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허상의 질서와 혼돈의 진실

질서의 경계가 사라진 자리에서 비로소 드러나는 것들

by 사색하는 덕주부

『죄와 벌』에서 라스콜니코프는 자신만의 정의로 세상을 재단하려 했지만, 그 기준은 곧 스스로를 무너뜨리는 덫이 되었습니다. 인간은 늘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법과 도덕, 옳고 그름의 잣대를 세우지만, 그 기준은 언제나 불완전하고 흔들립니다.

이 집착은 인간 사회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우리는 혼란스러운 자연에도 이름을 붙이고 질서를 부여하며, 무한한 다양성을 억지로 구획하려 합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바로 그 집착이 얼마나 허망한 결과를 낳는지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질서’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붙잡으려 했던 인간의 오만을 드러내며, 우리가 믿고 있는 기준이 어디까지 유효한가를 묻습니다.




혼돈 앞에 선 한 사람


저자 룰루 밀러는 어린 시절, “인생의 의미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특별한 의미는 없으며 혼돈만이 존재한다”는 아버지의 대답을 들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된 그녀는 이성이 아닌 상대에게 끌리는 자신을 발견하고 혼란에 빠집니다. 그 순간, 어린 시절의 아버지의 말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혼돈 속의 나침반

삶이 혼돈뿐이라면 무엇을 붙잡고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 속에서 그녀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인물에게 시선을 돌립니다. 혼돈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갔던 분류학자의 삶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은 것이지요. 그러나 그의 삶을 추적하는 여정 끝에서, 그녀는 또 다른 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집착이 낳은 또 다른 혼돈


학자로서의 조던은 수많은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연구를 이어간 인물이었습니다. 태풍으로 표본이 흩어져도 다시 모았고, 연구실이 무너져도 다시 일어섰습니다. 그의 끈기는 마치 태산처럼 굳건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지나치면 집착이 됩니다. 조던은 자신이 세운 분류 체계를 절대적 진리로 여겼고, 다른 가능성이나 반론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학문적 끈기가 오히려 좁은 시야가 되었던 것이지요.


균열이 간 분류표

이 집착은 결국 그를 우생학의 신봉자로 이끌었습니다. 인간을 분류하고 서열화할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은, 그가 자연의 혼돈을 억지로 질서화하려 했던 태도와 닮아 있습니다. 질서를 세운다는 이름으로 시작된 그의 신념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파괴했고, 인간 사회에 또 다른 혼돈을 불러왔습니다.




깨지는 경계선


책의 결말은 어류 분류학에 관한 과학적 사실을 들려줍니다. 최근 밝혀진 연구에 따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어류’라는 분류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나무 위에서 어떤 종이 어디서 갈라져 나왔는지를 살펴보면, 우리가 ‘물고기’라고 묶어 부르던 존재들이 사실은 전혀 다른 갈래에 속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물고기는 다른 물고기보다 인간과 더 가까운 친척입니다.


흩어진 계통수

고래는 물속에서 헤엄치지만 사실 인간과 더 가까운 포유류입니다. 우리가 ‘물고기’라 부르며 하나로 묶어온 분류가 얼마나 인위적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실입니다.




혼돈 속에서 발견되는 의미


우리는 세상을 이해하고자 끊임없이 분류와 규정을 시도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우리의 틀처럼 명확히 구획되지 않습니다. 룰루 밀러의 아버지가 말했듯, 이 세상은 정의할 수 없는 혼돈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름을 붙이고, 그 과정을 통해 믿음을 만들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사실이라 믿어온 것도 언제든 무너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물고기’라 이름 붙여 하나로 묶어온 집단은, 사실 과학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분류였습니다. 이름은 있었지만, 그 이름이 가리키던 경계선은 처음부터 허상이었던 것이지요.


결국 우리는 세상이 혼돈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혼돈을 받아들이는 순간, 오히려 그 안에서 새로운 의미가 피어납니다. 억지로 붙잡은 질서가 아니라, 혼돈 속에서 발견되는 작은 별빛 같은 의미 말입니다.


은하수 속의 물고기

혼돈은 결코 우리를 삼켜버리는 어둠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속은 은하수처럼 반짝이며, 길을 잃은 이에게 새로운 길을 비추어 줍니다. 그렇기에 우리 각자의 삶 역시, 그 혼돈 속에서 단 하나뿐인 빛으로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혼돈 속에서 발견한 질서를 우리는 ‘코스모스’라고 부릅니다. 이제 다음 이야기에서는 그 질서를 바라본 인간의 경이로운 시선을 따라가려 합니다.




by 사색하는 덕주부

책을 읽고, 삶을 사유하며,

언젠가 아들에게 전할 기록을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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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 사용된 이미지는 AI 생성 도구를 통해 직접 제작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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