수의 자식이 아닌 걸로 밝혀지는) 사랑을 이룩하는 두 남녀주인공의 서사로 축소되고 말았다. 최초에는 분명히 사회적 편견과 싸워나가는 하마와 대책없이 들이대는 촌므파탈의 사랑이야기 였던 것 같은데…. 대체 왜 동백이와 용식이는 시어머니의 관용 내지는 아들의 인정 없이는 사랑할 수 없는 걸까? 그 이유는 어쩌면 이미 제작진이 우리에게 이미 알려줬을지도 모른다. ‘왜냐면 저 둘은 착하거든. 착한 사람들은 어머니와 아들을 저버리지 않거든.’이라고. 하지만 가끔은 묻고 싶다.


" <동백꽃 필 무렵> 뿐 아니라 다른 수많은 한드들은 대체 왜 둘만 사랑하게 내버려두지 않는가?"라고.

 배우와 작가, 감독 모두가 행복했던 40화의 대장정의 마무리에 스스로를 덕후라 칭하는 사람이 산통을 깨는 글을 쓰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저 시청률이 좋다고, 화제성이 있었다고, 몇몇 장면이 우리를 행복하게 했다고, ‘드라마는 원래 그냥 재미로 보는 것’이라고 입다물고 있는 것도 옳은 길은 아닌 것 같다. 시대는 변하고 있고 그에 발맞추지 못하는 미디어는 결국 도태되니까.


 내가 사랑하는 한드는 영원해야 하니까!


2019년 11월 23일

by 최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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