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테일즈 매거진 웹진 1호 <사랑>_사랑과 실패에 대한 이야기
학창 시절, 새 학기가 시작될 때면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내가 좋아할 만한 아이가 있나 하고 말이다. 그렇게 나는 매년 좋아하는 아이가 바뀌었다. 그 습관과도 같은 짝사랑 덕분에 나의 학창 시절은 매일이 핑크빛이었다. 등굣길에 혹여나 마주칠까 집 앞 버스 정류장을 서성거리고, 어쩌다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날이면 하루 종일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럴 때면 드라마에 나오는 로맨틱한 사랑을 하고 있는 거라 생각했다.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은 망한 사랑이라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 이제는 이름조차 흐릿해진, 나의 수많은 짝사랑들은 과연 실패한 사랑일까.
짝사랑의 실패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먼저 실패에 대한 정의가 필요하다. 실패는 제로 혹은 마이너스다. 행위의 끝에 아무것도 남지 않거나 되레 무언가가 사라지게 되었을 때, 그때가 바로 실패의 순간일 테다. 짝사랑 역시 마찬가지다. 짝사랑이 실패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 사랑이 끝나는 순간에 무엇이 남아 있는지를 보면 된다.
“너 왜 맨날 이런 데서 자냐? 지켜주고 싶게.” 영도의 사랑은 이런 식이다. 좋아하는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지 몰라 매사 툭툭거린다. 은상을 향한 마음을 장난이라는 보호막으로 꽁꽁 싸서 던지는 방식인 셈이다. 은상이 그 속에 있는 진짜 마음을 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듯 은상 역시 초능력자가 아니다. 마음을 읽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은상은 영도가 던진 딱딱한 사랑을 알아채지 못한다. 은상에게 영도는 그저 한없이 가볍고 짓궂은 남자아이일 뿐이다.
“뭘 어떻게 해? 내가! 난 내 상처도 어떻게 할 줄 모르는데 내가 네 상처를 뭘 어떻게 해?” 영도의 사랑은 이렇게 끝이 난다. 영도가 그토록 사랑을 꽁꽁 싸맬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오래전 엄마가 떠나고 남은 상처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랐던 것처럼, 은상을 향한 마음 역시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랐다. 영도는 이러한 사실을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짝사랑이 끝나게 되는 순간에서야 깨닫는다. 가시와도 같은 보호막으로 둘러싼 마음은 온전히 전달되지 못한다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된다.
은상과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영도에게는 다른 것이 남았다. 이후 엄마를 찾아간 영도는 자신의 인생 처음으로, 보호막 없는 진심을 쏟아낸다. 그동안 참 많이 보고 싶었다고, 미안했다고. 그렇게 영도는 진짜 사랑을 할 준비를 시작한다.
“내 신경은 온통 너였어, 너.” 진심 끝에 남긴 장난만큼 슬픈 고백이 있을까. 학창 시절 시작된 길고 긴 짝사랑을 정환은 그렇게 끝마친다. 덕선과 학교에 같이 가고 싶어 문 앞에서 신발 끈을 수차례 다시 묶고, 비가 오는 날이면 독서실 앞에 우산을 들고 기다리는 사랑이었다. 말 그대로 정환의 모든 신경은 덕선에게 쏠려 있었다. 다만, 가장 큰 문제는 그걸 덕선이는 몰랐다는 거다.
짝사랑은 암살이 아니다. 뒤에서 아무리 챙겨준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이 모른다면 소용없다. 정환이 자신에게 찾아온 수많은 기회들을 놓친 이유다. 소개팅을 나가도 되냐는 덕선의 질문에 고백으로 답했더라면, 덕선이 사준 옷을 형에게 준 게 아니라는 걸 말했더라면. 아마 정환의 짝사랑은 다른 결말을 맞이했을 수도 있을 거다. 그러나 정환은 그러지 못했다. 그렇기에 자신에게 오지 않은 기회마저도 잡아버리는 택의 앞에서, 그저 ‘거지 같은 타이밍’을 원망하며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정환 역시 덕선과의 사랑이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그러나 정환은 알았다. 사랑에 있어 타이밍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그 타이밍 앞에서 머뭇거리는 게 얼마나 독이 되는지를 알았다. 덕선과의 사랑이 남긴 짙은 후회가 정환에게 다른 사랑을 준 셈이다. 적어도 정환이 앞으로 자신에게 찾아올 또 다른 사랑 앞에 주저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망한 사랑은 없다.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모든 사랑의 끝에는 그 나름의 흔적이 남는다. 절대 제로, 혹은 마이너스가 될 리는 없다. 그 사랑이 설령 영도처럼 어긋났더라도, 정환처럼 닿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러니 마음껏 사랑을 하자. 사랑과 실패는 애초에 같은 문장에 놓일 수 없으니까.