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과 도덕, 그 사이에서 흔들리는 정의
정의는 언제나 옳은가?
『앵무새 죽이기』 속에서 애티커스가 보여준 정의는 끝내 패배했지만, 그 과정 자체가 빛이 되었고 우리에게 희망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정의가 언제나 빛으로 남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한 사람의 내면에서 길러진 정의가, 세상을 밝히기는커녕 스스로를 갉아먹는 그림자가 되기도 합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서 라스콜니코프가 내세운 정의가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는 세상의 불평등과 불의에 분노했고, 나름의 논리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만든 정의의 이름 아래 벌어진 일은, 결국 한 노파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그의 정의는 빛을 잃고, 죄의 무게로 그를 짓누르기 시작합니다.
찌는 듯한 7월의 여름, 가난한 대학생 라스콜니코프는 치밀한 계획 끝에 악덕 전당포 노파를 도끼로 살해합니다. 그는 이 행위를 단순한 살인이 아니라, ‘해충을 없애는 것’에 불과하다고 합리화했습니다. 한 인간의 목숨보다 그녀의 죽음으로 더 많은 젊은이들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자기 논리였습니다.
그러나 범행 직후부터 그는 곧바로 무너져 내립니다. “위대한 인간만이 법과 윤리를 초월할 수 있다”는 사상은 흔들렸고, 그의 내면은 죄책감과 불안으로 뒤섞였습니다. 경찰이 아무런 눈치도 채지 못했음에도,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행위가 들통날 것 같은 강박에 시달립니다. 사회는 여전히 일상처럼 흘러갔지만, 라스콜니코프의 세계는 이미 균열이 나 있었던 것입니다.
노파는 탐욕스럽고 비윤리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담보물을 헐값에 매입하거나 가혹한 조건을 붙였지만, 그녀의 거래는 어디까지나 합법의 범주 안에 있었습니다. 반대로 소냐는 가족을 위해 몸을 팔았으나, 사회적 도덕과 법의 잣대는 그녀를 타락한 여성으로 낙인찍었습니다. 한쪽은 법의 보호를 받았고, 다른 한쪽은 법과 윤리로부터 외면당했습니다.
라스콜니코프는 이 모순을 직시했습니다. 법이 언제나 도덕적이지 않으며, 도덕이 언제나 합리적이지도 않다는 사실을 그는 날카롭게 꿰뚫었습니다. 노파의 삶은 사회적으로 유해했지만 법은 그녀를 지켜주었고, 소냐의 삶은 숭고했으나 법과 도덕은 그녀를 배제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내면과 행위의 본질을 보려 했지만, 그 선택은 결국 살인이라는 가장 극단적인 방식으로 나타나고 말았습니다.
이 대비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집니다. 법은 인간이 만든 합의의 산물일 뿐 절대적 진리가 아니며, 사회적 도덕 역시 시대와 환경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죄’를 정의하고 ‘벌’을 부과할 수 있을까요? 라스콜니코프의 범행은 그 질문을 더 날카롭게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라스콜니코프의 열병은 단순한 병이 아니라, 살인을 준비하는 순간부터 시작된 내적 죄책감의 증상이었습니다. 그는 범행 후에도 끊임없이 자기 논리를 되뇌었지만, 그 논리는 더 이상 그를 지탱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삶은 불안, 의심, 환영으로 가득 찼고, 오히려 주변의 무심한 일상은 그를 더 고립시켰습니다.
결국 그는 자백을 택하고, 시베리아 유형으로 보내집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유형지에서의 강제적 형벌은 그에게 새로운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주었습니다. 사회적 처벌은 자유를 빼앗지만, 스스로의 죄를 자각하는 순간 그 벌은 진정한 의미를 갖기 시작합니다. 도스토옙스키가 교도소를 단순한 격리 시설이 아니라 ‘교화 시설’로 그린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진정한 벌은 외부가 아닌, 인간 스스로가 자기 죄를 인식하고 견뎌내는 순간에서 비롯됩니다.
『죄와 벌』은 단순히 한 청년의 범죄와 참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작품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죄란 무엇인가?”
“누가 죄인인가?”
“인간은 구원받을 수 있는가?”
도스토옙스키는 법과 도덕, 신념과 생존이 서로 충돌하는 현장에서 우리가 반드시 어느 한쪽을 선택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그렇기에 이 소설은 시대를 넘어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지며, 오늘의 우리에게도 불편한 울림을 남깁니다.
세상은 인간의 기준만으로 완벽히 정의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언제나 질서를 갈망하며, 세상을 분류하고 규정하려 합니다. 라스콜니코프는 자기만의 정의로 세상을 재단하려 했지만, 그 기준은 곧 스스로를 파괴하는 덫이 되었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다루려 합니다. 생물학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수많은 종을 수집하며 자연의 혼란 속에서 ‘질서’를 세우고자 했지만, 그의 분류는 결국 허상임이 드러났습니다. 인간이 만든 정의와 분류 체계가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는 점에서, 라스콜니코프의 오만과 조던의 집착은 닮아 있습니다. '질서를 향한 인간의 강박’이라는 주제를 매개로 두 작품은 서로 다른 길에서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by 사색하는 덕주부
책을 읽고, 삶을 사유하며,
언젠가 아들에게 전할 기록을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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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 사용된 이미지는 AI 생성 도구를 통해 직접 제작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