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정의는 누구의 언어인가

불편한 단어, 사라진 주어, 그리고 다시 정의를 말할 권리

by 전재윤
※ 이 글은 브런치 시리즈 〈기후는 정치다〉 중 5편입니다.
‘정의’라는 단어가 낯설어진 시대.
누군가는 이 말을 붙잡고, 누군가는 외면한다.
우리는 무엇을 놓치고 있을까?

“기후정의는 누구를 위한 말입니까?”


정책토론회에 앉아 이 말을 들었을 때, 마음이 걸렸다.

그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땐 가슴이 뜨거웠다.

이제는 다소 낯설고, 때로는 과하게 느껴진다.


왜일까.

‘정의’라는 말이 점점 정치적 부담이 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정의라는 단어가 불편해진 시대

정의는 원래 부조리를 정면으로 말하는 언어였다.

하지만 지금은 ‘정치적인 말’, ‘진영의 말’로 소비되곤 한다.

“정의 타령 그만하라”는 댓글

“정의가 아니라 기술이 필요하다”는 언론

‘정의’를 앞세우면 불편해하는 정부 보고서


어느새 정의는 감성적이고 과격하며, 구체적이지 않은 말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사실 ‘정의’는 현실의 이름이었다

그러나 ‘기후정의’는 누군가의 감정이 아니다.

그건 정책에서 누가 우선되고, 누가 소외되는지를 말하는 기술적 개념이다.

에너지 요금 인상은 누구에게 더 부담이 되는가?

대중교통보다 전기차 보조금을 늘리는 건 누구를 위한 정책인가?

재개발 지역에 미세먼지 차단숲을 심을 때, 그곳에 사는 사람은 누구였는가?


기후정의는 결국 ‘주어’의 문제다.

그리고 한국 환경정책은 이 주어를 자주 놓친다.


기후정의를 말할 때,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누가 정책의 수혜자인가?”

“누구에게 더 많은 책임을 묻고 있는가?”

“이 정책은 누구를 전제로 설계되었는가?”


기후정의는 이 질문들을 반복하는 언어다.

이건 감정이 아니라 제도의 방향성을 묻는 일이다.


기후정의는 ‘운동가의 말’이 아니라, ‘시민의 말’이어야 한다

지금은 모두가 기후위기를 말하지만,

그 위기를 누가 더 많이 감당하는지에 대한 감각은 희미하다.

지하철보다 자가용이 편한 사람

매연보다 단가가 중요한 공장

임대아파트 옆에만 지어지는 쓰레기 소각장


정의는, 그런 불균형을 회피하지 않는 말이다.

그래서 피로하더라도, 여전히 필요하다.


우리는 누구의 언어로 말할 것인가

나는 환경을 공부하며, 정책을 쓰는 사람으로서

늘 ‘중립적인 언어’를 써야 한다는 압박을 느껴왔다.


하지만 가끔은 이렇게 묻고 싶다.


“정의라는 말을 피하면, 무엇으로 말할 수 있나요?”


기후정의는 과격한 말이 아니다.

다만, 직면하지 않으면 불편해지는 말일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