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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덕X최덕 Feb 01. 2020

의학이 의료 서비스가 되기까지

<라이프>와 <판데믹>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의 국내 확진자가 11명으로 늘면서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가 심화되어 가는 요즘이다. 3차 감염이 뚫렸다는 뉴스는 모두를 경악에 빠뜨렸다. 질병 관리 시스템, 질병관리본부 따위의 키워드가 매일 같이 검색어에 오르고 있다. 최덕 역시 자연스레 인플루엔자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봤다. 넷플릭스에서 ‘이때다!’하고 홍보하고 있는 다큐멘터리 <판데믹> 1화를. <판데믹>을 클릭한 많은 사람들은 <판데믹>이 변이 바이러스에 대한 의학적 지식을 알려주길 바랐겠지만 <판데믹>은 그보다는 전염병에 대처하는 시스템과 그 시스템을 실행하는 의료인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의학적 지식’과 의료 시스템 안에서 의료인의 손을 거쳐 환자에게 주어지는 ‘의료 서비스’는 다른 개념이다. 무엇이 더 중요하다고 일컬을 수는 없으나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와 같은 전염병의 경우 딱히 치료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는 질병 관리 시스템과 의료인들의 대처를 포괄한 의료 서비스가 강조될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의 전염병 관리 시스템은 꽤 선진화되어 있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신종 플루와 메르스라는 시련을 맞아 본 경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메르스 당시 대한민국 정부의 대처는 조롱의 대상이, 병원은 기피의 대상이 되었다. 남궁인 의사의 최근 기고문에서 차용하면 ‘관리자에게는 가혹할 정도’로 메르스 이후 전염병 대처 시스템은 확연하게 바뀌었다.


"메르스가 퍼졌을 때 우리나라 병원들도 같이 아팠어요."


<라이프> 속 이노을 선생의 대사처럼 말이다. 음압 병동의 개념이 없었던 대한민국 병원에는 메르스를 계기로 이제 음압 병동이 생겼다. 음압 병동은 기술이 없어서 못 만든 게 아니라 정치적 논리가 부족해 만들어지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메르스와 같은 큰 이슈가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위기관리를 위한 투자 비용을 지출하는 데에 망설임이 없도록 만들어주었다.


 한마디로 의학의 발전과 별개로 시스템을 바꾸는 것은 정치 논리로 뒷받침되는 자본이다.


“연간 유지비가 3천 정도 상회하는데 거의 안 써먹는 시설이죠.” 구승효는 비의료인 총괄사장으로 병원 사정을 돈으로만 파악한다. 극 후반엔 변화를 겪지만.


 <라이프>에서 두 사람의 대사는 매우 상징적이다. 왜냐하면 <라이프>는 현 대한민국에서는 의료법 상 허용되지 않는, ‘대학병원의 총괄사장제가 허용된다면’이라는 가정 하에 만들어진 이야기로, 상국대 병원의 사상 최초 CEO로 구승효가 도착하면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의사로서의 사명감이 투철한 이노을이라는 캐릭터는 질병인 메르스가 병원에 음압 병동을 만들어 시스템을 바꾸어주었듯, CEO 구승효가 병원에 새로운 시스템을 만드는 경종이 되어주길 바란다. 그러나 구승효는 자신은 ‘누굴 구원하러 온 것도, 망치러 온 것도’ 아니라고 말하며 질병이 되는 것도, 경종이 되는 것도 거부한다.



그러면서도 구승효는 교수들이 먼저 수술방을 잡거나 의료사고를 쉬쉬하는 병원 내 의료인들 사이의 악습을 철퇴하는 역할을 한다. 만일 구승효라는 인간이 병원에 침투한 ‘자본의 논리’ 그 자체를 상징한다고 읽는다면 이 드라마는 흥미롭게 독해할 수 있다. 구승효는 고인물이 되어버린 의료인들의 폐단을 바로잡으면서도 간호사들의 초봉을 후려치고 제약회사에 이득이 되는 쪽으로 환자들의 돈을 짜내려 하기 때문이다. 자본의 양날을 다 보여주는 것이 구승효의 캐릭터이다.




  의료 행위가 자본의 논리에 과하게 휩쓸리는 것은 옳지 않다. <판데믹> 속에서 항체 백신을 개발하는 이들이 펀딩을 받지 않는 이유도 이런 맥락이다. 그들의 머릿속에 있는 항체 백신 개발 아이디어를 실행하는 과정에서 이득을 내려다보면 백신 개발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공공성을 잃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회 계급의 아래층이 될 거예요. 자원을 보급 받는 측면에서 말이죠.” _ 범유행 바이러스에 대처하는 의료 시스템은 자본과 정치의 논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또한 물자가 부족한 시골마을의 단 한 명뿐인 의사는 늘 위험에 노출된다. 즉, 의학이 의료 서비스가 되기 위해서는 자본의 논리, 정치의 논리가 쉼 없이 끼어들기 마련이다. 그 사실은 부정할 수도 없고 부정해서도 안 된다. 오히려 이용해야만 한다.


 한국 의학 현실을 디스토피아로 그린 <라이프> 속에서 정치인은 사업가와 결탁해 의료 서비스를 민영화시키는 데에 기여한다. 병원이 산산조각 날 위기 속에서 선한 의지를 가진 의료인들이 힘을 모아 병원을 살리려고 하긴 하지만 그 시도도 아슬아슬해 보이기만 한다. 개과천선(?)한 구승효는 병원을 떠나고, 병원은 더한 독종 CEO를 맞이한다. 마지막화 구승효의 대사가 인상적이다.



“미래의 의료기관은 아픈 사람들을 치료해주는 곳이 아닌 가진 자들의 건강을 유지시켜주는 곳이 될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기본이 변질되는 것을 얼마나 버틸 것인가.”


<라이프>의 결말은 그렇게 열린 채 끝이 난다.


드라마는 끝났지만 우리의 현실은 ing다. 메르스가 만들고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써먹게 된 이 질병 관리 시스템의 허점과 강점은 무엇인지, 사스 때 만들어진 질병관리본부는 얼마나 잘 굴러갈 것인지, 우리는 내내 지켜봐야 한다. <라이프>에서는 그 역할을 선한 의지를 가진 일부 의료인들이 했으나 현실에서는 국민들이 해야 한다. 참정권과 투표권을 가졌으며 직접 의료 서비스의 수혜자가 될 국민들이 말이다.


2020.1.31

by.최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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